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7화. 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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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에 펑, 하는 소리가 들리고 진득한 피 구름이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골짜기 안의 화세형충들이 혼란스럽게 움직이며 세월 화염을 뿜어 피구름을 제거했을 때, 그 안에서 곱사등이 노인이 나타나 기이한 푸른빛을 두르고 번개처럼 달아났다.
삐삐비빅!
골짜기 안 곤충 떼의 10분의 1이나 되는 화세형충들이 그를 쫓아 날아갔다.
산 뒤에 숨어 있던 소안천이 상황을 지켜보다 밝은 얼굴로 나머지 사람들을 향해 눈짓했다.
묵향루 루주가 말없이 다음으로 나서서 기운을 숨기고 골짜기의 다른 쪽으로 접근했다.
곱사등이 노인 때와 마찬가지로 혈운주가 화세형충들의 주의를 끌었을 때 그녀가 나타나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쫓는 화세형충의 수가 곱사등이 노인 때와 엇비슷했다.
“어서! 다음!”
소안천이 재촉했다.
다섯 사람이 연달아 화세형충들을 유인해 내야 했고, 시간을 끌었다가는 앞서 떠난 곤충 떼가 돌아오고 말 터였다.
“행운을 빕니다!”
금선 산수가 하얀빛으로 변해 산골짜기로 접근했고 혈운주가 펑, 터졌다. 나머지 두 사람도 똑같은 방식으로 곤충 일부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제 골짜기에 남은 화세형충의 수는 절반 정도였다.
“이제 우리가 갈 차례입니다!”
소안천은 황토색 깃발을 발동해 노란 안개로 십여 명을 감싸고 땅속으로 파고든 채 골짜기로 접근했다.
그들은 산골짜기 앞에서 멈추었다.
골짜기 바닥에도 화세형충 소굴이 있어 더 접근하기가 불가능했다.
“남아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여기서부터는 각자의 실력으로 가야 할 겁니다.”
소안천은 노란 깃발을 거두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얼른 각자의 신통을 발휘했다.
이제는 천수종에 의지할 생각을 버린 것이다.
“다들 원하는 바를 얻기를 바라겠습니다!”
소안천을 비롯한 천수종 3명이 주문을 외워 몸에서 남색빛을 반짝이며 지면 위로 솟아올라 골짜기 내부로 쇄도했다.
푸른 부적을 몸에 붙인 청수곡 곡주는 수많은 주술문자에 둘러싸여 반투명하게 변한 채 천수종 사람들 뒤를 바짝 쫓아갔다.
구레나룻 거한은 두꺼운 돌 갑옷을 불러내 몸을 감싸고 생명력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돌 조각상으로 변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머지 금선 산수들은 진작 무리를 이루었는지 둥그렇게 모여 섰다.
웅!
금발 청년이 불러낸 금색 목패가 집채만 하게 변해 표면에 조각된 짐승 머리 도안에서 시간법칙 파동을 함유한 밝은 금빛을 퍼트렸다.
여덟 명의 산수들이 한 손을 목패에 대고 금빛 속에 은신한 채 골짜기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보양신목(寶陽神木)!”
보양신목은 양생수와 같이 시간법칙의 힘을 지닌 신목으로 무척 진귀한 보물이었는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한립도 주춤거리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금빛 그림자로 변해 산수 무리를 따라갔다.
다들 은신술을 펼쳐 기운은 숨겼더라도 골짜기의 화세형충이 너무 많다 보니 몇 마리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둔광이나 보물의 보호막에 충돌한 화세형충들은 삑삑 경고음을 냈고, 그 즉시 벌레들이 비처럼 떨어져 몰려들었다.
화세형충들은 어떤 비술을 펼쳤던 단단하게 그들을 붙들고 암홍색 구슬처럼 에워싼 뒤 세월화염을 분사했다.
금색 그림자로 변한 한립도 세월화염의 빗속에서 보호막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보았다.
파치치칙!
그의 두 손에서 방대한 금색 뇌전이 흘러나와 두꺼운 뇌전 그물을 이루고 강렬한 뇌전 법칙을 발산했다.
그러나 화세형충의 세월화염에는 뇌전 법칙도 별 소용이 없는지 그물은 급속도로 얇아졌다.
콰릉!
얼굴을 굳힌 한립은 두 손을 펼쳐 손바닥에서 굵직한 뇌전을 방출해 뇌전 그물을 원래 굵기로 돌려놓았다.
그물이 얇아질 때마다 계속해서 뇌전을 방출하면서 몰래몰래 시간법칙을 섞자 세월화염의 침식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린 한립은 화세형충들을 완전히 떨쳐내지 않고 골짜기 깊은 곳으로 날아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같이 몰려든 곤충들을 구슬처럼 두르고 검은 동굴로 향하고 있었는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화세형충이 달라붙어 구슬은 커지고 속도는 크게 줄었다.
