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0화. 후회 없는 길
*
콰르르.
탑의 먹빛 뇌전과 흑백 돌풍이 충돌하면서 쇠붙이가 충돌하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먹빛 뇌전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발버둥치는 것을 본 군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흑백 진법 안 수사들은 선령력을 빼앗기고 있는 데다 먹빛 뇌전의 영향 때문에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안마저 먹빛 뇌전이 경맥을 타고 흘러 작은 벌레들이 온몸을 파먹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
수행이 높아 참을 만했으나 괜한 고생을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그때 진법 안에 있는 수사 백 명을 쳐다보는 한립의 눈동자에서 묘한 빛이 반짝였다. 그들 중에 추격자가 있다면 알아볼 절호의 기회였다.
휘우웅.
허공의 뇌옥책이 두 손을 빠르게 움직여 흑백 돌풍의 기운을 북돋우고, 뇌전을 품은 채 상승하는 기류 때문에 주위로 바람이 몰아쳤다.
반 각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진법 안 수사들에게는 영원과 같은 시간이었다.
수행이 부족한 이들은 선령력이 고갈되어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남은 이들은 그들 몫까지 더 힘들게 버텨야 했다.
주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이 뽑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고, 또 일부는 그 안에서 누가 죽어 나가든 말든 회색 거탑 방향만 쳐다보고 있었다.
자극을 받은 탑은 금제에서 점점 더 많은 먹빛 뇌전들을 뿜어냈지만 전부 흑백 돌풍에 휩쓸려 떨어져 나왔다.
고공으로 상승하는 돌풍 기류 아래, 먹빛 뇌전이 걷힌 거탑의 석문에는 은은한 보호막만이 남아 있었다.
비경 입구에서 보았던 투명한 금제와 비슷한데 훨씬 두꺼워 보였다.
뇌옥책이 이를 악물고 즉시 석문 앞으로 이동해 두 손을 보호막 위에 얹었다.
슈슈슈슉!
그러자 용의 모양을 한 108개의 금색 바늘이 손을 빠져나가 보호막에 절반씩 푹푹 박혔다.
“금망절선침(金芒絶仙針)!”
누군가 바늘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그때 뇌옥책의 주문 소리에 맞춰 눈부신 빛을 뿜은 금색 바늘들이 웅웅 진동했다.
보호막도 수많은 도검에 찔린 것처럼 날카롭게 울고 있었다.
“깨져라!”
아깝기는 했지만 뇌옥책은 단호하게 외쳤다.
108개의 금색 바늘들이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이에 보호막이 갈라져 터져나가고 검푸른 철문을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콰르릉! 콰콰쾅!
뇌옥책이 얼굴을 풀자 멀리서 지켜보던 수사들은 환호했고 진법 안 수사들도 이제 살았다는 얼굴로 안심했다.
그 순간, 느닷없이 탑 위쪽의 뇌전 문양들이 번쩍거리면서 이전보다 몇 배나 더 굵은 먹빛 뇌전을 마구잡이로 쏘아 보냈다.
안 그래도 오래 버티고 있던 흑백 돌풍이 찢겨나가고 수많은 먹빛 뇌전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안색이 급변한 뇌옥책이 흐릿하게 변해 수십 리 바깥으로 물러나고 놀라 도망치는 수사들에 섞여 한립도 그곳을 벗어났다.
진작 탑의 이상을 감지했지만 의심받지 않게 기다렸다가 움직인 것이다.
탑에 붙어 있던 이들 중 몇 명은 피할 틈도 없이 뇌전에 터져 원영도 살아남지 못했고, 진법에 붙들려 있던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먹빛 뇌전에 잠식되었다.
치지지직!
먹빛 뇌전의 바닷속에서 나무는 물론 돌멩이도 가루가 되는 판이었기에 수사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수도 없이 터져 나왔다.
한립은 거탑을 신중하게 쳐다보았다.
외부 금제가 이 정도면 내부는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뇌전 바닷속에서 경천동지할 폭음이 들리고 반월형의 하얀빛이 나타나 길을 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쉭! 쉭!
열댓 개의 둔 광이 그 안에서 빠져나왔다.
가장 수행이 높았던 태을경 수사 셋과 금선 최고봉, 금선 후기 수사들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의복이 만신창이가 되었거나 부상이 가득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뇌옥책, 문중!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열댓 명 중 하얀 도복을 입은 중년인이 분노로 입술을 떨며 추궁했다. 그가 손에 든 반월형의 하얀 선기는 영성을 크게 잃었는지 어둑해져 있었다.
