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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43화 (1,800/2,000)

2043화. 얼음 깨기

*

한립은 다시 남 씨 오누이를 살피려다 인상을 찡그렸다.

잠깐 사이 그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의아한 눈빛의 그를 향해 금속수 한 마리가 뛰어들어 기습했다.

양 장로를 죽인 거대 새 금속수가 그를 노리고 있었다.

“조용!”

정신 사납게 하는 새의 울음소리에 한립은 냅다 주먹을 뻗어 성신지력이 실린 괴력으로 금속수를 터트려 버렸다.

어딘가로 날아간 거대 새의 잔해를 기린 모양의 금속수가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크앙!

기린 모양의 금속수가 포효하자 등에 금색 날개가 돋아났다.

한립은 아까 감지한 다른 금속수보다 강한 기운의 존재가 거대 기린인 것을 알고 청죽봉운검을 불러냈다.

네 발로 달려오던 날개 달린 기린이 입을 벌려 금색 용암을 분출했다.

치지지직.

청죽봉운검의 금빛 뇌전과 푸른 검기가 혼합되어 푸른 막을 이루고 금색 용암을 막았다.

용암 속에도 예리한 기운이 숨겨져 있어 푸른 막 위로 튀어나온 금색 뇌전들을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쪼갰다.

그러나 남은 푸른 검기들이 달려들어 금색 용암을 흩어버렸고, 그 사이로 한립이 날아올라 기린 금속수를 공격했다.

슁!

그걸 본 금속수가 방금 생긴 두 날개를 힘차게 휘둘러 칼날같이 날카로운 금색 바람을 날렸다.

공중에서 금색 바람에 막힌 한립의 발밑에서 펑!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무형의 계단을 밟고 오르는 것처럼 허공 답보를 해 기린 머리를 향해 주먹질했다.

퍼퍼퍼퍽.

그의 주먹질에 공간이 다 웅웅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기린의 거대한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단한 머리는 아직 깨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 위로 내려선 한립은 머뭇거리다 두 손가락을 미간에 대었다.

하얀 수정실이 그의 손을 따라 빠져나와 거대 기린의 미간으로 사라졌다. 거대 기린은 고개가 푹 꺾여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들어가서 앞으로는 여기나 잘 지키거라.”

한립은 은색 빛의 문을 열고 발로 기린의 엉덩이를 뻥 차서 화지동천 안에 던져 놓고는 문을 닫았다.

화지동천을 닫은 한립은 갑자기 나타난 물빛 장막이 걷히고 아름다운 남녀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동천의 보물이네요? 그러니 비경의 보물을 싹 털어갈 수 있었던 거군요. 그래도 한립 수사, 밭을 통째로 파가는 건 너무 했습니다.”

남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 정체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우리 둘을 그리 감시하는데 그것을 모르려고요?”

미간을 좁힌 한립의 물음에 남원자가 담담히 답했다.

“남 씨 오누이라더니…….”

마치 부부 같은 두 사람의 친근한 태도에 한립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걸 본 남안이 날카롭게 외쳤다.

“나와 오라버니는 사형사매 사이에요! 사부님께서 거둬주신 덕에 그분의 성을 따라 같은 성을 쓰는 것뿐이고요. 당신 같이 이상한 사람이나 추악한 생각을 하는 거라고요.”

남원자는 그녀와 달리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당신들이 무슨 관계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되도록 싸움을 피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싸우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투항하고 비경을 나가는 대로 우리와 같이 구원관으로 가서 노조님을 뵈면 될 일입니다.”

남원자가 웃음 지었다.

“하하, 구원관 분들은 참 농담도 잘하십니다. 지난번에 그런 말을 하던 동방백이 어찌 되었는지는 혹시 아십니까?”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반문했다.

“당신!”

남안이 벌컥 화를 내며 기다란 낫을 들이밀려는데 남원자 손을 뻗어 말렸다.

“선궁에 쳐들어와 동방백을 죽인 자다. 아무리 우리라도 신중히 상대할 필요가 있어.”

남원자의 말에 남안이 두 손으로 기다란 낫을 잡고 한립을 직시했다.

