소설리스트

학사신공-2049화 (1,806/2,000)
  • 2049화. 18층

    *

    충왕이 펼쳐 놓은 불의 장막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 일행은 통로로 날아들 수 있었다.

    수사들이 전부 동굴을 나서자 소안천은 손바닥에서 남색빛을 뿜어 얼음장벽으로 그곳 역시 막아 두었다.

    다른 이들도 각자 비술이나 선기를 이용해 몇 겹의 금제를 더한 다음 안심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곧 통로의 끝이 보이고 중앙에 암홍색 빛의 문이 있는 작은 석실이 나왔다.

    이전에 보았던 전송문(轉送門)과 똑같이 생긴 빛의 문이었는데, 그 옆의 비석에 고대 문자로 ‘옥사 출입금지’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한립 등은 그걸 보고 안색이 달라져 시선을 교환했다.

    “옥사라면 세월탑이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단 뜻 아닙니까.”

    부 곡주가 중얼거렸다.

    “1층의 금속수, 2층의 화세형충은 모두 죄수를 지키는 옥졸이었던 것이고요.”

    한립도 생각에 잠겨 말했다.

    정말 이곳이 태세선존의 옥사라면 바깥의 화세형충들이 순찰하는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여기서 추측만 하고 있느니 직접 3층으로 가서 확인해 보면 모든 게 확실해질 거예요.”

    소안천의 말에 다들 붉은 빛의 문을 보았다.

    문에 드리운 보통 결계와는 달라 보이는 암홍색 빛의 장막에는 금색 흔적 같은 게 떠다녔다.

    한립도 그걸 보자마자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빛의 문을 보고 있던 근류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는지 금제를 풀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걸 본 한립은 입을 달싹이다 말았다.

    “석 수사, 왜 그러는가?”

    부 곡주가 그의 행동을 보았는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왠지 섬뜩한 기운이 들어서 말입니다…….”

    한립도 달리 설명할 말이 없어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 일행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고, 근류도 무의식중에 동작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는 척하기는!”

    한립이 더는 아무 소리 하지 않자 근류가 망설이다 손을 뻗어 금제를 풀기 시작했다.

    팟.

    석문의 붉은빛이 사라지고 금색 무늬 같은 것도 반짝거리다 자취를 감추었다.

    “됐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근류가 힐끗 부 곡주 등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들 눈치를 보며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안 들어갈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부 곡주께서 모범을 보이시지요.”

    근류가 부 곡주를 콕 집어 말했다.

    그 말에 부 곡주가 미미하게 얼굴을 굳히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차갑게 미소를 지은 소안천이 근류의 만류에도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근류도 더는 다른 이들과 떠들지 않고 급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원래 위험 속에 기회가 있는 법, 가세나.”

    남은 이들이 자신만 쳐다보자 부 곡주가 고민하다 손뼉을 짝,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그를 따라 석문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어 긴장하고 있는데 다행히 아무런 이상 없이 검은 돌이 깔린 거대 광장에 도착했다.

    구름이 낮게 깔린 어두운 하늘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썩은 내와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한립은 먼저 들어온 이들이 아직도 이곳에 서서 그의 뒤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뒤를 돌아보니 백 장 높이에 다채로운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진 석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좌우로는 도끼를 든 채 서로를 마주 보는 금갑역사(金剛力士) 조각상이 서 있었다.

    “뭐 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복잡한 주술문자들이…….”

    소안천이 의문을 드러냈다.

    “36가지 주술문자를 사용해서 총 72가지 변화를 일으키는 천강지살(天罡地煞)을 연상케 하는 금제를 펼쳐 놓았군요. 강력한 봉인과 제압의 힘을 지닌 듯합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 근류가 말했다.

    “들어오는 문의 금제는 간단하더니 나가는 문은 이렇게 복잡하다니. 바깥에서 들어오는 이들을 가둬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이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부 곡주. 금제 석문이 못 나가게 막고 있는 건 우리가 아닌 것 같으니까요.”

