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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46화 (1,803/2,000)
  • 2046화. 제 갈 길을 가다

    *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를 해봅시다. 계속 가볼 생각입니까?”

    등이 굽은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어디 작은 종문의 장문인으로 태을경 초기 수행을 지닌 수사였다.

    연달아 고난이 겹치면서 일행 중에 태을경 수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천수종 태을경 수사 네 명 중 한 명도 한립과 같이 선발대에 속해 금색 대문으로 들어갔다가 화를 입었고, 나머지는 청수곡 곡주, 묵향루 루주, 곱사등이 노인 그리고 구레나룻 거한까지 총 일곱이었다.

    “세월탑 안은 황량하기 짝이 없어 오는 내내 보물은 구경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갖은 난관 때문에 대량의 사상자가 나오고 고작 여기 모인 사람들만 남았는데 계속 나아가는 건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안영이란 이름의 분홍색 치마를 입은 묵향루 루주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안 수사와 파 수사의 말씀은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자는 것입니까?”

    소안천이 묵향루 루주와 곱사등이 노인을 보고 물었다.

    “아무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니라 금속수와 화세형충 대군에 많은 수사가 절명했습니다. 세월탑은 너무 위험해요. 우리의 전력으로 계속 가는 것은 무립니다.”

    곱사등이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태세선존의 동부인데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분명 무언가가 남겨져 있을 겁니다. 화세형충은 이미 그 특성을 파악했고 그것들보다 우리가 빠르니 포위만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면 될 거예요. 게다가 어렵사리 세월탑 안에 들어와 그냥 돌아갔다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으십니까?”

    근류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사기가 떨어져 있는데 묵향루 루주와 곱사등이 노인이 빠지면 무리가 흩어지고 말 터였다.

    근류의 말도 일리가 있어 묵향루 루주와 곱사등이 노인이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다.

    “다시 화세형충을 마주치면 제 지시를 따라주세요. 추적을 피할 방법이 있을 것도 같으니까요.”

    소안천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렇다면 더 가봅시다. 어떻게 할지는 앞에 뭐가 있는지 보고 결정하죠.”

    안영은 곱사등이 노인과 시선을 교환하고 이렇게 말했다.

    “허허, 원래 기연조화는 위험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봉쇄되어 있던 탑 안에 분명 대단한 뭔가가 있을 거예요.”

    그제야 근류가 웃음 지었다.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한립은 다들 돌아간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가볼 계획이었던 지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또 맨 뒤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그의 이런 행동에 익숙해진 수사들은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면서 속으로는 이 안에서 무엇을 찾든 그의 몫은 점점 줄어들 거라고 다짐했다.

    이전의 경험을 교훈 삼아 일행은 더욱 조심하면서 느리게 움직였다.

    그렇게 반 시진을 채 못가 무리의 끝에서 눈을 번득인 한립이 오른쪽 전방을 힐끔 보고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그때 맨 앞에서 날아가던 소안천이 우뚝 멈춰 섰다.

    “화세형충이에요. 저를 따라오세요!”

    여인은 몸을 돌려 좌측 전장으로 날아갔고, 한립은 소안천이 이렇게 빨리 화세형충을 알아차린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의식의 힘이 그와 비교해도 얼마 떨어지지 않는단 의미였다.

    화세형충이라는 말에 급히 육신의 기운을 감춘 무리가 그녀를 따라 작은 산 뒤로 몸을 숨겼다.

    소안천은 황토색 깃발을 불러내 누런 안개를 만들어 모두를 가려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기의 기운마저 사라졌다.

    그들이 숨은 다음 콰콰콰 소리가 나며 대량의 벌레 떼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날아드는 붉은 구름의 양은 이전보다 더 많았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숨어 있던 일행은 소안천의 강력한 선기 덕분에 벌레 떼에 들키지 않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붉은 구름이 멀어지고 다시 이동하기 시작한 무리 속에서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이전 화세형충들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순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몇 번이나 화세형충 떼를 마주쳤지만, 다행히 미리 발견해 안전하게 숨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시진을 날아가자 눈앞의 지형이 붉은 산맥으로 변하고, 적잖은 활화산들이 분포한 산들이 나타났다.

