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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39화 (1,796/2,000)

2039화. 파훼

*

다시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금제를 만지던 그의 손아래에서 은색 뇌전이 쾅! 터져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때 은색 불꽃이 그의 소매로 들어갔으나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백여 장을 날아가 바닥을 구른 그는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그러나 양 장로 등은 힐끗 그를 보고 열린 문을 통해 우르르 몰려갔다.

얼마 후 대전 안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런 제기랄!”

“내가 좀 남겨 놓으랬잖아?”

수사들의 탄식 섞인 목소리에 한립은 의식연계로 정염불새에게 물었다. 그러나 정염불새는 한참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

정염불새는 우양화단까지 삼킨 뒤로 항상 몽롱한 게 잠이 덜 깬 것 같은 상태였다.

‘후우…….’

고개를 저은 한립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제야 종문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그를 살폈다.

“석 수사, 괜찮습니까?”

이제야 생각났다는 얼굴로 양 장로가 다가왔다.

“다행히 내상을 입은 건 아니라 괜찮습니다.”

한립은 새까맣게 변한 손을 펴 보였다.

“김샜지 뭡니까. 금제가 멀쩡하게 유지되었던 대전 안에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인상을 찡그린 부 곡주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고생했습니다, 석 수사. 여기는 비어 있어도 다른 대전에는 분명 뭔가 남아 있을 거예요.”

우활해가 한립을 붙잡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고맙습니다!”

한립은 애써 감동한 얼굴을 했고, 무리는 잠시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금제가 설치된 건물을 만날 때마다 한립이 문을 열었고, 모두 앞다투어 수색했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며칠 뒤.

일행은 회색 협곡 앞에 도착했다.

짙은 안개 속에 희미하게 거대한 회색 거탑이 우뚝 솟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서 가봅시다!”

우활해가 기뻐하며 앞장섰으나 그 앞에 이르자 얼굴에서 설렘이 싹 가셨다.

회색 뇌전 문양이 각인된 탑에서는 수시로 먹색 뇌전이 튀어 올랐고, 탑 지붕에는 거대한 금색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어떻게 알고들 모였는지!”

한립은 누가 있든 개의치 않고 탑 꼭대기의 금색 화염을 올려다보았다.

시간법칙 파동이 느껴졌지만 무언가에 의해 억눌린 것처럼 멀리 퍼져나가지는 않았다.

“자, 가봅시다! 석 수사, 말을 가려 하는 것을 명심하세요.”

우활해가 특별히 당부하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 거탑에 모인 이들 중에 뇌옥책과 소안천 등 우두머리급이 모여 석문 위의 세월탑(歲月塔) 세 글자를 살피는 중이었다.

먹색 석문에 빼곡하게 뇌전 문양이 들어가 그곳에서 흘러나온 뇌전이 보호막을 이루고 치직! 거리고 있었다.

오는 길에 뇌옥책 등에 대한 정보를 엿들은 한립은 몇 사람을 눈여겨보았다.

그들은 영소문, 청수곡, 열양성 사람들이 도착했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다들 고탑을 보며 흥분해 떠들기 바빴다.

군중 틈에는 남 씨 오누이도 서 있었다.

“비경 안에 이렇게 큰 탑이 있다니 놀랍구나. 태세선존이 남긴 보물도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겠어.”

남원자의 눈에 열망이 어렸다.

한립을 잡으러 온 것이기는 했지만 이런 기연을 마주치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뇌전의 힘이 대단해 보이는데 무엇인지 알겠어요?”

남안이 회색 거탑을 신기하게 살폈다.

“음기(陰氣)를 지닌 뇌전으로 보이는데, 글쎄다. 뇌전의 힘에 관해 깊이 연구한 적이 없어서…….”

남원자가 말을 하다 말고 품에서 남색 거울을 꺼내 들었다.

웅.

거울 표면의 남색 빛이 물결치며 반짝였다.

“오라버니…….”

“그래, 한립이다!”

남안의 눈이 번쩍 뜨이고 남원자가 희색을 드러내며 수결을 맺었다.

그때 한립은 체내의 시간법칙이 누군가에 의해 자극을 받은 듯 파동을 퍼트리려는 것을 감지했다.

‘누군가 선기로 나를 찾고 있어!’

화들짝 놀란 그는 <만규공적술>로 선규를 전부 막고, 동시에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해 다섯 종류의 시간법칙을 몸속 깊은 곳에 봉인해두었다.