그는 능월관 관주 천월도인으로 태을 중기의 수행으로 진법을 발동하기 위해 선발된 100명 중 가장 강한 자였다.
능월관은 극음의 공법을 수행하는 터라 그 외에도 많은 제자가 쌍생진법을 펼치기 위해 동원되었다가 죽었기에 화가 날만 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다른 이들도 뇌옥책과 문중을 살벌하게 노려보았고, 연맹을 맺기로 한 세력 중 거의 절반이 비슷한 얼굴이었다.
천수종도 한 명이 쌍생진법에서 빠져나왔지만 소안천, 근류 두 사람이 말이 없자 조용히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건 예상 밖의 사고였습니다. 철문의 금제를 파훼하면 천제음뢰진도 따라서 사라질 거라 여겼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아 변고가 있었던 게지요.”
뇌옥책은 어두운 얼굴로 해명했지만, 천원도인 등은 코웃음을 칠 뿐 전혀 마음이 풀린 기색이 아니었다.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진 것에 저와 맹주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허나 이미 말했다시피 선부에 들어와 보물을 취하려면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법이에요. 맹주께서도 탑 외부 금제를 깨기 위해 평소 아끼시던 귀한 보물 두 개를 잃으셨습니다.”
옆에 선 문중이 나서서 설득했다.
“크흠, 그렇습니다. 방금은 사고였고, 맹주도 모두 함께 세월탑으로 들어가 보물을 찾기 위해 금제를 파훼하려던 것이 아닙니까. 쌍생진법을 사용하지 않고 무턱대고 철문의 금제를 공격했으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겁니다.”
헛기침하며 근류가 입을 열었다.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해서는 선부를 나서는 대로 연맹 차원에서 보상하겠습니다.”
문중이 때마침 덧붙였다.
천수종, 통천검파가 다 이렇게 말하니 천월도인도 더는 어쩌지 못하고 싸늘한 얼굴로 물러섰다.
한립은 그들이 말다툼을 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뇌전 바다를 빠져나온 이들 중 남 씨 오누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워낙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다들 눈치채지 못했으나 강대한 의식을 지닌 그는 강대한 물 속성 공법의 힘을 느꼈다.
먹빛 뇌전 바다에 길을 뚫은 진짜 공신은 천월도인의 선기가 아니라 그 물 속성 기운이었다.
‘기운을 숨긴 물 속성 공법을 수련한 남녀라. 설마 금한선궁 남 씨 오누이?’
당연한 생각이었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마음이 급해서 힘을 썼는데 누가 알아챈 건 아니겠죠?”
남안이 미안한 눈빛으로 전음을 보냈다.
“네가 하지 않았으면 내가 나섰을 것이다. 음로의 힘이 강해 네 기운이 가려졌을 테니 아마 알아챈 이는 없을 것이야.”
남원자가 그녀를 위로했다.
천수종과 통천검파도 한데 모여 수군대며 상의를 했다.
“세월탑 금제는 뚫렸으니 서둘러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세월탑 외부 금제로 보아 안으로 들어가면 또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맹주와 부맹주께서 상의 끝에 수행이 부족한 이들은 들이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또 사상자가 나오면 모두의 불만만 커질 게 아니냐.”
근류가 대표로 나와 공표했다.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근 선배님, 수행이 부족하다는 게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까?”
금선 산수 하나가 얼른 물었다.
“진선경 수사들은 수행이 너무 약해 생존확률이 희박하니 바깥에서 경계를 서도록 할 것이다.”
“뭐라고요? 그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금제를 파훼할 때 얼마나 많은 금선, 진선 수사들이 들어가 죽었는데 이제 와서 세월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단 말입니까?”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종문 휘하의 진선 수사들은 조용했는데 산수 출신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조용! 다시 말하지만 이번 결정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다. 연맹이 탑에서 얻는 수확의 3할을 외부에서 기다리는 수사들과 나눌 것이고, 탑을 지키는 것은 소수면 되니 나머지는 흩어져 비경을 탐색해도 좋다. 이렇게 넓은 공간에 보물이 여기만 있지는 않겠지.”
뇌옥책이 미간을 좁히며 반대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그의 말에 진선경 산수들도 주춤했다.
어차피 그들 실력에 세월탑에 들어가 큰 보물을 찾지도 못할 거라면 위험도 피하고 주변 보물을 노릴 수도 있으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안 그래도 위험한 탑 안으로 진선 제자들을 들이지 않으려 했던 종문 세력들은 보상까지 해준다는 말에 기쁜 마음으로 제자들을 남겨 탑을 지키게 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곧장 들어간다!”
