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2화. 은혜를 모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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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안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원자는 얼핏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봤지만 찾지는 못했다.
“왜 그래요?”
“아니다, 내 착각이었던 것 같구나.”
남안의 물음에 남원자가 웃음 지었다.
“저 안에 진짜 보물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보물이 있다면 빼앗아다 네게 선물로 주마.”
“그럼 오라버니는 보물을 맡고, 나머지 성가신 것들은 제게 맡겨요. 아주 씨를 말려버릴 테니까요.”
남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깃들었다.
“아직 쓸모가 있는 자들이니 급히 죽일 것 없다.”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 못난이 꼴로 다녀야 하잖아요.”
“하하, 저들을 다 죽이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누가 본다고?”
“당연히 오라버니죠. 오라버니 말고 누가 감히 그럴 자격이 되겠어요?”
“내 눈에 너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다. 어떤 모습으로 있든 마찬가지야.”
부드러운 남원자의 눈길에 남안이 발그레하게 변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두 무리는 정리를 마치고 둘로 나뉘어 금빛 문으로 들어갔다.
“안심하고 들어가거라. 후발대가 버티고 있으니 별문제 없을 것이야.”
근류가 눈인사를 하며 선발대를 안심시켰고, 소안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우활해와 양 장로가 시선을 마주치고 선발한 인원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망우각 무리도 그들을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문에 들어선 순간 눈부신 금빛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우활해와 양 장로 뒤에서 걸어가던 한립은 문 뒤의 공간에 들어서자 강대한 압박감을 느꼈다.
흙의 중압감과 물의 끈적임과는 다른 단단하게 전신을 옭아매는 구속력이었다. 게다가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스쳐 피부가 따가웠다.
아직도 내부에 금빛이 뿌옇게 퍼져 있어 채 수십 장 앞을 보기가 어려웠다.
“이 느낌은…….”
조 부각주가 주변을 살피며 놀라워했다.
“소 선자의 말이 맞았나 봅니다. 정말 금속역장이 있어요.”
양 장로가 후회하며 말했다.
그가 금색 구슬을 꺼내 품에 넣자 금빛이 호선을 그리며 빠져나와 전신을 보호했다. 이에 다른 이들도 고통스러운 얼굴로 서둘러 보호막을 일으켜 주변의 압박감에 저항했다.
수결을 맺은 우활해의 피부에 금색 문양이 일어나 금속역장의 침식을 막았다.
“이렇게 강한 금속역장은 처음 봅니다. 힘의 근원이 되는 진법이 있는 게 분명해요. ……너희들은 어서 진법 중추를 찾아 파훼하거라.”
우활해가 한립 등 몇 명을 가리켰다.
금속역장 속에서도 단단한 몸을 지닌 한립은 그리 괴롭지 않았지만, 신분에 맞게 참기 힘든 연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걸음도 걷기 힘든데 어떻게 도와드리면 좋을지…….”
“헛소리 말고 서두르세요! 진법을 파훼하는 게 늦어 다른 이들이 보물을 다 차지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한립이 울상을 짓고 말을 끝맺기도 전에 우활해가 소리쳤다.
“아, 알겠습니다.”
힘없이 탄식한 한립은 방향을 골라 천천히 나아갔다.
금속역장 안에서는 한립도 의식이 제약을 받아 백 장 거리밖에는 탐색을 할 수가 없었다.
구유마동까지 펼쳐도 볼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었다.
백여 걸음을 더 걸어간 한립은 수많은 문양이 새겨진 금색 돌기둥에서 괴이한 파동이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금속역장을 만들어내는 중추 중 하나인 것인가?”
돌기둥으로 다가가 손으로 살살 쓸어보니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돌기둥 위에는 어렴풋이 날개 달린 짐승 조각상이 얹어져 있었는데, 그 날개 끝에서 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휙!
돌기둥의 문양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을 하려는데 파공음이 들리고 조각상, 아니 살아있는 짐승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번득 뒤로 피한 한립은 강력한 금속의 힘을 지닌 금속수와 마주했다.
예전에 싸웠던 호랑이 금속수들보다 기운이 강했는데 놀랍게도 주변 환경에 완벽하게 융화되어 먼저 공격하기 전에는 석상인 줄로만 알았다.
한립의 손목이 움직이고 청죽봉운검 한 자루가 떠올라 날개에서 뻗어 나온 금빛을 막았다.
챙!
청죽봉운검을 감싼 금색 뇌전이 절반으로 줄어있었다.
한립은 검을 측면으로 거두고 다른 손으로는 검결을 맺었다.
촤악.
금색 뇌전들이 검신에서 빠져나가 칼날을 이루고 금빛을 갈랐다. 금속수들은 뇌전 칼날을 경계하면서 두 날개를 펄럭여 위쪽으로 솟구쳤다.