극상의 시간공법인 <대오행환세결>은 위력이 큰 만큼 기운을 숨기는 데도 고명했다.

한편 수결을 맺던 남원자는 거울의 파문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왜요? 뭐가 잘못됐어요?”

“감천경이 한립을 놓쳤다. 귀신같이 알고 기운을 숨겼구나.”

“그럴 리가요. 사존께서 내주신 보물이라 대라급이라 해도 감천경의 감지를 다 피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요.”

남안도 깜짝 놀라워했다.

“그만큼 한립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란 소리겠지. 어쨌든 비경에 들어온 보람은 있구나.”

눈을 가늘게 뜬 남원자가 주변에서 떠드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았다.

“방금 도착한 무리가 의심스러워요. 그들이 오고 나서 감천경이 반응을 보였으니까요.”

남안은 벌써 영소문 등 세 종문 제자들이 모인 곳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 * *

“누구였을까? 기마자에게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썼을 텐데. 구원관의 남 씨 오누이라도 와있는 것인가?”

기운을 숨긴 한립은 이런 추측을 하며 모여 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저건!”

그는 한 청년을 보고 바로 시선을 옮겼지만, 산수 무리에 섞여 있는 웅산을 분명히 보았다.

금원선궁에서 한 번 본 얼굴이지만 절대 잘못 보았을 리 없었다.

“얼굴은 낯선데 기운이 익숙해, 누구지? 저자가 있다면 기마자도 들어와 있다는 소리인데…….”

수행이 늘어 태을경 최고봉에 이르렀다고 해도 시간대라인 기마자를 코앞에 두고 무사히 달아날 자신은 없었다.

게다다 구원관 남 씨 오누이까지 와있으면 더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한립이 이런 고민을 할 때 우활해 등 세 사람이 무리를 정비해 탑의 석문 쪽으로 걸어갔다.

“맹주!”

“오! 우 수사, 양 장로, 부 곡주 뭐라도 찾았습니까?”

뇌옥책이 그들을 보고 물었다.

“말도 마십쇼. 오는 내내 허탕만 쳤습니다! 누군가 싹 쓸어갔더군요.”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세월탑 금제는 여전하니 이 안의 보물은 남아 있을 겁니다. 천제음뢰진(天齏陰雷陣)이 복잡해 상의하던 중인데 함께 의견 나누시지요.”

분노에 찬 우활해의 말에 뇌옥책이 화제를 돌렸다. 그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던 우활해 등 세 명이 서로 눈짓했다.

“뇌 수사가 있는데 저희까지 나설 필요가 있나요. 진법의 정체를 알아내셨으니 해결 방법도 금방 생각해 내실 겁니다.”

부 곡주가 공손히 거절했다.

“하하, 방법은 있는데 모두의 도움이 필요해 그럽니다.”

“말씀만 하시지요.”

“다들 고생스럽겠지만…….”

우활해 등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뇌옥책이 흡족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리의 고위층들은 반 시진 동안 상의를 마치고 각자의 무리로 돌아갔다.

그 후 백여 명의 수사들을 동원해 탑 아래 바닥에 진법 문양을 새겨 넣고 진법 도구를 설치해 나갔다.

공터에서 뇌옥책과 문중이 나란히 서서 과정을 지켜보았다.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됩니까?”

문중이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냈다.

“6할은 된다고 봅니다. 세월신등(歲月神燈)이 걸렸는데 어떻게든 해봐야지요. 수사도 같은 생각이 아닙니까?”

“세월신등은 태세선존이 일생일대에 심혈을 기울여 제련한 선기라더군요. 그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뇌 부장문인께서 소안천을 어찌 생각하는지는 알지만 통천검파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세월신등에 관해서 만큼은 사사로운 정(情)보다는 대의를 우선해야 할 겁니다.”

기대감을 드러내던 문중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부장문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미간을 좁힌 뇌옥책이 신중하게 답했다.

백여 명이 바삐 움직이니 반나절 만에 회색 거탑 앞에 검은색과 하얀색 거대 진법 두 개가 완성되었다.

두 진법이 어우러져 흑백의 물고기가 한가롭게 노니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건…….”

한립이 진법을 보고 의식연계를 통해 제혼과 정염동자(精炎童子)에게 연락을 취했다.

