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1화. 망설임
*
뇌옥책은 떠나기 전 소안천에게 항상 몸조심하라고 당부했지만, 그녀는 별말 없이 먼저 가버렸다.
망우각 일행 중에 섞여 있는 남 씨 오누이는 전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매, 뇌옥책은 수행도 비슷하면서 소안천에게 쩔쩔매는군. 이상한 일이야.”
“이상하긴요. 범인이나 선인이나 남녀 사이는 다 똑같은 거죠. 원래 한쪽이 애가 탈수록 다른 쪽은 마음이 가지 않고, 한쪽이 냉대할수록 뇌옥책 같은 사내는 더 가지고 싶어 안달하니까요.”
빙긋 웃은 남안이 전음으로 답했다.
“그런 이치가 있었군.”
“왜요? 오라버니도 맛보고 싶으세요?”
“큼……. 아니다, 아니야. 중요한 임무 중이니 어서 바짝 따라가기나 하자꾸나.”
남원자가 말문이 막혀 걸음을 서둘렀다.
대열의 끝에서 통로로 들어가던 한립은 도끼를 쥔 손아래 미세하게 몇 글자가 더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도끼가 떨어져 생을 끊어낸다?’
비슷한 시각, 묘령의 흑포 소녀는 여의를 쥔 손아래 미세한 글자를 읽으며 지나치고 있었다.
‘마음대로 될 것인가, 여의치 않을 것인가.’
두 무리가 수백 장을 이동했을 때 뒤에서 쿠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쌍두(雙頭) 조각상이 도끼와 여의를 떨구어 두 통로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이에 두 무리에서 각각 문중과 근류가 나서 퇴로가 끊긴 것을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립은 무리 뒤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천수종을 위주로 일행이 십여 리를 걸어가는데, 벽에 한립도 처음 보는 현란한 무늬들이 가득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통로가 좁아지면서 처음에는 수백 장에 이르던 넉넉한 공간이 수십 장으로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기관이나 금제가 나타날까 봐 긴장했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떤 일도 생기지 않았다.
통로의 끝에 드디어 금색 문이 보이고 좌우로 창을 들고 있는 도사의 조각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흠……. 음양폐쇄진(陰陽閉鎖陣) 같구나.”
근류가 석문 이곳저곳을 가리키다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은 속으로 실소했다.
문에 새겨진 문양은 볼록 튀어나온 곳과 움푹 들어간 곳이 교차해 음양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 별자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어떤 진법인지 알아내셨으면 파훼도 가능하시겠네요?”
“해보마.”
소안천의 말에 근류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잠시 조용히 해주세요. 전할 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활해가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여기 석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저 혼자 금제를 열려고 하면 못해도 이틀은 걸릴 겁니다. 도움을 주시지요.”
근류의 말에 다들 얼굴이 핼쑥해졌다.
아까 금제를 연답시고 수십 명이 죽어 나간 광경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근 수사, 자세히 설명을 해주셔야 다들 안심하고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무슨 일이 생겨도 각자 대처할 수도 있고요.”
백 장로가 앞으로 나섰다.
“문에 음양폐쇄진이 펼쳐져 있는데, 모두가 동시에 선령력을 불어넣어 좌우로 음과 양을 고르게 퍼지게 해 구멍의 수를 변화시키면 금제를 풀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금제의 반격은 없겠습니까? 안으로 들어가려다 여기에서 백골이 되어 묻히지는 않을지 솔직히 걱정입니다.”
우활해가 걱정스레 물었다.
“조사를 해보았는데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할 것이니 변고가 생기면 저라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근류는 미소를 머금고 설명했다.
“사형의 설명을 잘 들었으면 이제 도울 사람은 나서 보세요.”
미간을 좁힌 소안천은 여전히 아무도 확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
통로 안이 조용해졌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우 수사, 양 장로, 부 곡주, 조 부각주, 진 루주가 모범을 보이셔서 각자 문하에서 몇 사람을 데려다 저를 도와주시지요.”