한립은 뿌연 금빛이 갈라진 틈으로 주변을 살피고 멈칫했다.
백여 개의 모든 금색 돌기둥 위에 다양한 형태의 금속수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금빛이 지날 때마다 금속수들이 번쩍번쩍 눈을 뜨고 돌기둥에서 뛰어내려 어딘가로 향했다.
청죽봉운검의 뇌전 칼날이 사라지고, 다시 금빛이 뿌옇게 끼면서 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무슨 일이냐?”
우활해 등이 전방의 기척을 듣고 큰소리로 외쳤는데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상한 마음이 든 나머지 사람들은 한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저 금빛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양 장로가 의아해했고, 다들 불안한 마음에 표정이 굳었다.
타타탁!
그때 다급한 걸음 소리가 들려 다들 법보 같은 것을 불러내 경계했다.
훅!
출렁이는 금빛 속에서 누군가 뛰쳐나오자 우활해는 손에 든 장도에 빛을 일으켰다.
“저, 접니다! 공격하지 마세요…….”
“석 수사…….”
그는 손을 들어 공격하지 말라는 표시를 하며 입을 열었다.
“우 수사, 안에 금속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요!”
한립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난 또 무엇이라고, 금속수 따위야…….”
우활해는 괜히 긴장했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는데,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만신창이가 된 시체들이 날아들어 떨어졌다.
진법 중추를 찾아 금빛으로 들어갔던 이들이었다.
“왔다.”
파공음이 들리고 한립은 남 씨 오누이를 살폈다.
그들은 진작 무리에서 빠져나와 서로 등을 맞대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체를 확인하겠구나.’
한립의 눈에 웃음기가 스쳤다.
훅!
바람소리와 금색 바람의 칼날이 선발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여파로 금빛이 흩어지고 주변을 볼 수 있게 된 수사들이 잔뜩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백여 마리의 거대한 금속수들은 호랑이, 표범, 뱀, 독수리, 쥐, 돼지 등 갖가지 모습을 하고 강대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우활해도 자신이 한 ‘금속수 따위’라고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금원산맥에 살면서 금속역장에는 몇 번 들어가 보았지만 이렇게 많은 금속수는 처음이었다.
“망우각 제자들은 모여 진을 친다!”
조 부각주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명을 내렸다.
“예!”
힘차게 소리친 망우각 수사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 금색 고리를 하나씩 꺼내 들고 수십 개의 법보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금빛 꽃을 피웠다.
“우리도 함께 진법을 펼치겠습니다.”
우활해가 그걸 보고 급히 외쳤다.
영소문, 열양성 사람들은 수가 부족해서 개별적으로 진법을 펼치는 위력이 강하지 못할 터였다.
“우 수사, 익힌 공법이 달라 함께 진법을 펼치기 어려우니 각자 살길을 찾읍시다.”
조 부각주는 교묘한 말로 거절했고, 그를 노려보던 우활해는 양 장로와 의기투합해 각자의 부하들을 모았다.
종문도 각기 다른 이들이 모여 진법에 능한 이가 지침을 주지도 않으니 단시간 내로 해결될 리 없었다.
“석 수사, 넋 놓고 서서 뭐 하는 겁니까! 어서 이리로 와서 진법을 펼치는 걸 도우세요!”
우활해가 우두커니 서서 남 씨 오누이 쪽을 보는 한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힐끗 고개를 돌린 한립은 붉은색과 푸른색 두 겹의 보호막을 친 그들을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특별히 여기까지 달려와 달아나라고 알려주었는데 미련하게 뭐 하는 것이냐? 그런 진법으로 무엇을 막을 수 있다고?”
“이놈, 뭐라는 것이냐!”
대뜸 반말하는 한립을 보고 우활해가 버럭 화를 냈다.
“쯧쯧, 다 제 명에 살다 가는 것이지. 알아서들 하거라.”
한립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가볍게 웃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 선발대를 포위한 금속수 중에서 거대 늑대 한 마리가 공격을 개시했다.
늑대 금속수의 날카로운 발톱이 거대한 칼날처럼 망우각 수사들이 이룬 금륜대진(金輪大陣)으로 떨어졌다.
“온 힘을 다해 진법을 유지한다!”
조 부각주의 말에 망우각 수사들이 기합을 터트리면서 선령력을 일으켰다.
끼이익!
늑대 발톱이 진법과 충돌해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고, 금빛 보호막에 세 줄기 구멍이 생겼다.
금선들이 힘을 모아 펼친 진법의 위력은 강했지만 금속수의 발톱 아래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것과 다름없었다.
망우각 수사들이 든 금색 고리들은 퍽퍽 터져 가루가 되었다.
진법을 이룬 수사들의 팔과 다리가 떨어져 휙휙 날아다니며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다.