몇 호흡 만에 그의 몸에서 뜨거운 기운과 음랭한 기운이 섞여 방출되었다.

“맹주께서 탑의 금제를 풀기 위해 쌍생진법(雙生陣法)을 설치하셨다. 진법을 발동하기 위해 100명의 수사가 필요하니 호명되면 나오거라.”

문중이 날아올라 안내했다.

진법을 설치하느라 참여한 백여 명을 포함해 거대 탑 주변에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반대하지는 않아도 자신이 호명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중이었다.

“너, 너, 너…….”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는 문중이 콕콕 누군가를 짚을 때마다 하얀빛이 빠져나가 그 사람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곧 백 명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나섰는데 그중에는 태을 금선은 물론 진선경 수사도 있었다.

극양 혹은 극음의 기운을 수련한 자들이 절반씩 섞여 있었다.

‘역시 음양쌍생진법이었어…….’

평소에는 다른 이들에 섞여 불려 나가도 상관없었지만, 누군가 그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절대 눈에 띄는 짓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제혼과 정염동자의 원기를 섞어 혼잡한 기운을 만들어냈다.

이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남 씨 오누이는 수행은 낮추었지만 본연의 기운은 숨기지 않아 극음의 기운을 지닌 50명에 뽑히고 말았다.

“귀찮게…….”

남안은 괜히 소란을 피우지 않으려 얌전히 걸어 나가면서 전음으로 볼멘소리를 냈다.

“진법을 발동하는 데 얼마 힘이 들지 않을 테니 수행을 숨기는 데만 전념하거라.”

남원자가 전음으로 당부했다.

“알았어요. 이런 진법은 별것도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 선배님, 쌍생진법으로 금제를 파훼하는 게 위험하지는 않겠지요?”

이때 남안 옆에 선 흑포 중년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보물을 찾아 비경을 탐색하면서 어찌 조금의 위험도 무릅쓰지 않으려 하는 것이냐? 그리 두려웠으면 여긴 왜 들어온 것이야.”

문중이 그를 내려다보고 냉담하게 꾸중했다. 그 말에 얼굴이 붉게 물든 흑포 중년인이 입을 다물었다.

“괜한 걱정들 할 것 없다. 당연히 금제를 파훼하는 데 어느 정도 위험이 따르겠지만 변수가 있지 않는 한 괜찮을 것이야. 또한 금제를 파훼하는 데 참여한 이들에게는 연맹에서 보상을 내릴 것이다.”

문중의 말에 진법 안 수사들의 얼굴이 조금 나아졌다.

“시작하라!”

떠오른 진법 위로 뇌옥책이 명을 내렸다.

바닥에 새겨진 진법이 발동되면서 검은빛과 하얀빛이 터지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압하고 선령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수사들은 흠칫 놀랐지만 선령력이 유실되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이상은 없어 마음을 놓았다.

뇌옥책은 진법의 운용상태를 살피다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후웅! 후웅!

흑백 진법이 빛나면서 팔뚝 굵기의 검은색 빛의 띠와 하얀색 빛의 띠 백여 개가 솟아올라 탑의 철문으로 날아들었다.

그러자 철문의 뇌전 금제가 위협을 감지한 듯 강렬한 법칙의 힘을 품은 먹빛 뇌전을 내뿜었다.

‘음뢰의 힘이 강렬하구나!’

무리 속에서 한립이 동공을 수축했다.

음뢰가 발산하는 법칙의 힘은 청죽봉운검이 지닌 뇌전법칙과는 성질이 정반대였다.

벽사신뢰의 특징을 계승해 극양의 기운을 지닌 청죽봉운검의 뇌전법칙과 달리 먹빛 뇌전은 극음의 살기를 방출했다.

뇌옥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침착하게 주문을 외며 수결을 맺어 흑백진법에서 더 굵은 빛의 띠들을 불러냈다.

빛의 띠들이 뭉쳐 흑백 빛기둥을 이루고 음양의 기운을 발산했다.

수결을 맺은 뇌옥책은 검은색 깃발과 하얀색 깃발을 불러내 머리 위에 띄우고 펄럭거리게 했다.

쌍생진법의 흑백 빛기둥이 그 바람의 영향을 받아 회오리치면서 더욱 강렬한 법칙 파동을 일으켰다.

“가라!”

뇌옥책의 외침에 흑백 돌풍이 회색 거탑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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