    화산 분출구에서 쿠쿵!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용암 기둥이 분출되었고, 그 위로 떠오른 불구름에서 자극적인 유황 냄새가 풍겼다.

    불 속성 원기가 물씬 강해진 것을 느낀 무리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금염성석(金焰星石)!”

    금선 산수 하나가 화산 분출구 중 하나로 다가가 빛의 손으로 금색 돌멩이를 끌어당겼다.

    “현염영옥(玄炎靈玉)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붉은 옥돌을 찾아내고 있었다.

    “저건 용염초(龍焱草)!”

    “천화정(天火晶)!”

    화산 지역에 진귀한 불 속성 재료가 깔려 있어 수사들은 앞다투어 재료를 챙겼다.

    한립은 눈에 차지도 않았지만 몇 개를 따라 주워들었다.

    소란이 가시고 그나마 쓸만한 물건을 거둔 무리는 탑에 대한 믿음이 생겼는지 소안천을 따라 더 깊은 화산지대로 들어갔다.

    “다들 조심하세요! 화세형충이에요.”

    소안천의 경고에 이제 일행은 당황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그녀 주위로 몰려가 몸을 숨겼다.

    얼마 후 이전에 보았던 곤충 떼보다 열 배 이상은 되는 거대한 붉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

    눈을 크게 뜬 수사들은 소안천의 선기 속에 몸을 감추고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벌레 떼는 갑자기 그들 위쪽에서 이동을 멈추더니 주변을 배회했다.

    노란 안개 속에서 그걸 보던 이들은 너무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한립조차 인상을 찡그렸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벌레 떼가 몇 개의 무리로 갈라져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들을 지나 용암 기둥을 만난 화세형충들은 즐겁게 삑삑 울어대다 먼 곳으로 사라졌다.

    “화세형충의 근거지가 화산구역 안쪽에 있나 봅니다. 세월화염이 시간법칙을 함유하고 있기는 해도 불속성 영충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니 이런 기후를 좋아하는 것이겠지요.”

    근류가 대규모 벌레 떼가 온 방향을 보고 생각한 바를 알려주었다.

    “가보죠.”

    소안천이 먼저 앞으로 나서고 다른 이들이 뒤이어 따라나섰다.

    눈살을 찌푸린 묵향루 루주도 일단은 그들과 같이 이동했다.

    반 시진 뒤, 구름에 산 정상이 가려진 두 개의 거대한 산봉우리와 그 사이의 골짜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골짜기에는 여러 화세형충 떼가 노닐고 있어 하늘빛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 보았던 화세형충 떼보다 훨씬 무지막지한 규모였고, 두 산봉우리의 암벽에 빽빽하게 뚫린 작은 구멍들로 벌레들이 드나들었다.

    산골짜기 깊은 곳에는 검은 동굴도 하나 보였는데 어두워서가 아니라 금제 비슷한 특수한 기운이 들어차 있어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강렬한 시간법칙과 공간 파동이 느껴졌다.

    “동굴 안에 시간법칙의 힘을 지닌 보물들이 있는 것 같네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보람이 있겠어요. 공간 파동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3층으로 통하는 공간의 문도 저기 있을 테고요.”

    일행을 이끌고 근처의 작은 산 뒤쪽에 숨은 소안천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산골짜기를 보는 한립의 마음도 들썩이고 있었다. 수행은 높아졌지만 시간법칙의 수정실은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전에 기마자와의 싸움에서 그렇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시간의 힘을 함유한 보물을 얻어 연화시킬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묵향루 루주 등은 경악스러운 화세형충의 수를 보고 이미 마음이 돌아선 지 오래였다.

    “제게 화세형충을 상대할 방법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를 눈치채고 소안천이 먼저 말했다.

    “……능력만큼 담도 크시네요. 하지만 묵향루 같은 작은 문파가 도전하기에는 너무 벅찬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 선자, 근 수사, 저희 묵향루는 더이상 함께 하지 못함을 이해해 주세요.”

    침묵하던 묵향루 루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화산구역에 귀한 재료가 많았으니 그곳이나 돌아가서 살필 생각이었다. 저 안에 시간법칙을 지닌 재료가 훨씬 귀하더라도 목숨이 더 중요했다.

