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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37화 (1,794/2,000)

2037화. 이동

*

“대부분 동의하는 것 같은데 연맹을 정식으로 선언하겠습니다.”

뇌옥책은 각각의 세력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선언하며 모인 이들을 훑었다.

그 눈빛을 받은 사람들은 가슴이 서늘해져서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제 결정권자를 정하겠습니다. 뇌 부장문인의 실력이 가장 강하니 맹주로, 그다음 가는 소 선자를 부 맹주로 하는 것에 다들 동의하십니까?”

이야기는 물 흐르듯 진행됐고, 천수종 등 다른 종문들은 눈빛을 교환하고 묵인했다.

이렇게 되자 다른 이들은 더더욱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다들 저를 믿어주시니 맹주 직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첫 번째 규정은 절대 일행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따를 수 있겠나?”

“맹주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뇌옥책의 물음에 지극히 당연한 규정이라 다들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좋다, 바로 출발해 태세부를 샅샅이 수색한다!”

뇌옥책은 장포 자락을 펄럭이며 먼저 앞서고, 다른 이들은 한립이 폐관 수련을 하던 궁전 쪽으로 다가갔다.

금빛 빛기둥이 그 대전에서 솟아오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경거망동을 말라!”

문중은 궁전을 보고 흥분해 날아들려는 이들을 향해 외쳤다.

“중문, 근류, 청수곡 곡주, 묵향루 루주는 각각 수사들을 데리고 내부를 수색하세요.”

뇌옥책의 명이 떨어지자 중문을 포함한 네 사람이 먼저 움직였다. 다른 이들도 따라붙고 싶었지만 연맹을 맺기로 했으니 별수 없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돌아온 중문 등의 표정이 어두웠다.

“맹주, 궁전 안의 물건은 누군가 이미 챙겨 사라지고, 전투 흔적도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비경에 들어온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문중이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확실한 겁니까?”

뇌옥책도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합니다.”

“이미 다녀간 사람이 있을 지도요. 어찌 되었든 계속 가봅시다.”

비경은 상당히 넓어 누군가 운 좋게 먼저 들어왔어도 이곳을 빠짐없이 탐색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문중, 근류 수사는 여기 모인 이들을 20부대로 나누어 인근을 수색하게 하고 반나절 후에 다시 모이는 것으로 하지요.”

뇌옥책이 분부를 내렸다.

* * *

같은 시각 비경의 다른 곳.

안개가 낀 구릉지대에 은은한 약초 향기가 가득했다.

총 3개의 층으로 된 언덕은 수백 장 규모의 영약밭을 이루고 각양각색의 선초들을 품고 있었다.

한립은 은색 빛의 문 앞에 서서 원숭이 괴뢰들이 영초를 수확해 가지런히 화지동천으로 옮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인님, 백만 년 이상 된 것들은 밭에 옮겨 심었고, 나머지도 전부 수확해서 옮겨두었어요.”

곁으로 다가온 제혼이 말했다.

“이제 영약밭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겠구나. 얼마나 남았지?”

“남은 공간이 거의 없이 꽉 찼어요…….”

“영약들을 최소한의 간격만 두고 심어 두었으니 새로운 밭을 개간해서 옮겨 심어 주지 않으면 약효에 영향이 가겠어.”

고개를 끄덕이던 한립이 문득 고공을 살폈다.

“왜 그러세요?”

“누군가 이미 비경 안으로 들어왔구나. 고전적인 수지만 그 방법을 써야겠어.”

“네? 어떤 수요?”

“이곳은 꼭두각시들에게 맡기고 우선 구엽빙초(九葉氷草), 천양동화(天陽桐華) 그리고 종령초(鍾靈草)만 신경 써서 밭으로 옮겨 심거라. 오래되지 않은 것이라도 단 한 뿌리도 놓쳐서는 안 돼.”

한립은 제혼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구엽빙초와 천양동화는 여러 도단에 쓰이는 재료라 이해가 되는데 종령초는 그리 진귀한 영초도 아닌데 어디다 쓰시려고요?”