다들 각자의 방어 신통을 발휘해 세월화염에 저항하느라 선령력 소모가 극심했다.
파칙!
낮게 기합을 넣은 한립은 금빛 뇌전을 일으켜 네 마리의 눈부신 금룡을 만들었다.
그리 크지 않아도 엄청난 양의 뇌전 법칙을 품고 있어 닿는 곳마다 허공이 갈라졌고, 이전 공격과 마찬가지로 미세하게 시간법칙의 힘이 녹아 있었다.
쾅!
뇌전 금룡 네 마리가 주변의 곤충 구슬을 깬 순간, 쉭 하고 한립이 튀어 나가 검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 벽의 구멍에서도 화세형충들이 나와 달려들기는 했지만, 바깥보다는 적어 금색 뇌전 그물로 막아낼 만했다.
<만규공적술>을 펼치며 시간법칙으로 기운을 차단한 그에게 가장 적은 화세형충이 들러붙었기에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홀로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쪽을 쳐다보며 기다렸다.
천수종 세 사람이 극한(劇寒)의 기운으로 곤충 구슬을 얼려 깨버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놀라운 한기와 법칙 파동이 화세형충 표면의 세월화염마저 얼렸지만 곤충들은 죽지 않고 그 안에서 꿈틀거렸다.
시간이 걸릴 테지만 언젠가는 세월화염으로 얼음을 녹이고 빠져나올 것이다.
“석 수사가 어떻게…….”
소안천은 한립이 먼저 와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고, 근류와 온화하게 생긴 청년도 놀란 듯했다.
동굴 안에 머물던 화세형충들이 그들의 기운을 감지하고 몰려들어 한립에게 오래 관심을 두지는 못했다.
쾅!
그들이 각자 방어수단을 펼쳤을 때 동굴을 백여 장 앞둔 곳에서 곤충 구슬이 터지며 청룡(靑龍)을 닮은 바람기둥이 불어 나와 다른 화세형충의 접근을 막았다.
검은 동굴로 날아든 푸른 바람기둥에서 부 곡주가 빠져나왔을 때 또 다른 곤충 구슬이 갈라져 눈부신 금빛으로 변했다.
더없이 빠른 속도로 동굴 안으로 들어선 금빛 속에는 8명의 금선이 들어 있었다.
수행이 낮은 만큼 대량의 선령력 소모에 다들 낯빛이 창백했다.
쩌저적!
그들까지 도착하고 남색빛이 반짝거리면서 두꺼운 얼음이 응결해 동굴 입구를 막아버렸다.
손을 거둔 소안천은 엄청난 한기의 법칙 파동을 발산하는 남색 얼음 구슬을 들고 있었다.
쿠쿠쿵.
바깥의 화세형충들이 그들이 동굴로 들어간 것을 보고 분노해 날카롭게 울어대며 세월화염을 분사했고, 또 다른 화세형충들은 붉은 빛줄기로 변해 남색 얼음에 몸통 박치기를 해왔다.
남색 얼음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빠르게 녹아 깨지려 했다.
그걸 본 소안천은 이를 악물고 수결을 맺었다.
그녀 머리 위로 떠 오른 구슬이 얼음장벽으로 흡수되어 균열을 채우고 얼음의 두께를 열 배로 만들었지만 세월화염의 침식에 계속 녹고 있었다.
이에 소안천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난감해하고 있을 때 누군가 앞으로 나서서 남색 얼음벽에 손을 얹었다.
요란한 금빛이 손바닥에서 흘러나와 남색 얼음벽으로 흘러들었다.
얼음벽 표면에 금빛 광채가 떠오른 뒤로 세월화염의 침식 속도가 급감했다.
“시간법칙!”
소안천이 놀라 한립을 보았고, 다른 이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냈다.
한립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심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실력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화세형충을 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간법칙의 힘을 쓰고 말았다.
그때, 바닥에서 노란빛이 반짝이고 구레나룻 사내가 땅을 뚫고 나왔다.
돌 갑옷에 수많은 구멍이 뚫리기는 했으나 숨을 헐떡일 뿐 상처를 입지는 않은 듯했다.
“저와 석 수사가 설치한 얼음벽도 화세형충을 오래 막아주지는 못할 거예요. 어서 안쪽으로 들어가 보시죠!”
소안천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 한립을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다른 이들도 서둘러 그녀를 쫓았다.
한립은 맨 뒤에서 바깥을 살피며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화세형충들이 저리 조급해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저 영충들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 없다 보니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동굴 안에는 금제의 힘이 가득해서 의식을 제약했고, 빛이 들지 않아 맨눈으로도 멀리까지 볼 수 없었다.