    그 말에 소안천과 근류가 얼굴이 굳어 계속 설득하려 했다.

    “저도 그만 가보렵니다. 남은 분들이 뜻을 이룰 수 있게 기원하겠습니다.”

    곱사등이 노인이 소안천 등에게 공수를 하고는 묵향루 루주 옆으로 가서 섰다.

    일행 중 이십여 명이 빠져나와 그들 뒤로 갔다.

    이제 제자리에 남아 있는 이들은 천수종 세 명, 한립, 청수곡 곡주, 구레나룻 거한 그리고 여덟 명의 금선 산수들이 다였다.

    “허허허! 다들 바깥에서는 한 자리씩 하는 분들이 이리 몸을 아끼십니까?”

    난색을 표한 근류가 냉소를 흘렸다.

    묵향루 루주 등은 그의 말에 반박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는 떠나려 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립은 그들이 나름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세형충의 수가 워낙 많아 뚫고 들어가려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텐데, 그처럼 시간법칙을 익히거나 확실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옳았다.

    “잠시만요.”

    남색 빛이 그들 앞을 막아서고 소안천이 말을 꺼냈다.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까?”

    묵향루 루주가 얼굴을 굳혔고 다른 이들도 불쾌한 내색을 했다.

    “오해는 마세요, 떠나고 남는 것은 각자가 선택할 문제지요. 그저 떠나시기 전에 도움을 구할 일이 있습니다.”

    소안천은 담담히 하려던 말을 했다.

    “말해 보세요.”

    “화세형충의 수가 너무 많아 동굴로 들어가기 곤란해서요. 여러분이 떠나실 때 일부를 유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더러 화세형충을 유인해 달라고요?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곱사등이 노인이 끼어들었다.

    “제가 드리는 천환영부(天幻靈符)를 쓰면 한동안 속도를 훨씬 높일 수 있고 기운을 감추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소안천은 강렬한 바람 속성 법칙 파동을 발산하는 푸른 부적 다섯 개를 불러냈다.

    곱사등이 노인은 흰 눈썹을 끌어올리고 계속하라는 듯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부탁을 드리는데 당연히 그 대가가 있어야겠지요? 제가 그간 모아온 선기들입니다. 도와주실 분들은 하나씩 택해 가져가세요.”

    소안천이 손을 휘저어 여섯 개의 발우, 옥자 등 선기를 불러냈다. 전부 진한 물 속성 법칙의 힘을 발산하는 품계가 있는 선기들이었다.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남색 발우와 천환영부를 불러들인 곱사등이 노인이 얼굴을 싹 바꾸고 말했다.

    묵향루 루주 등도 보물을 보고 구미가 당기는 눈치였다.

    “혈운주(血雲珠)입니다. 이걸 폭파해 대량의 피구름을 만든 다음 화세형충들을 유인하면 됩니다. 차례로 5개를 폭파하면 골짜기 내의 화세형충 대부분을 끌어낼 수 있을 듯하니 다섯 분만 도움을 주세요.”

    소안천은 달걀 크기의 핏빛 구슬 5개를 꺼내 보여주었다.

    한립은 그걸 보고 눈을 반짝였다.

    기혈의 기운이 충만한 구슬 안에서 약간이지만 피의 법칙이 느껴졌다. 혈뢰(血雷)와 비슷한 물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계획을 잘 짜두셨군요! 혈운주면 화세형충의 시선을 끌기에 적당하겠습니다. 제게 맡겨 주세요.”

    이전의 냉담한 태도와 달리 보물을 하나 쥐여주니 곱사등이 노인은 그렇게 열성적일 수 없었다.

    침음하던 묵향루 루주가 조용히 혈운주, 선기 그리고 천환영부 하나씩을 챙겼고 둔술에 자신 있는 금선 산수 셋이 나서서 물품을 받아 갔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먼저 떠나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섯 분만 믿고 있겠습니다.”

    소안천은 그들이 충분히 멀리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곱사등이 노인 등 다섯 명에게 말했다.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제가 먼저 가지요.”

    곱사등이 노인이 훌쩍 날아올라 산골짜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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