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5화. 기이한 현상
*
비경 안,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지진이 일고 회색 안개가 빠르게 후퇴하는 것을 반복하며 거의 두 배로 커진 비경은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각들과 숲을 둘러싼 좌우로 높은 금색 산봉우리들이 하늘까지 솟아 자연의 벽에 가로막힌 깊은 협곡 지형이 되었다.
특이한 점은 물 항아리 굵기의 회색 사슬들이 회색 안개에서 산 아래쪽으로 폭포처럼 늘어져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사슬들이 품은 회색 뇌전의 힘은 무척 놀라웠다.
산 아래로 이동한 한립은 그중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뱀 같은 회색 뇌전이 튀어나와 그에게 떨어지자 윽, 하고 물러난 그가 새까맣게 탔다.
선령력을 운용해 몸을 회복한 한립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은색 뇌전은 그의 몸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다시 높게 떠오른 그는 두 산맥이 이어진 협곡 깊은 곳에서 아직도 회색 안개가 물러서며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 * *
그 시각, 청사요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수사만 수만 명에 달했다.
각각의 세력들은 진영을 세웠고 홀로 다니는 이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빛기둥에서 가장 가까운 구역은 딱 보기에도 있어 보이는 종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회색 머리 노부인 일행은 진작 내려섰던 산봉우리를 빼앗기고 뒤로 밀려나 있었는데, 누런 얼굴의 중년 사내와 요염하게 생긴 여인 그리고 백발노인 세 사람의 진선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누런 얼굴 중년인이 가장 수행이 높은 금선 후기로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영소문, 망우각, 열광성, 흑향루, 청소곡, 능월관, 백운산장! 금원산맥에 내로라하는 세력들은 다 모였군요. 우리 자리까지 빼앗고요!”
회색 머리 노인이 중심부 세력들을 훑다 능월관 사람들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들의 자리를 빼앗은 게 바로 능월관 사람들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태을경 고수들이 있는 곳과 우리 황풍문이 자리를 두고 겨룰 수도 없고.”
황안(黃顔) 사내가 한숨을 쉬었다.
“조사에 따르면 비경 혹은 선부가 나타난 조짐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그곳에 들어가 보물을 찾는 건 세력보다는 각자의 운이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요염한 중년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통천검파와 천수종은 이곳에서 거리가 멀어 아직 못 왔다고 쳐도 선궁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때 백발노인이 주름진 얼굴로 의문을 제기했다.
“연석 형은 출관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모르셨군요. 백 년 전에 누군가 홀로 금원선궁에 쳐들어가 궁주 동방백과 천음오자 그리고 수많은 고수를 도륙한 뒤로 선궁 세력이 예전만 못합니다. 이상하게 천궁 쪽에서도 대신할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요.”
회색 머리 노부인이 백발노인에게 사정을 일러주었다.
“그런 일이! 동방백이면 태을경 최고봉, 아니 거의 대라경에 맞먹던 존재가 아닙니까? 대체 누구의 소행입니까? 윤회전입니까?”
“주선방에는 ‘한립’이 벌인 일이라고 적혀 있다네요. 윤회전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천정이 생긴 이래 이런 일은 처음 아니겠어요? 천정에서 추살령을 내려놓기는 했는데 여태껏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이미 금원선역을 떠났을지도 모르지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풍문 무리 근처에 사내와 여인이 서 있었다.
묘령의 소녀는 무척 예쁘게 생겼고 사내는 마르고 얼굴이 창백해 힘이 없어 보였는데 둘 다 검은 장포를 입고 있었다.
“한 형, 못 본 사이 참으로 많은 놀라움을 선사하십니다.”
묘령 여인이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의 임무를 잊지 마세요.”
곁의 흑포 청년이 미간을 좁히고 전음을 보냈다.
“걱정하지 말아요.”
소녀가 손을 내저었다.
그때 남색 둔광들이 물기를 가득 머금고 날아들었다. 둔광이 사라진 허공에는 네 명의 태을경 존재가 서 있었다.
“천수종! 저들도 올 줄이야.”
황풍문 황안 사내의 안색이 달라졌고, 다른 이들도 놀란 얼굴이었다.
천수종 네 사람은 다른 이들은 안중에 없이 금색 빛기둥으로 다가갔다.
그들 중 스무 살 초반의 꽃 같은 얼굴을 지닌 절색의 미녀와 눈꼬리가 길고 매부리코를 지닌 살기등등한 인상의 중년인이 앞서고 있었고, 짙은 눈썹의 건장한 사내와 접선을 들고 고상하게 생긴 청년이 뒤를 따랐다.
영소문 등 가장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종문들이 그들을 위해 길을 터주어 공간을 만들어냈다.
“소안천 선자, 근류 수사, 탕호(宕湖)에서 헤어지고 이제야 뵙게 됩니다. 이런 천기 현상에 두 분도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영소문에서 넙데데한 얼굴을 지닌 사내가 걸어 나와 싸늘한 얼굴의 절색의 여인과 중년 사내에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영소문은 와도 되고, 우린 오면 안 된단 말입니까?”
