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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44화 (1,801/2,000)
  • 2044화. 봉인

    *

    정염불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솟구치자 이미 밀리기 시작한 현빙참원검의 남색 빛이 약해지고 다시 원형 주술문자로 변해 사라졌다.

    퍼퍼퍼펑!

    정염불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많은 은색 불덩이들을 날려 남 씨 오누이가 융합한 영역을 강타했다.

    영역이 불안정하게 흔들거리며 금이 가고 있었다.

    챙강!

    오래지 않아 똑같이 얼음 조각상들도 균열이 가더니 촤르륵 무너져 내렸다.

    이어서 남영도 사라졌는데 남 씨 오누이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얼음 봉인에서 벗어난 한립은 여전히 몸이 으슬으슬하고 사지가 뻣뻣했는데, 그가 손을 뻗자 정염불새가 어깨로 날아들어 몸을 녹여 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금속수들은 온데간데없고, 함께 들어온 선발대는 전멸해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조 부각주는 금속수에게 찢겨나가 있었고 우활해도 한기를 피하지 못하고 금색 돌기둥 아래에서 얼어 죽어 있었다.

    정염불새를 체내로 불러들인 한립은 굳은 얼굴로 공간 안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천정에서 보낸 남 씨 오누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반드시 제거해서 행적이 알려지지 않게 해야 했다.

    * * *

    석문 바깥의 수사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안에서 기척이 없자 석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만 기다리고 우리도 들어갑시다.”

    근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발을 떼지 않았다.

    안에서 전해진 기운이 너무 강해 무서웠기 때문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선발대는 이미 난관을 통과해 멀리 갔을지 모르는데 어서 쫓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예요.”

    근류가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고 소안천과 먼저 석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눈치를 살피던 이들이 따라갔다.

    강렬한 금속역장을 느낀 수사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더 섬뜩한 것은 곳곳에 남겨진 엉망이 된 시체와 전투 흔적이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부 곡주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리다 휙 고개를 돌려 지나던 금색 돌기둥 위를 보았다.

    크앙!

    이리를 닮은 금속수가 뛰어내려 그를 덮치고 있었다. 각처에서 금속수들이 나타나 다시 참혹한 살육이 반복되었다.

    이때 한립은 또 다른 석문 앞에 서 있었다.

    반쯤 열린 것으로 보아 남 씨 형제는 이미 달아난 듯했다.

    의식으로 주위를 살피던 그가 번득 석문 앞으로 들어서니 별다른 장식 없이 대청 끝에 구불구불 위로 향한 검은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본 한립은 그 끝에 암홍색 빛의 문을 보고 멈춰 섰다.

    공간전송문으로 보이는데 어디로 연결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의식으로 조사를 해보려 해도 투과가 되지 않자 그는 잠시 고민하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앞이 확 밝아졌다가 붉은 세계가 펼쳐졌다.

    1층과 달리 탁 트인 공간은 암홍색 하늘에 붉은 구름이 뜬 끝없이 펼쳐진 새빨간 사막이었다.

    그의 뒤로 거대한 석문이 우뚝 솟아 검은빛의 장막을 반짝이고 있었고, 그 옆에 ‘이(二)’라고 크게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무의식중에 의식을 퍼트려 보니 약간의 제약이 있었지만 1층보다는 훨씬 멀리까지 탐색이 가능했다.

    희미하게 남은 남원자와 남안의 기운으로 볼 때 멀리 달아난 것 같았다.

    한립은 즉시 금색 둔광으로 변해 그들을 쫓았다.

    “흠?”

    둔광을 일으키자 시간 파동을 내뿜는 특수한 금제의 힘이 느껴져 평소 속도의 절반밖에 낼 수 없었다.

    “시간영역과 비슷하긴 한데, 내 영역은 의식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텐데.”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묵묵히 역전진륜 신통을 발휘해 보았다.

    시간법칙과 연관된 금제라면 이게 통할 터였다.

    쉭!

    과연 역전진륜을 쓰자 금색 둔광이 원래 속도를 회복했고, 금방 남원자와 남안이 그의 의식 범위에 포착되었다.

