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8화. 견마지로(犬馬之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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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이곳 현지 세력인데 이렇게 수난을 당하고 돌아가면 앞으로 면이 설지…….”
우활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을 보아 움직이되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듯싶습니다. 작은 기연이라도 취하면 좋겠지만 정 안 되면 남 좋은 일만 시킬 수야 없지요.”
양 장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모여 함께 살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요.”
부 곡주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전방의 수풀 속에서 잡다한 소리가 들려왔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게 야수가 날뛰는 중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우활해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곳에서 다부진 몸을 지닌 작은 키의 중년인이 옷이 다 찢어진 채 미친 듯이 달려 나왔다.
그 뒤로 멧돼지를 닮은 금색 금속수가 달려오는 중이었다.
털이 강철처럼 솟은 금속수를 피해 중년인은 숨이 턱까지 차서 내달리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쳤다.
“사, 살려주십쇼! 거기 수사분들, 저 좀 도와주세요…….”
중년인은 상대가 대답하기 전에 펄쩍 뛰어올라 그들을 뛰어넘더니 아름드리 나무에 부딪히고서야 겨우 멈춰 섰다.
그를 쫓던 금속수는 당연히 우활해 등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영소문 사람들이 가장 먼저 법보를 불러내 멧돼지 금속수를 공격했고, 열광성과 청수곡 사람들도 한발 늦게 달려들었다.
정순한 금속 속성 원기가 응결해 만들어진 금속수의 요핵도 법칙의 힘을 품고 있는 귀한 보물이었다.
“누구든 치명상을 남기는 자에게 요핵이 돌아갈 것이다.”
우활해의 말에 다들 맹렬히 금속수를 공격했다.
금선 중기 수사의 전력을 지닌 금속수는 수사들의 협공에 힘이 빠졌고, 마지막으로 양 장로가 뒷목을 쳐서 화염 칼로 요핵을 빼내 챙겨갔다.
금속수의 나머지 잔해는 법칙의 힘은 품고 있지 않았으나 쓸 만한 재료라 다른 이들이 나눠 가졌다.
상황이 정리되고 우활해 등이 갑자기 날아든 중년을 돌아보니 그가 둔광을 일으켜 떠나려 하고 있었다.
“어딜 가려고?”
우활해가 검은 채찍을 불러내 이름 모를 중년인의 허리를 감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종문 사람 같지는 않네요.”
부 곡주가 중년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저도 얼굴이 눈이 익지가 않습니다.”
양 장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추혼술을 해보면 어찌 된 일인지 알겠지요.”
우활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 잠깐……. 좋게 말로 합시다! 저는 석목이라 하고, 결코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한 게 아닙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중년이니 금빛을 일으켜 검은 채찍을 벗어나더니 포권을 해보였다.
그는 가면을 쓰고 변신한 한립이었다.
수사들은 우활해의 속박에서 쉽게 벗어나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더 긴장해 병장기를 들어 올리고 그를 포위했다.
그걸 본 한립은 어둔한 얼굴로 연신 손을 내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제가 실력은 별로여도 이상한 재주를 몇 개 부릴 줄은 압니다. 다들 무섭게 그러지 마시고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말씀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우활해 등이 그의 물음을 듣고 움찔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단 말입니까?”
눈을 가늘게 뜬 우활해가 물었다.
“그게……. 숲속에서 짐승을 쫓아 돌아다니다 이상한 산길로 들어섰는데 마치 귀신이 홀린 것처럼 아무리 헤매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그런 환술이나 금제를 푸는 데는 또 일가견이 있어서 겨우 벗어나고 보니 이곳이더군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속수를 만나 여기까지 쫓겨온 겁니다.”
한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말을 우리가 믿어줄 것 같습니까. 우리보다 앞서 비경의 보물과 영초를 가져간 놈이 당신일 수도 있으니까요. 스스로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면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저물법기를 내놓아 보십시오.”
“너무 하십니다. 저물법기를 어찌 남에게 함부로…….”
한립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수사에게 지금 선택을 하라는 것 같습니까?”
양 장로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자신을 포위한 이들을 둘러본 한립은 머뭇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휴, 진짜 저물법기만 보여주시면 저는 그냥 보내주시는 겁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끼어둔 저물반지를 빼서 던져주었다.