    한립의 말에 부 곡주가 그의 시선을 따라 광장 멀리에 있는 건물을 보았지만 검은 안개가 짙게 끼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하, 어쩌다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이게 복이 될지 화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근류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높은 층으로 향할수록 의식을 억제하는 힘이 강해져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부 곡주가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우린 이미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은 처지예요. 돌아갈 수도 없는데 여기까지 온 것 끝까지 파헤쳐 봐야지요.”

    소안천이 의지를 다지고 걸어가니 근류가 그녀를 따라갔다.

    부 곡주 등이 심란한 얼굴로 뒤쪽의 석문을 돌아보고 있었다.

    “석문의 금제가 여느 대형 종문의 호법 대진 못지않습니다. 저라면 다른 출구를 찾아볼 겁니다.”

    한립이 그런 부 곡주의 곁을 스치면서 조언했다.

    그 말에 고민하던 부 곡주 등도 검은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면 갈수록 주위의 음산한 기운도 강해지고 검은 건물 앞에 이르러서는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금선 산수들이 숨을 쉴 때마다 하얀 김이 어렸다.

    검은색 건물은 뜻밖에도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사당이었다.

    담 주위로 풀이 수북하게 자라나 있는 것 이외에도 사당의 나무문에 이끼가 끼고 녹이 슨 문고리는 언제라도 떨어져 나갈 듯 기울어져 있었다.

    한립은 사당의 문밖에서 편액을 보고 중얼거렸다.

    “십팔층(十八層)…….”

    그 세 글자에 일행의 표정이 묘해졌다.

    “18층이라니요? 여긴 3층이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별것에 다 놀라십니다. 사당의 이름이 ‘십팔층’인지도 모르지요.”

    부 곡주가 놀라자 근류가 비웃었다.

    “귀기(鬼氣)가 가득한데 꼭 들어가 봐야겠습니까?”

    금선 산수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데, 그 순간 끼익하며 사당의 문이 스스로 양쪽으로 열렸다.

    문이 열리고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내부에서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에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데 근류가 소안천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함께 걸음을 옮겼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이상하게 여기며 그들을 따라갔고, 부 곡주 등 다른 이들도 근심 가득한 얼굴로 억지로 발을 뗐다.

    화르르…….

    문 뒤쪽에서 암울한 녹색의 귀화(鬼火) 두 덩이가 나타나 그들을 안내하듯 사당 안쪽으로 유유히 날아갔다.

    그들은 깜짝 놀랐지만 논의 끝에 귀화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갔다.

    안은 광장처럼 넓었지만 바닥은 평평하지 않았고 걸음을 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한립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깔린 게 돌이 아니라 절단한 뼛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일행은 사방을 경계하면서 나아갔지만 아무 일 없이 천왕전(天王殿)이라는 대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거목 크기의 천왕(天王) 조각상 두 개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조각상은 각각 양손에 한쪽 끝은 삼각뿔 모양이고 다른 쪽은 세 가지 표정의 불상 얼굴이 새겨진 ‘금강저(金剛杵)’와 피를 뚝뚝 흘리는 사람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범인들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천왕상과 달리 조각상의 표정은 마치 악귀처럼 흉측했다.

    천왕전을 지난 일행은 더 규모가 큰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 양쪽에 9개의 높은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흐릿한 신영들이 처참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

    미간을 좁힌 한립은 왼쪽의 제단 위에서 자줏빛 피부의 악귀가 검은 쇠 집게로 백발 노파의 입에서 천천히 혀를 뽑아내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노파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끅끅 흐느끼고 있었다.

    또 다른 제단에서는 곱게 생긴 여인이 헐벗은 몸으로 돌 침상에 위에 눕혀져 또 다른 자줏빛 악귀 두 마리에 의해 거대한 가위로 피부가 잘리고 있었다.

    대전을 가득 채운 처량한 울음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곳에 있는 모든 제단 위에서는 이런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다.

    거대한 맷돌로 머리만 남겨두고 몸을 으깨거나 커다란 솥에 기름을 끓여 겁에 질린 이들을 모아두고 한 명씩 던져 넣는 등 그 고문법이 잔인하고 다채로웠다.