차차 미소가 가신 근류가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근 수사…….”
“다들 연맹을 맺기로 했으면 명에 따르세요! 비경을 나선 뒤에 책임을 질 수 있는 행동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활해가 뭐라고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근류가 호되게 소리쳤다. 말을 듣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청수곡은 안배에 따르겠습니다.”
다들 말뜻을 알아듣고 풀이 죽었을 때 부 곡주가 먼저 포권을 했다. 다른 종문들도 알아서 몇 사람씩을 골라내고 있었다.
“그렇지, 각 종문에서 진법에 조예가 있는 이들도 한 명씩 보내주세요.”
얼굴을 푼 근류가 덧붙였다.
그 말에 우활해의 시선이 한립에게 향했다.
“석 수사, 우리 영소문에는 진법에 대해 아는 이가 없으니 수사가 대신 나서 주셔야겠습니다.”
우활해가 인자하게 웃으며 일을 떠맡겼다.
양 장로와 부 곡주가 한발 늦었단 생각에 속으로 눈을 뒤집어 깠으나 늦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예? 제가요?”
한립은 속으로 짜증을 내며 난색을 표했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우리 영소문에 이름을 올려드리겠습니다. 내문 장로로 지내시면 떠도는 것보다 훨씬 편하게 사실 수 있을 거예요.”
우활해는 그런 그의 어깨를 감싸고 속삭였다.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이렇게 듣는 귀가 많은데 제가 헛소리를 하려고요.”
기뻐하는 한립을 보고 우활해가 웃음 지었다.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망우각 무리 속에서 평범한 용모의 남안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저 사람 좀 봐요. 겨우 저런 곳 내문 장로 자리를 약속받고 이런 위험한 일에 대신 나서다니, 인생이 뭔지.”
“고단한 산수의 삶을 네가 어찌 알겠더냐. 영소문 장로 자리가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기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남안의 불쌍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는 말투에 남원자가 덤덤하게 답했다.
그때 망우각 조 부각주가 그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네 둘도 함께 가지.”
잠시 후, 근류가 진법에 조예가 있는 이들을 데리고 파훼법에 관해 설명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전달하게 했다.
이를 듣고 있던 한립은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근본적으로 금제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근류의 방법대로 했다가는 금제의 반격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반 각이 지나고 선발된 사람들은 수십 명에 이르렀고 석문 양쪽에 섰다.
“다들 전력으로 선령력을 주입해야 한다. 몇 사람의 해이한 태도로 문제가 생기면 벌을 받게 될 것이야.”
“예!”
“자, 내가 알려준 대로 하면 된다.”
경고를 마친 근류가 수결을 맺은 손을 석문을 향해 뻗고 남색 빛을 뿜었다.
다른 이들도 분분히 수결을 맺어 체내의 선령력을 석문 쪽으로 방출했다.
다양한 빛들이 무지개처럼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원래 볼록하던 곳을 오목하게 만들었다.
오른쪽 문에 빛이 모여들면서 음과 양을 뜻하는 두 물고기 도안이 형성되자 근류가 기뻐하며 외쳤다.
“조금만 더!”
그 소리에 다들 더욱 힘을 내서 선령력을 부어 넣었다.
그때 금제의 변화를 예민하고 살피고 있던 한립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 현상이 금제의 반격의 조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쩐다.’
비경에 들어와 목숨을 걸고 보물을 찾는 이들을 허다하게 보았기에 그 선택에 대한 대가도 알아서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눈앞의 사람들의 생사는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다른 쪽에서 이동하는 무리도 있었기에 그들이 먼저 도착하게 둘 수 없었다.
음양을 뜻하는 두 물고기 문양의 움직임이 극에 이르렀을 때 영소문 쪽 사람들이 느닷없이 근류가 말하지 않은 몇 개의 지점으로 선령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격렬히 맞물리던 두 물고기 도안이 허물어져 버렸다. 이에 근류가 대노하며 불호령을 내리려다 눈을 반짝였다.