곤충 대군이 쫓아올 것을 알았기에 일행은 한마디 말도 없이 걸음을 서둘렀지만 주위에서 소규모로 달려드는 동굴 안 화세형충을 상대하느라 그리 빨리 이동하지는 못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벽에 뚫린 구멍이 적어지고 화세형충도 줄어 여유가 생겼다.
그들은 앞으로 곧장 들어가 거대한 동굴 앞에 도착했는데, 화세형충들이 그 앞에서 돌연 멈추더니 배회할 뿐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한립은 상황에 나아지자 안도하는 일행들 사이로 빠르게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동굴은 면적이 수천 장에 이르는 적홍색 용암 호수가 출렁이고 있어 공간 전체가 붉은빛으로 가득했다.
용암 호수 위로 붉은 대가 놓여 있고, 그 끝으로 또 다른 어둑한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동굴의 나머지 절반은 빈 공터로 뾰족뾰족 붉은 돌기둥들이 마치 석순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일행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돌기둥으로 모여들었다.
가장 큰 돌기둥 3개 위에 커다란 암홍색 벌집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 반짝반짝 시간법칙 파동이 느껴진 것이다.
용암 호수는 그 세 줄기 시간법칙의 힘으로 출렁이고, 동굴 내부는 웅웅 진동했다.
멀리서 세 개의 벌집을 본 한립은 동공을 수축했다.
그의 추측이 확실하다면 바깥의 화세형충들은 저 벌집 안에서 태어났을 것이고, 이곳에 모종의 규칙이 있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곳은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여도 반드시 그에 걸맞은 장치가 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한립이 벌집을 살피는 동안 소안천, 근류 등은 욕심이 나면서도 경거망동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탐욕에 눈이 먼 이들은 어딜 가나 있었고, 세 번의 파공음과 함께 세 사람이 몸을 날려 벌집으로 달려들었다.
회색 머리카락의 청년, 검은 장포를 입은 부인 그리고 구레나룻 거한이었다.
“노 형, 제 수사, 경솔한 짓 마세요!”
산수 무리에서 금발 청년이 소리쳐 말렸지만 이미 몸을 날린 뒤였다.
청년과 흑포 부인이 벌집을 향해 각자 빛을 뿜고 구레나룻 거한은 다른 벌집과 거리를 두고 멈춰서서 쿵! 하고 발로 땅을 굴렀다.
마지막 벌집 옆에 노란빛이 번지며 붉은 암석이 뭉쳐 석인(石人)으로 변해 손을 뻗었다.
예상외로 세 벌집 모두 아무런 문제 없이 들어 올려졌다.
이에 구레나룻 거한 등이 기뻐하며 벌집을 거두려 할 때 이변이 발생했다!
휘잉.
벌집에 붉은빛이 어린 후 동굴 안에 자욱하게 퍼져 있던 시간법칙이 맹렬하게 수축해 벌집들을 중심으로 수십 장 범위에 암홍색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방어수단을 준비하고 있던 세 사람은 그 안에서 움직임이 열 배 이상 느려졌다.
바깥에서 볼 때는 그들이 여유롭게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팟!
그때 동굴 지붕에 빛이 나타나더니 맷돌 크기의 형상을 이루었다.
한립은 흠칫 놀랐고 소안천 등도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맷돌 크기의 거대 화세형충이 바깥의 곤충들과는 달리 껍데기에 불꽃무늬를 두르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천지와 하나가 된 듯했다.
한립을 포함한 그 누구도 거대 화세형충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미리 감지하지 못했다.
거대 화세형충은 입을 벌려 세 줄기 적홍색 불빛을 뿜었다.
잔영을 남기며 불가사의한 속도로 날아간 불빛에 회색 머리 청년과 흑포 부인은 뭘 어떻게 할 틈도 없이 구멍이 뚫려 화륵, 불타올랐다.
두 사람의 몸이 그들의 눈앞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구레나룻 거한은 그들보다 수행이 강했기에 노란빛으로 반 장 규모의 소형 영역을 만들고 시간법칙의 힘에서 벗어나려 슬금슬금 이동하다가 적홍색 불빛을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왼팔이 뚫렸다.
거한은 적홍색 화염이 왼팔에서 시작해 몸으로 퍼져나가자 기겁해 다른 손으로 팔을 잘라내려 했지만 시간의 힘 때문에 속도가 너무 느렸다.
서걱!
위기의 순간 금색 검 그림자가 날아들어 그의 왼팔을 깔끔하게 잘라주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왼팔이 적홍색 화염에 잠식되어 재가 되었을 때, 수백 장 밖에서 한립이 손을 거두고 있었다.
훅! 숨을 내쉰 구레나룻 거한은 노란빛을 일으켜 재빨리 벌집의 빛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감사의 뜻으로 한립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노란색과 붉은색이 섞인 단약을 삼켰다.
찰나의 순간 그의 어깨에 새살이 돋아 새로운 팔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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