“굳이 싸우셔야겠다니, 서로 실력이나 알아볼까요?”

진지한 얼굴의 남원자가 장검을 붓처럼 써서 가로획을 그으니 남색 구슬 같은 영역이 퍼져 그들을 가두었다.

금속역장의 힘이 희박해지고, 금속수들도 자연히 영역 바깥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망우각 영소문 등의 수사들은 진작 태반이 죽어 몇 안 남아 있었다.

“영역을 펼치는 것만으로 금속수를 쫓다니 신기하군요.”

“오행의 속성은 서로 상생상극의 관계에 있습니다. 금생수(金生水)라 했으니 금속역장 안에서 제 물속성 영역이 더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금속수들이 물의 영역 안에 머물면 그 힘을 빼앗길 테니 피하는 것이지요.”

한립이 신기하게 생각하자 남원자가 설명을 해주었다.

“한 수 배워갑니다.”

“달리 말하면 금속역장 안에서는 제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소린데,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까?”

“당신이 대라경 수사이면서 이런 지리적 이점을 차지했다면 그런 소리를 해도 되겠으나, 안타깝게도 아니군요.”

빙긋 웃어 보인 한립은 선령력도 일으키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물결이 막아섰는데 <천살진옥공>을 발동한 그의 몸에서 현규들이 빛나며 남 씨 오누이와의 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가까워졌다.

“엄청난 힘이군. 태을경 수사가 지닐 수 있는 육신의 힘이 아니야.”

남원자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그러면 어때요! 제 수원참(水元斬)에 당하고도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보겠어요!”

화가 치민 남안이 코웃음을 치고 남색 둔광을 일으켜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남원자의 영역 안에서 그녀는 아무런 제약도 없이 쾌속으로 움직였다.

낫의 남색 수정돌이 강렬한 물 속성 법칙의 힘을 폭발적으로 터트리며 배로 커져 허공에 궤적을 남겼다.

“이런, 피해야…….”

남원자가 그때 무언가를 떠올리고 급히 소리쳤다.

이미 체내의 진원보륜을 역전한 한립은 시간의 흐름을 가속해서 남안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낫을 여유롭게 피하며 목을 틀어쥐자 남안은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키킥…….”

그러나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이에 흠칫 놀라 남안을 놓아주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서늘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그를 남색 얼음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가 목을 틀어쥔 ‘남안’도 진짜가 아니라 얼음 조각상으로 변했고 말이다.

남원자 곁에 빛이 응결하며 남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라버니, 시간법칙을 익혔단 정보를 같이 들었는데 제가 그렇게 철없이 굴겠어요?”

남안이 새초롬하게 웃음 지었다.

“나까지 속이다니, 너 때문에 얼마나 놀란 줄 아느냐?”

“그래서 이렇게 쉽게 잡았잖아요. 어서 철저히 봉인해요. 극한빙정(劇寒氷晶)으로도 일다경밖에는 못 붙들어 둘 테니까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얼음 조각 속에서 한립의 목소리가 울렸다.

“일다경?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이어서 쩡, 하고 얼음이 깨지고 금빛 뇌전을 방출하는 한립이 멀쩡하게 나타났다.

“어떻게!”

평범한 태을경 수사가 극한빙정에 갇히면 선령력 흐름이 막혀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고 태을경 최고봉 수사라도 시간이 걸렸다.

현규 9백여 개를 뚫은 한립은 선령력이 봉해져도 육신의 힘과 성신지력만으로도 얼음 금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린 잘못된 판단이었다.

차갑게 웃음을 지은 한립은 손을 저어 은은한 금빛 영역으로 남원자의 영역을 감쌌다.

시간영역 안에서 압박감을 느낀 남 씨 오누이의 표정이 달라졌다.

“생각보다 어려운 상대가 될 것 같으니, 그 수를 써야 할 것 같다.”

남원자의 굳은 얼굴에 남안도 눈을 마주쳤다.

기다란 낫을 거둔 그녀가 손가락을 튕겨 하얀 영역을 퍼트리는데 남원자의 영역이 호응하면서 융합되어갔다.

두 영역은 융합된 후 아주 특이한 빙한의 기운을 내뿜었다.