우활해가 내부를 살피고 인상을 구기며 양 장로에게 건넸고, 반지는 다시 부 곡주에게 갔다.
“아니, 아무리 초기라지만 금선이라는 자의 저물법기가 이리 궁색해서야.”
부 곡주가 허탈하게 말했다.
“우스운 꼴을 보입니다……. 산야를 떠도는 저 같은 산수가 종문 분들과 같이 주머니가 두둑할 리 있나요.”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비경에 휘말려 들어온 산수인가 봅니다…….”
부 곡주는 저물반지를 다시 던져주었고, 급히 그걸 받아 소중하게 챙긴 한립은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다들 바빠 보이시는데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한립은 미련 없이 떠나려 했다.
“석 수사, 잠시만요.”
우활해가 돌연 입을 열었다.
“예? 무슨 더 하실 말씀이라도.”
“금제와 환술을 파훼하는데 능하다고 하셨는데 사실입니까?”
한립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니 우활해가 전에 없이 선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제 자랑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수행은 보잘것없어도 그쪽으로는 제법 합니다. 아……. 물론 여기 모이신 분들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재주이지요.”
우쭐해서 주절거리던 그는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다는 듯 손을 저었다.
“우 수사, 시간도 없는데 그런 건 왜 묻는 겁니까?”
양 장로가 슬쩍 전음을 보냈다.
“천수종과 통천검파가 우리를 이용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저자를 이용하는 겁니다. 스스로 금제를 파훼하는 데 자신이 있다지 않습니까?”
우활해는 표정 변화 없이 전음으로 답했다.
한립은 그들의 전음을 듣지는 못했으나 그간의 경험으로 대충 무슨 말이 오갈지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사방을 살피면서 걱정스러운 척했다. 그의 아둔한 행동을 본 양 장로와 우활해가 시선을 교환했다.
“저기, 이제 가 봐도 되겠습니까? 저도 사실은 급한 일이 있어서…….”
한립은 얼토당토않은 변명으로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허허, 실은 석 수사께서 이번에 큰 기연을 얻으셨습니다. 우연히 들어오신 이곳은 선가 비경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거든요. 저희를 따라가시면 충분한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우활해가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
“아니, 여기가 선가 비경이라고요? 어쩐지 딱 봐도 뭔가 다르다 했습니다!”
“그렇죠, 태세선부라 불리는 대라경급 선인의 동부였던 곳이랍니다. 석 수사와 우리가 인연이 닿아 여기서 만났는데 그냥 헤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하, 맞습니다. 드넓은 세상에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기연을 찾아봅시다.”
부 곡주도 웃으며 말했다.
한립은 그들의 말에 속으로 냉소를 흘렸지만, 겉으로는 난감한 얼굴을 하며 턱을 쓸었다.
“아, 같이요…….”
우활해가 거의 넘어왔다고 생각해 양 장로 쪽으로 눈짓을 했다.
“석 수사 이런 비경에 홀로 돌아다니다가 더 큰 위기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함께 다녀야 한결 더 안전할 테지요.”
“망설이시는 것은 영소문이나 열광성 아니면 우리 청수곡을 얕잡아 보셔서 그러는 것입니까?”
양 장로가 한 마디하고 한립이 답하기 전에 부 곡주가 인상을 굳혔다.
당근과 채찍의 절묘한 조화였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저를 초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수사분들과 함께 다니며 과분한 보수는 바라지도 않고, 그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포위된 채 고민하던 한립은 결정을 내렸는지 포권을 했다.
“잘도 속아 넘어갑니다. 정말 실력이 괜찮으면 살려두어도 되겠어요.”
부 곡주가 다른 이들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에게 도움을 주신만큼 대우해 드리겠습니다.”
우활해가 낭랑하게 웃음 짓자 한립은 감동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한립은 그들 무리에 끼어 다시 비경 깊은 곳으로 향했다.
“석 수사, 우리와 다른 방향에서 온 것 같던데 뭔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까?”
양 장로가 말을 붙였다.
“말씀드렸다시피 비경에 들어온 줄도 몰라 제대로 둘러보지를 않았습니다. 금속수에게 쫓기느라 정신도 없었고요.”