망우각 수사들 대부분이 죽거나 중상을 입은 것이다.
우활해가 드디어 사태를 파악하고 겁에 질렸다.
망우각의 금륜대진이 금속수의 일격을 막지 못했는데, 여기 오합지졸이 펼친 보호막은 기대할 것도 없었다.
“다들 흩어져 달아난다!”
우활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 그래도 기회를 엿보고 있던 영소문, 열양성 수사들은 가장 강한 보호막을 두르고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공간 안에서는 어떤 빛이든 금속역장의 제약을 받아 위력이 약해졌다.
그들의 행동이 금속수들을 자극했는지 금색 짐승들 모두 대대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우활해가 입은 푸른 장포에 금색 비늘이 돋더니 비범한 기운을 반짝였다.
마치 금색 물고기가 물속을 노니는 것처럼 그는 금속역장 속에서도 인파를 뚫고 쾌속으로 움직였다
금속수들이 포위를 하고 있지만 않았어도 벌써 십여 리는 달아났을 것이다.
열양성 양 장로도 어느새 붉은 옷을 걸치고 교룡처럼 사람들 틈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 열기에 적잖은 동문 수사들이 화상을 입었지만, 오직 끊임없이 달려드는 금속수들을 피하는 데만 열중했다.
이때 머리 위로 날개 달린 금속수가 날아들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를 노렸다.
무시무시한 금속성 힘을 느낀 그는 전력으로 피하면서 한립이 있는 쪽으로 돌진했다.
“저리 비켜!”
인상을 찌푸린 한립은 손바닥을 펼쳐서 허공을 후려쳤다.
“죽고 싶구나!”
그걸 본 양 장로가 입에서 화염을 분사하며 조소하는 데 화염이 나아가기도 전에 느닷없이 손바닥이 튀어나와 그의 머리를 빡! 내리쳤다.
그는 혼백이 진탕되는 느낌을 받았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거대 새의 발톱에 꽉 잡힌 뒤였다.
“안 돼…….”
외마디 절규를 끝으로 그는 삼등분으로 찢겨 금속수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뺨을 갈긴 한립은 양 장로의 최후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다급히 달아나다 그 모습을 우연히 본 우활해는 머리가 띵해졌다.
‘네 놈이 나를 속여! 가만두지 않겠다!’
우활해가 속으로 뭐라 다짐하든 한립은 멀찍이 떨어진 남 씨 오누이만 주시하고 있었다.
남안은 물빛 남색 수정 3개가 박힌 막대기에 굽은 낫이 달린 무기를 들고 부단히 주위를 살폈고, 그녀와 등을 맞댄 사내는 역시 남색 수정 세 개가 박힌 가느다란 장검을 쥐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만황 사자를 닮은 금속수가 달려들었다.
“품계가 높아서 요핵에 함유된 금속 속성 법칙이 상당할 것 같은데 몇 마리 죽여 볼까요?”
물빛이 좌르륵 흐르는 몸을 하고 남안이 웃음 지었다.
“세월탑에 보관된 보물에 비하면 가치 없는 일이다. 여기서 힘을 빼느니 어서 출구를 찾는 게 나을 게야.”
남원자가 신중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그럼. 이렇게 많은 금속수를 다 죽이는 것도 성가시니까 안쪽으로 가봐요.”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말거라. 실력이 상당해서 여유 부리다가는 부상을 입을 수도 있어.”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포효하는 사자를 공격했다.
남안의 손끝에서 남색 빛이 모여들어 물의 장막을 이루고 동글동글한 무늬들이 떠올라 진한 물의 기운을 물씬 일으켰다.
그녀를 향해 달려든 사자가 장막에 머리를 부딪혀 주춤하는 사이 물방울들이 떠올라 짐승을 붙들었다.
동시에 남안이 든 기다란 낫이 허공을 갈라 초승달 모양 빛을 방출했다.
금속수는 허리가 두 동강이 나서 떨어졌고, 남원자는 가느다란 검 끝에 나선형으로 물빛을 일으켜 짐승의 미간을 꿰뚫었다.
푹!
금속의 힘이 응결된 금속수의 단단한 머리가 부드럽게 뚫렸다.
죽어라 달아나다 또 그 모습을 본 우활해는 가슴이 철렁했다. 위장하고 있던 존재가 ‘석 수사’ 말고도 더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살아남아 용모가 평범해 보이는 이들을 만나면 절대 쉽게 얕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때 ‘석 수사’가 순간 그쪽을 돌아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아졌다.
다행히 그는 금방 눈길을 돌렸고, 심장이 벌렁벌렁해진 우활해는 그들 세 명을 피해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한립은 그저 더 강한 금속수 한 마리가 그쪽에서 감지되어 잠시 곁눈질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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