    제 실력보다 배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들이 한립의 금색 둔광에 따라잡히는 것은 당연했다.

    “한립이 쫓아온다!”

    “오라버니!”

    남원자가 그걸 감지하고 놀라자 남안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두 손을 마주 잡은 그들은 주문을 외워 체내의 법칙의 힘을 융합했다. 연결된 둔광이 거대한 남색 거대 새 형상을 갖추더니 날개를 펄럭이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비술을 펼쳤건만 그래도 한립보다는 느려 거리가 십여 리 정도로 가까워졌다.

    “어떻게요, 너무 빨라요!”

    남안이 뒤를 돌아보며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가거라!”

    결연한 표정의 남원자가 손을 놓고 그녀를 멀리 밀어 버린 다음 한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오라버니!”

    “어리석은 것! 이렇게 우리가 오랜 세월 쌓은 수행을 날릴 셈이냐?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거라. 다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있어 남은 것이니!”

    남안이 당장 그를 따라가려는데 남원자가 전음으로 화를 냈다.

    남색 용 모양의 수가 놓인 하얀 깃발과 남색 화염이 담긴 발우를 꺼낸 그는 그것들을 맹렬히 집어 던졌다.

    콰하하!

    깃발에서 남색과 하얀색 줄무늬를 지닌 교룡이 빠져나와 한립을 향해 하얀 얼음 조각들을 분출했다.

    무엇이든 얼음 조각에 휘말리면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품고 있는 파괴력이 대단했다.

    빙글 돈 발우에서는 남색 빙염(氷焰)이 펼쳐져 한립을 에워싸고 공간을 얼렸다.

    얼음 숨결과 빙염이 하늘의 절반을 가로막아 건조하고 뜨겁던 사막 기후를 삽시간에 바꿔놓았다.

    그걸 본 남안은 눈물이 차올랐고 입술을 덜덜 떨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한립은 미친 듯이 쏟아지는 숨결과 빙염을 보고는 멈춰 손을 저었다.

    소매를 빠져나간 녹색 빛이 둘로 나뉘어 비취색 거대 손들로 변해 각각 교룡의 숨결과 남색 빙염으로 파고들었다.

    숨결과 빙염이 그를 열 장 앞두고 맥없이 흩어져 사라지고, 비취색 거대 손이 하얀 깃발과 남색 발우를 찾아 돌아왔다.

    그 사이 남원자도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이 수결을 맺어 선기들을 품은 비취색 거대 손을 소매 속으로 불러들이고 아직 의식으로 감지할 수 있는 남안을 쫓아가려 했다.

    콰르릉!

    그때 부들부들 떨린 전방 허공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갈라진 틈으로 남색 빛이 쏟아져 나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휩쓸고 가려 했다.

    이에 한립은 둔광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면서 금빛을 일으켰다.

    웅웅!

    그가 대책을 마련하기도 전 남색 빛이 한곳으로 모여들어 거대한 구슬을 이루고 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주변 공간이 남색 파동에 압축되어 그를 억누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 압력에 익숙해진 한립은 눈동자에 보랏빛을 번득이고 수결을 맺었다.

    미간에서 수정 사슬이 빠져나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전방의 모처로 날아갔다.

    촤릉!

    사슬이 돌돌 감아 허공에서 끄집어낸 것은 남원자였다.

    요란한 남색 빛으로 몸을 감싼 그는 마치 남색 불길 속에 있는 듯한 강대한 법칙 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남원자는 체내의 법칙의 힘을 불사르는 비술을 써서 느닷없이 폭발적인 힘을 내고 있었다.

    한립은 곧장 수결을 맺어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수많은 금빛 파문이 퍼져 반경 천장을 둘러싸 주변의 남색 빛구슬을 정지시키자, 막 의식 사슬에서 벗어나 달아나려던 남원자도 금빛 파문 속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가볍게 남색 빛구슬에서 빠져나온 한립은 남원자의 머리를 붙들고 터트리려다 멈칫했다.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도 오직 남안이 달아난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는 남원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어린 누이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남원자의 단전으로 손을 옮겨 오행술식을 닮은 별 문양을 응결해 봉인했다.