한립이 민망한 얼굴을 했다.
“저희와 함께 다니면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우활해 등은 한립의 소심한 모습에 그를 더욱 경시하게 되었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를 방패막이 삼아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졌다.
무리를 따라 이동하던 한립은 조용히 그들이 먼저 보물을 털어간 이를 욕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곧 욕을 하는 대상은 천수종과 통천검파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여기에 저희 말고 천수종과 통천검파 사람들도 들어와 있는 겁니까?”
한립은 기회를 보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를 써먹을 생각을 하던 우활해는 상대의 겁먹은 표정을 보고 얼른 머리를 굴렸다.
“전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크기는 해도 드넓은 비경 안에 수많은 세력이 들어와 있어서 그들이 모든 것을 독식할 수는 없을 거예요.”
“우리도 황풍문, 묵향루 같은 곳과 연합하면 그들도 함부로 어쩌지는 못할 거고요.”
보고 있던 부 곡주도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한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실은 그딴 건 관심도 없었다. 그가 진짜 궁금한 것은 기마자와 선궁 사람들도 이곳에 있냐는 것이었다.
“혹시 천수종과 통천검파 외에 주의할 만한 다른 세력은 없을까요?”
“크흠, 생각보다 말이 많으십니다. 그건 또 알아서 뭐하시려고요?”
부 곡주가 성가셨는지 이렇게 말했다.
“혹시라도 제가 눈치 없이 거물을 건드려 모두에게 폐를 끼칠까 하는 우려에서 그만.”
한립이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아, 그건 좋은 생각입니다만 천수종과 통천검파 사람들 외에 우리가 신경 쓸 이들은 아직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양 장로가 대신 답했다.
그 말에 입을 다문 한립은 더는 시끄럽게 굴지 않고 묵묵히 몇 시진을 이동했다.
무리 앞에 웅장한 주홍색 대전이 나타나자 우활해 등이 긴장한 얼굴로 이미 털린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아직 금제가 남아 있어요…….”
“석 수사, 어떤 금제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우활해가 확인을 마치자 양 장로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제가 한 번 살펴보지요!”
한립은 상대가 자신의 진법 실력을 알아보려는 줄 알고 소매를 펄럭이며 앞으로 나섰다.
주홍색 대전의 철문에는 서로 꼬리가 연결된 두 마리의 짐승이 조각되어 있었고 주위로 8개의 뇌전 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전설 속의 팔부뇌신(八部雷神)과 각각 음과 양을 뜻하는 양의뇌수(兩儀雷獸)였다.
한눈에 금제를 파악했지만 한립은 귀를 대보고 고민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우활해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뭔지 아시겠습니까? 파훼할 수 있겠어요? 안 되겠으면 힘을 모아 그냥 깨보겠습니다.”
“우 수사, 그게……. 철문의 양의뇌수는 알아보았는데 문양들이 해독이 안 되어서 금제 류의 뇌전 진법이라는 것밖에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강제로 뚫으려 하면 금제를 자극해서 대전 전체가 뇌전에 가루가 될 겁니다.”
“정말입니까?”
“못 믿으시겠으면 살짝 공격해서 확인해 보시지요.”
반신반의하는 우활해를 보고 한립이 씁쓸하게 말했다.
“하하, 석 수사의 말인데 당연히 믿지요. 그럼 어떻게 파훼를 하면 좋겠습니까?”
“방법은 있을 것 같은데, 누가 직접 해보시면 좋을까요?”
한립이 쓱 훑는데 다들 나서지 않고 그만 바라보았다.
“아…….”
“방법을 아시는 석 수사가 직접 하는 게 가장 좋을 듯싶습니다.”
표정이 좋지 않은 한립을 보고 양 장로가 허허 웃음 지었고, 다들 그게 좋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요. 다들 조금만 물러서 계셔 주세요. 선가 금제라 위력이 어떨지 저도 장담할 수가 없어서요.”
한립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나서자 다들 그 말을 듣고 백여 장을 물러섰다. 수사들을 등진 한립은 씩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금제를 파훼하기 시작했다.
수십 초 만에 금제를 풀 수 있었지만, 은밀히 정염불새에게 의식연계로 연락을 취해 미리 틈으로 들여보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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