“종령초가 진귀하지는 않아도 성장을 촉진하는 작용을 해서 구엽빙초 곁에서 기르면 구엽빙염초(九葉氷焰草)를, 천양동화 곁에 기르면 천양화동화(天陽火桐華)라는 변이종을 거둘 수 있다.”

“그랬군요! 그런 효과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고개를 끄덕인 제혼이 돌아서 가려는데 한립이 그녀를 불렀다.

“정염불새는 어디 있느냐?”

“자양루에서 구양화단 한 알을 먹고 속이 불편했는지, 연꽃 연못 옆 죽루에 숨어 안 나오네요.”

제혼이 웃으며 하는 말에 한립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칠채화단사를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구양화단까지 삼킨단 말인가?’

한립은 강한 의지를 보이던 은염 소인을 떠올리고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 정염불새도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서 그와 붙더라도 제압은 할 수 있겠지만 골치가 아플 터였다.

한립은 곧장 날아올라 약재밭을 살펴보았다.

영초 대부분은 거의 수확을 마쳤고, 남은 것은 백 만년이 못 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약재밭 외곽에 금이 가 있고 균열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조사 결과 약재밭 전체가 한 뼘 정도 내려앉아 비경의 주변 땅과 분리가 되어 있었다.

땅으로 내려선 한립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두 손으로 균열 틈으로 쑥 집어넣어 푸른 빛을 방출했다.

쿠쿵.

그의 두 손에 밭이 누런 천이라도 되는 것처럼 떨어져 나왔다.

화지동천 안에서 원숭이 괴뢰들을 부려 영초를 심고 있던 제혼이 은색 빛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립과 밭을 보고 실소했다.

“이럴 거면 진작 그냥 다 옮기시지!”

한립은 제혼의 중얼거림을 들었지만 화지동천 안의 공간도 제한적이라 언덕 전체를 옮길 수도 없었고 시간도 부족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궁전들에서 찾아낸 보물과 법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화지동천으로 옮겨 두었던 것이다.

보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3층 누각까지 통째로 뽑아 화지동천 약재원 인근에 ‘장약루(藏藥樓)’루라 이름 지은 약재 보관용 죽루 옆에 놔두었다.

“제혼, 저 밭은 그냥 옮겨 둔 것뿐이라 앞으로 동천 내의 지맥을 연결하고 영액을 충분히 뿌려주어야 제대로 영초들이 자랄 것이다.”

한립은 제혼을 스쳐 지나며 당부했다.

“제게 맡겨 주세요!”

그는 제혼이 힘차게 답하는 것을 듣고는 화지동천을 빠져나와 빛의 문을 닫고 선부 비경 깊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이들보다 앞서가고 있다지만 가면 갈수록 금제가 첩첩산중이라 빠르게 이동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

잠시 후, 미간을 좁힌 그는 선령력 파동을 억누르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능소문, 열광성, 청소곡의 종문 사람들이 도착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내려서자 능소문의 넙데데한 얼굴 사내가 손을 들어 모두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천수종, 통천검파 같은 대종문이 개입했으니 우리끼리라도 힘을 합쳐야 비경 안에서 보물을 찾아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우활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열양성 장로가 미간을 좁혔다.

“양 장로, 일단 저기 영약원부터 공동으로 차지해 다른 종문이 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넙데데한 얼굴의 우활해가 답했다.

“오랜 세월 봉쇄되어 있던 비경이라 영초들도 엄청날 텐데 어떻게 나눌 생각입니까?”

청소곡의 잘생긴 청의 사내가 물었다.

“부 곡주, 딱 봐도 언덕이 3층으로 되어 있으니 각각 한 층씩 고르면 되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우활해의 말에 양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종문은 협의를 마치고 영약원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열양성 양 장로가 화가 나 길길이 날뛰었다. 이어서 청소곡 부 곡주도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 여길 먼저!”

마지막으로 가장 울분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개자식이, 밭을 통째로 파 가버려?”

우활해의 노호성을 들은 나머지 종문들은 자신들이 고른 밭을 살폈다.