뇌옥책이 흐릿하게 사라져 석문 앞에 섰고 다른 이들이 몰려들었다.
진선경 수사들이 빠지고 오백 명 남짓 남은 무리에서 한립은 소리 없이 걸음을 늦춰 뒤쪽으로 이동하면서 수시로 평범한 외모의 남녀 수사를 살폈다.
남 씨 오누이로 의심 가는 이들이었다.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뇌옥책이 문을 밀려는데 손이 닿기 전에 쿠쿵,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저절로 양쪽으로 열려 어둑한 입구가 나타났다.
그런데 뇌옥책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내부를 살폈다.
이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내밀고 의식을 들여보내려 했지만 무형의 금제가 의식을 차단하고 있었다.
“허허, 다들 조심하게. 위험한 곳이니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사들은 그래도 좋다.”
문중의 말에 정말 떠나는 사람은 없었다.
“가지!”
뇌옥책의 말에 통천검파와 천수종 무리를 시작으로 다른 세력들도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벽에 걸린 화로에서 무언가 자글자글 타서 은은하게 탑 내부를 밝히고 있었고, 가구가 없는 대신 머리 둘 달린 조각상만이 중앙에 서 있었다.
조각상의 왼쪽 머리는 웃고 있는 천관(天官), 오른쪽 머리는 험상궂은 표정의 악귀를 형상화해서 뚜렷하게 대조가 되었다.
문양이 새겨진 금색 갑옷을 입은 조각상은 금색 깃털 날개가 달려 있었고 금으로 만든 여의(如意)와 도끼를 든 양손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뻗어 있었다.
금여의와 도끼 아래 각각 어둑한 통로가 탑 깊은 곳으로 이어졌지만 빛이 거의 들지 않아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글귀가 있습니다.”
누군가 하는 말에 한립은 금여의와 도끼에 각각 한 줄로 새겨진 글자들을 읽어보았다.
“후회 없는 길을 가라, 길은 다르지만 이르는 곳은 같다.”
뇌옥책도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고개를 틀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해서 가라는 것이지요. 뭐 위험한 길과 더 위험한 길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던 근류가 답했다.
“마침 잘 되었네요. 우리 천수종과 통천검파가 각각 인원을 꾸려 두 길로 다 가보죠.”
“소 선자, 위험한 일이 많을 텐데 함께 이동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조각상을 보던 소안천의 제안에 눈을 반짝인 뇌옥책이 이렇게 답했다.
“뇌옥책과 다른 길로 가고 싶은 마음은 알겠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어차피 같은 곳으로 통한다는데 함께 가면 덜 위험하고 좋을 거야.”
근류가 생각 끝에 전음으로 권했다.
“근 사형, 언제부터 그리 천진난만해 지셨나요? 조각상에 써있는 말이 사실일 거란 보장은 어떻게 하고요? 태세선존이 고의로 죽을 길을 파놓고 인원을 둘로 가르려 한 것일 수도 있는데요.”
소안천은 냉소했다.
“사매의 말이 맞군. 내가 어리석었어. 그래서 둘 중에 어느 길로 가고 싶은 것이냐?”
“금제가 있어 의식으로는 미리 알아볼 수가 없어요. 안으로 들어가 봐야 뭐가 있는지 알 수 있겠죠.”
쓴웃음을 짖는 근류를 향해 소안천이 답했다.
“소 선자, 제 말을 들으셨는지요?”
소안천이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뇌옥책이 다시 물었다.
“싫은데요. 통천검파과 우리 천수종이 뭉쳐서 한길로 가면 나머지 길은 남은 이들끼리 수색하게 두란 말인가요?”
“그건…….”
“뇌 수사의 호의는 저와 사매가 잘 압니다만 연맹을 구성해서 모두를 이끌기로 했으면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근류가 웃으며 중재를 했다.
“그렇다면 소 선자께서 먼저 어디로 갈지 고르시지요.”
“천관이 왼쪽, 악귀가 오른쪽을 지키고 있다라……. 저는 오른쪽으로 가죠.”
소안천은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좋습니다. 저희 통천검파가 왼쪽 길로 가지요. 영소문, 청수곡, 열양성, 묵향루 및 망우각 수사들은 소 선자를 따르고 나머지는 나를 따른다.”
뇌옥책이 낭랑하게 명을 내렸다.
결국은 수백 명이 두 무리로 나뉘어 두 길로 들어섰다.
어차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맹주와 부맹주가 결정을 내렸으니 따르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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