물고기 도안이 흩어져 반짝이는 점들이 별자리를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색이 달라진 그는 자신의 판단에 실수가 있었던 것을 깨닫고 소리쳤다.
“변수가 생겼으니 다들 내 말을 잘 듣고…….”
그의 지도에 사람들은 조금씩 다른 지점으로 선령력을 주입했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구나. 안 그랬으면 내가 직접 나서야 할 뻔했어.’
한립은 남몰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쿠르릉!
육중한 마찰음과 함께 석문이 안쪽으로 열려 기괴한 파동을 머금은 금빛이 쏟아져 나왔다.
영목신통을 사용해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보물의 광채인 것인가…….”
우활해가 중얼거리고 비슷한 생각을 한 수사들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금원산맥 종문 수사라는 사람들이 이게 뭔지도 모르는 겁니까? 금속역장(金屬力場) 아닙니까.”
소안천이 냉소했다.
“소 선자, 금원산맥의 금속역장이 어떤지는 우리도 압니다. 그러나 이 정도 광채면 금속 속성의 보물일지도 모르지요.”
양 장로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 말에 소안천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답을 대신했다.
양 장로는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아해졌다.
그리고 문 안쪽을 본 한립은 그 논란이 이해가 되었다.
금원산맥에서 볼 수 있는 금속 속성 파동인 금속역장은 진법의 지지 없이도 강렬한 기운을 발산하는 대신 정순하지가 않았는데, 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은 짙고 정순해서 다들 보물의 빛이라 여긴 것이다.
다들 뜨거운 눈빛을 보내면서도 안에 무슨 기관이나 금제가 있을지 몰라 다짜고짜 뛰어들지는 못했다.
“안에 뭐가 있든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로 나누어서 순서대로 들어가 보는 게 좋겠군요.”
근류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누가 먼저 들어간단 말입니까?”
우활해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금속 속성 공법을 익힌 이들과 금제 진법에 능한 이들을 선발대로 해서 안에 진법이나 금속역장이 있으면 파훼하게 하고 후발대가 진입하면 될 겁니다.”
“공평하지 않은 처사입니다. 우리 망우각의 주 수련 공법이 금속 속성인데 그럼 우리만 전부 들어가 위험한지 확인해야 한다는 소립니까?”
조 부각주가 반발했다.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선발대는 내부에 금제나 금속역장이 있든 없든 간에 먼저 발견한 보물에 우선권을 가질 수 있게 하겠습니다. 위험한 상황이 생겨도 후발대가 지켜보다 지원하면 될 테고요.”
손을 들어 그를 만류한 근류가 말했다.
“그럭저럭 합리적인 결정이라 생각되는군요.”
조 부각주도 이 말에는 수긍했다.
“음……. 열양성, 망우각 그리고 우리 천수종에서 금속 공법을 수련한 이들을 그리고 영소문, 묵향루 그리고 청수곡에서 금제 진법에 능한 이들을 모아서 선발대를 꾸리면 좋겠지요.”
근류에 말에 우활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한립은 또 자신을 대신 내보낼 속셈이라는 것을 알고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도 선발대에 뽑히고 싶었기에 자연스럽게 요청을 수락했고 결국 백 명이 못 되는 무리에 끼었다.
“안 그래도 선발대를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우 수사, 양 수사, 조 수사가 자발적으로 합류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근류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 망우각 수사들이 절반은 참여해 있는데 제가 빠져서는 안 되지요.”
조 부각주가 늠름하게 답하자 망우각 수사들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저희 열양성에서도 적잖은 이들이 참여했기에 그들과 고난을 함께할 생각입니다.”
양 장로도 앞으로 나섰다.
“우리 영소문은 금속 속성 공법에 능하지는 않은 편이나 저는 예외입니다. 석 수사와 같이 힘을 보태려 합니다.”
우활해도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이에 한립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선발대에 속한 남 씨 오누이였다.
진법을 파훼할 때는 나서지 않았지만 이 문을 들어선 후에는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