“영역융합…….”

한립은 부쩍 강해진 압박감에 침을 삼키기도 어려워졌는데, 남안과 남원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남색 얼음 조각상 하나가 나타났다.

성별을 구별하기 힘든 얼음 조각은 묘하게 남안과 남원자를 닮은꼴이었다.

휭.

각처에서 바람이 일고 네 개의 똑같은 남색 얼음 조각이 응결되었다. 총 다섯 개의 얼음 조각이 무표정하게 기합을 터트렸다.

이에 온도가 뚝 떨어져 눈에 보일 듯한 하얀 한기가 몰려들었다.

솨솨.

공간이 얼어붙고 한립의 이마에도 서리가 맺혔다.

파칙!

한립은 청죽봉운검 18자루를 불러내 동시에 금색 뇌전 구슬들을 폭파했다.

그래도 하얀 한기는 순식간에 들이닥쳐서 그와 청죽봉운검을 꽁꽁 얼리려 들었다.

금색 뇌전 구슬에서 퍼진 뇌전 줄기조차 얼음에 봉인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의식세계조차 얼어붙어 정신이 멍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라버니와 영역융합으로 잡아두긴 했어도 오래 버틸 수 없어요. 어떻게 구원관으로 끌고 가죠?”

얼음 조각 중 하나가 무감정하게 입을 달싹였다.

“꼭 산 채로 끌고 오라는 명은 없었다. 장천병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니 죽여서 혼백만 데려가면 될 것이야.”

다른 얼음 조각이 냉랭하게 답했다.

“현빙참원검(玄氷斬元劍)을 쓰자는 거죠?”

“가라!”

또 다른 얼음 조각이 묻고 나머지 두 얼음 조각이 외쳤다.

웅.

다섯 얼음 조각들이 수결을 맺어 한립 머리 위로 원형의 주술문자들을 응결해 남색 얼음 거검을 응결했다.

차가운 기운이 백 배로 심해져 무시무시한 힘을 드러냈다.

‘저건 몇 품 선기인 거지?’

한립은 깜짝 놀랐다.

얼음 거검의 위세는 평범한 대라경 수사라 해도 막지 못할 것 같아 그들이 힘을 합쳐 술법을 펼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선령력이 동결된 그는 성신지력조차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아 꼼짝없이 한기의 힘에 갇혀 있었다.

* * *

석문 바깥의 수사들은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강력한 파동이 터져 나오는 것만 느낄 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었다.

“언제 들어갈까요?”

소안천이 전음으로 물었다.

“기다리지. 이 정도로 격렬한 싸움이면 우리도 들어갔다가 화를 입을 텐데, 싸움이 끝나고 들어가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야.”

근류는 조용히 생각을 전했다.

이때 강대한 빙한의 기운이 금속역장을 봉쇄하고 석문을 빠져나왔다.

문에 가까이 서 있던 망우각 수사 몇 명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얼음 조각으로 변해 구해주기도 전에 숨이 끊겼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모골이 송연해진 수사들이 문가에서 피하고, 소안천과 근류가 시선을 마주쳤다.

“근 수사, 우 수사가 들어간 지 한참인데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닙니까?”

청수곡 부 곡주가 안색이 변해 물었다.

“안의 상황을 저라고 알겠습니까.”

근류가 대답하고 이번에는 쿵, 소리와 함께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운 기운이 석문을 빠져나와 다들 멀찍이 물러서야 했다.

* * *

그 시각 석문 안쪽.

화르륵!

여전히 얼음에 갇힌 한립을 은색 화염이 용처럼 휘감고 무시무시한 열기를 내고 있었다.

화염 속에서는 머리에 일곱 빛깔 화염을 날리는 은색 불새가 날아올라 떨어지는 현빙참원검을 향해 돌진했다.

쿠쿠쿵!

현빙참원검의 한기와 은색 화염이 만나 하얀 수증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정염의 불……. 정염불새!”

얼음 조각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정염불새라 해도 이 위력은 말도 안 돼요.”

“동방백, 이 빌어먹을 자식은 왜 이런 중요한 정보를…….”

각기 다른 얼음 조각들이 심각하게 떠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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