    한립은 이곳이 ‘십팔층’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인계든 영계든 속세에서든 명계(冥界)에는 18층 연옥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다.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란 말입니까?”

    부 곡주가 가라앉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파파팟.

    그의 말소리에 광장 전방의 고공에서 십여 개의 그림자들이 표표히 내려왔다.

    선홍색 관복에 금색 허리띠를 맨 귀물들이었다.

    머리에 날카로운 뿔이 돋은 소, 기다란 지느러미가 달린 말, 길쭉한 원숭이 등 다양한 얼굴을 한 귀물들 속에 단정한 용모의 수염 없는 백면서생이 한 명 끼어 있었다.

    “너희들은 무엇이기에 여기서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냐!”

    근류가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흉악한 죄수 놈들, 십전염라(十殿焰羅)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하지 못할까!”

    그러나 백면 사내가 한 손을 허리에 짚고 손가락질을 하며 도리어 그들을 엄히 꾸짖었다.

    가느다란 목소리와 부드러운 동작이 꼭 내시 같아 보였다.

    “겨우 귀장(鬼將)에 불과한 귀물들이 스스로를 염라라 칭해? 가소롭구나.”

    그 말을 들은 소안천이 냉소했다.

    “18층 연옥에 떨어진 너희에게 무기형을 선고하고 다시는 윤회에 들지 못하게 할 것이다!”

    백면귀장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나머지 귀물 아홉이 선홍색 관복을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불고 악귀들을 품은 검은 안개가 몰려들었다.

    악귀의 수가 너무 많아 일행을 향해 달려들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부딪쳐 밟고 밝히며 끔찍한 귀곡성을 터트렸다.

    “어, 어떻게 저리 많은 귀물이…….”

    부 곡주가 인상을 구겼다.

    “그래봤자 평범한 귀물들일 뿐입니다. 다들 당황하지 마시고 진법을 펼칠 분들은 그렇게 하고 아니면 각자 신통을 써서 깨끗하게 처리해 주세요. 저기 귀장들은 우리 천수종에서 상대하겠습니다.”

    근류가 태연한 얼굴로 낭랑하게 외쳤다.

    그의 손에서 여덟 개의 보탑들이 떠올라 은색 빛을 뿜고 있었다.

    “공간 선기……. 희귀한 물건이기는 하나 품계가 높지는 않구나.”

    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명한 공간 파동을 본 한립이 홀로 중얼거렸다.

    반짝이는 보탑에서 십여 명의 신형들이 빠져나와 천수종 복장의 장로들로 변했다.

    가장 수행이 높은 이가 태을경 초기였고, 나머지는 금선 후기 아니면 금선 최고봉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노구 장로, 귀장들이 많아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근류가 그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알겠습니다, 사신탑(舍身塔)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 이런 때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얀 장로가 손을 저었다.

    부 곡주 등도 그들을 보고 마음이 진정이 되었는지 각자 법보 등을 꺼내 적과 싸울 준비를 했다.

    시선을 마주친 근류와 소안천은 십여 명의 천수종 장로들을 데리고 스스로 십전염라라 칭한 홍포 귀장들을 향해 솟구쳤다.

    “귀물들의 수행이 높지는 않지만 그 수가 많아 개별적으로 싸움을 하면 우리가 먼저 지칠 것이네. 다 같이 청룡혼원진(靑龍混元陣)을 펼치면 천수종이 귀장들을 제압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천수종 무리가 떠나고 부 곡주가 입을 열었다.

    “청룡혼원진은 천수곡의 진법이라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함께 진법을 펼친단 말입니까?”

    금선 산수 하나가 난색을 표했다.

    “이 진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추를 담당할 보물일세. 진법을 유지하는 방법은 간단하니 금방 익힐 수 있을 것이야.”

    부 곡주는 전음으로 간단히 진법을 펼치는 방법을 전수해주고, 용 모양의 옥 조각을 던져 올렸다.

    “지금이네!”

    그의 말에 나머지 수사들은 동그랗게 모여 동시에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립은 그들 옆에 붙어 있기만 할 뿐, 진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저 자식!’

    귀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어 그에게 따질 틈은 없었지만 다들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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