    <대오행환세결>의 봉인 비술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쓸 수 있었다.

    그는 남원자의 저물반지를 거두고 진언보륜을 거두었다.

    그러자 남색빛의 법칙의 힘이 흩어진 남원자는 선령력조차 끌어올리지 못하고 추락하려 했다.

    이에 한립은 그런 남원자를 잡아다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와서 이미 그의 의식 범위를 벗어난 남안을 쫓는다고 해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고, 그녀가 달아난 방향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쫓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강력한 봉인술이군요. 금원선궁의 추격을 여러 번 따돌릴만한 수준입니다. 승복하죠.”

    남원자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십니까.”

    “제가 죽고 살고는 어차피 수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와 제가 울든 웃든 수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테고요. 그럴 바에야 생을 즐겁게 마감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요.”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듯하니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추혼술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솔직히 답하세요.”

    한립은 남원자의 그런 태도에 호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냉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어떤 질문인지 해보시지요.”

    남원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당신의 누이가 금원선역에 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날 잡기 위해서입니까?”

    “묘법선존의 명을 받고 한 수사를 찾기 위해 온 것이 맞습니다. 수사에게서 본래 구원관의 보물이었던 암녹색 병 형태의 시간 선기를 되찾아야 하기도 하고요.”

    남원자의 대답에 한립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오랜 세월 그가 품고 있던 비밀이었는데 이제 더는 숨길 수가 없어졌다.

    “구원관에서는 그게 나한테 있는 줄 어떻게 안 겁니까?”

    “정확히는 모르나 수사에게서 찾은 조화정립 때문에 그런 추측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화정립!”

    한립은 시간법칙이 담긴 수정 알갱이를 떠올리고 어쩌다 들키게 되었는지 파악했다.

    “당신들 오누이 말고 금한선궁에서 나온 이들이 더 있습니까?”

    “아니요, 묘범선존께서는 대라경에 맞먹는 저희 둘로 충분히 한 수사를 잡아 올 수 있을 거라 여기셨으니까요. 수사의 실력이 저희를 압도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남원자가 쓴웃음을 흘렸다.

    한립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는데 그때마다 남원자는 막힘없이 대답을 해주었다.

    그 후, 한립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고민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원자도 그를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었다.

    순간 한립의 손이 움직이고 남원자의 미간으로 날카로운 수정빛이 날아가 깜짝 놀란 그를 잠재웠다.

    수결을 맺어 남원자의 의식에 또 다른 봉인으로 혼백을 구금한 그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제혼, 이자가 한 말 중에 거짓이 있더냐?”

    “아뇨. 대답할 때 혼백 파동이 아주 안정적이었어요. 전부 사실만을 말한 것 같아요.”

    제혼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고, 한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남원자가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만일 자신의 질문에 단 한 번이라도 거짓말을 했다면 주저하지 않고 죽여 추혼술을 하려 했었다.

    “그냥 죽여서 추혼술을 하면 훨씬 편한데 왜 살려두신 거예요?”

    뒤쪽에서 파동이 일고 은색 빛의 문 안에서 제혼이 걸어 나왔다.

    “남안이 달아났지 않았더냐. 둘의 친밀한 관계로 보아 남안은 반드시 돌아온다. 남원자를 살려두면 쓸모가 있을 것이야.”

    한립은 남원자를 화지 공간 안으로 던져 넣으며 답했다.

    “아까 그 여자요? 오누이가 함께 달려들어도 주인님을 이기지 못했는데 그 실력에 뭘 할 수 있겠어요. 감히 다시 찾아오면 죽이면 그만이죠.”

    “그리 생각할 일은 아니다. 이곳에 남안뿐이라면 나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는 않겠으나 기마자가 선부 안에 있다. 같은 천정 사람이니 힘을 합칠 수도 있어.”

    “아, 그렇네요.”

    제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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