오래된 영약들은 수확했어도 아직 수만 년에서 십만 년 된 귀한 영초들이 남아 있었다.

우활해는 아직 흙이 마르지 않은 것을 보고는, 밭을 파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주위를 수색했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세 종문의 수사들은 처량하게 남은 풀뿌리들을 골라 담느라 쉴 새 없이 허리를 굽혔다.

“여기서 이렇게 떠들어봐야 소용없겠지요. 황풍문과 묵향루 사람들이 어느 건물로 몰려가던데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서두르면 늦지 않게 갈 수 있을 거예요.”

우활해가 화를 억누르고 말했다.

“그러면 그들과 충돌이 있을 텐데…….”

부 곡주는 망설여지는 얼굴이었다.

“황풍문, 묵향루가 천수종 같은 거대 세력도 아니고. 그들을 두려워하는 겝니까?”

양 장로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 같이 가기로 한 겁니다? 우리에게 보물 일부를 나눠주겠다고 나오면 평화롭게 해결되는 것이고, 나눠주지 못하겠다고 하면 충돌이든 뭐든 해야지요.”

우활해는 싸늘하게 말했다.

상의를 마친 세 사람은 곧바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가는 도중 황풍문, 묵향루 무리가 반대로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리 좋지 않은 표정의 백운산장과 망우각 인물들도 보여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 거기도 벌써 털린 겁니까?”

우활해가 머뭇거리다 상대를 떠보았다.

“그렇다면 그쪽도…….”

황풍문 회색 머리 노부인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영약밭이 아주 초토화가 되었더군요…….”

우활해는 이를 갈았다.

“저희가 갔던 건물도 누군가 거의 분해를 해두었습니다.”

서로 각자의 상황을 파악하고 정체 모를 ‘누군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과 수백 리 떨어져 있던 한립은 순간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느낌에 코를 문질렀다.

여러 곳에서 기운이 느껴지는 게 적잖은 이들이 비경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게 분명했다. 계속 앞서서 탐색하다 따라잡히면 신분을 들키고 기마자 등 선궁 사람들을 불러들여 죽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물러서기에는 은은하게 느껴지는 시간법칙이 걸렸다.

한참 고민을 하던 한립은 절충안을 생각해냈다.

결심이 선 그는 윤회전 붉은 가면을 꺼내 얼굴에 쓰고 눈 사이가 멀고 눈꼬리는 축 늘어져 어눌해 보이는 중년인으로 변신했다.

이어서 선령력을 쓸 것도 없이 몸에서 으득으득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작고 두툼한 몸을 지닌 농사꾼 같은 체형으로 변했다.

용모가 싹 달라진 그는 수행도 금선 초기 정도로 감추었다.

* * *

반 각 후, 숲속 오솔길이 한 무리로 인해 떠들썩해졌다.

그 맨 앞에 능소문 우활해, 열양성 양 장로 그리고 청소곡 부 곡주가 서 있었다.

“그 쳐죽일 놈을 만나기만 하면 그냥! 사지를 뜯어서 살을 발라줄 겁니다. 여태껏 살면서 이리 좀스러운 놈은 또 처음이에요!”

아직 노기를 가라앉히지 못한 양 장로가 콧수염을 날리며 씩씩거렸다.

“진정하세요, 양 장로. 다들 보는 앞에서 비경의 금제를 열고 함께 들어 온 데다, 천수종과 통천검파에 의해 나뉘어 각기 다른 구역을 수색하는데 누가 먼저 영초와 보물들을 쓸어간 게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우활해가 나지막이 운을 띄웠다.

“이상하지요. 수사의 말씀은 그들이 남몰래 무슨 수를 낸 거란 뜻입니까?”

“보물을 앞에 두었는데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무슨 맹주를 뽑는답시고 우리를 세워두고 먼저 수하들을 풀었을 수도 있지요.”

침음하던 부 곡주도 입을 열었다.

“그래도 비경을 뒤져보기는 해야 할 텐데 그들이 무슨 짓을 더 꾸밀지 모르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수사들 틈에서 우활해가 입을 열었다.

양 장로와 부 곡주는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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