류근이 곧장 냉랭히 반문했다.
“그 무슨 말씀을, 천수종이 워낙 이곳에서 멀다 보니까 웬일로 여기까지 다 오셨구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혹시 저게 무엇인지 들은 바가 있으십니까?”
넙데데한 얼굴의 사내가 정보를 캐내려는 것을 보고 망우각 열광성 등 세력도 귀를 기울였다.
“우리 둘은 인근에서 일을 보다 천기현상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들린 겁니다. 청소곡이 여기서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아는데 아는 바가 없으십니까?”
시선이 몰려 근류가 인상을 찌푸리자 소안천이 나서서 청의 수사들을 쳐다보았다.
“청소곡 구역과 가깝기는 하지만 여기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외진 곳이라 저희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저곳은 청사요라는 땅이라는데 범인들의 말을 들으니 그곳 백수곡에 몸을 담그면 반로환동하는 샘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청소곡 무리에서 영준하게 생긴 사내가 걸어 나와 모두의 의심을 풀기 위해 설명했다.
“반로환동을 하게 해주는 샘물이라, 혹시 시간법칙과 연관이 있는 거 아닐까요? 전설 속의 광음의 물이라던지.”
소안천이 놀라 이런 추측을 했다.
“광음의 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이런 외진 곳에 있겠습니까. 멍청한 범인들의 말을 어찌 믿는다고요.”
근류가 고개를 젓자 그를 힐끔 본 소안천이 입을 다물었다.
“하하, 다들 빠르기도 하십니다. 제가 한참 늦었어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다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고공에서 금색 태양이 내려오는 것 같은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뇌옥책, 아주 위풍당당하십니다.”
근류가 차갑게 웃으며 소매를 펄럭여 남색 물빛을 퍼트렸다.
“호오, 근 수사의 <창해신결>이 더 절묘해졌습니다.”
허공에서 금빛이 사라지고 두 사람이 내려왔다.
금색 장포를 입은 체구가 좋은 사내는 의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 때문에 맹수 같은 기세가 느껴지는데 반에, 잘생긴 청년은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통천검파의 뇌 수사와 문 수사셨군요. 오랜만입니다.”
영소문의 넙데데한 얼굴 사내와 청소곡 청의 사내 등이 분분히 인사를 올렸다.
천수종 네 사람이 등장했을 때보다 더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저희도 인근에서 일을 보다가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비경이 나타났으면 당연히 그 안의 보물은 운 좋은 사람이 가져야지 종문 하나가 독점해서야 되겠습니까.”
잘생긴 청년이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뇌 수사, 문 수사의 뜻이 저희의 뜻입니다.”
그 말에 다른 종문 사람들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걸 보고 있던 천수종 사람들은 표정이 안 좋아졌지만 딱히 나서서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소 선자, 이거 정말 오랜만 아닙니까. 여러 번 찾아갔지만 <태음빙혼도>를 수련 중이라는 말에 뵙지를 못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뵙는군요. 태을 후기에 이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소안천을 응시하는 뇌옥책의 눈빛에 깊은 정이 어려 있었는데 소안천은 허, 하고 어이없다는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른 이들은 익숙한지 그들의 모습에 놀라지도 않았다.
통천검파의 뇌옥책이 천수종 소안천을 연모해서 수십만 년 동안 쫓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는 금원대륙 전역에 파다한 내용이었다.
“실력이 쓸만하네요. 통천검파는 또 뭐죠?”
황풍문 인근의 묘령 소녀가 눈썹을 끌어올리고 전음으로 물었다.
“금원선역 제1일의 종문이고 금원선궁 못지않은 세력을 일구고 있는 게 통천검파입니다. 뇌옥책은 통천검파 부장문인으로 금원선역 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이고, 저기 잘생긴 청년은 통천검파 집검장로 문중인데 얕볼 수 없는 실력자입니다. 저들은 물론 천수종의 소안천, 근류도 강적이라고 미리 자료를 드렸는데 전혀 읽지 않으신 겁니까? 이제 당신이 이 일을 맡아도 되는 건지 정말 의심이 드는군요.”
곁의 흑포 청년의 인상이 구겨졌다.
“트집 잡지 말고 잘 봐요. 금원선역이나 주름잡는 저들이 무슨 강적이라고. 우리의 진정한 적은 저들이에요.”
묘령 소녀는 화내는 기색 없이 눈짓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남색 둔광 두 개가 멀리서 날아들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수시로 사람들이 오가는 중이라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각진 얼굴에 짙은 눈썹의 사내와 동그란 얼굴에 앵두 같은 입술을 지닌 평범한 여인이 인근 산으로 내려섰다.
“누굽니까?”
묘령 소녀는 말없이 하얀 구슬을 꺼내 그것을 통해 두 사람을 보게 했다.
사내는 백면서생 느낌이 나는 청년이었고, 여인은 쾌활하고 귀여운 인상을 지닌 열일고여덟 살 소녀였다.
“금한선궁 남 씨 오누이, 남원자와 남안! 저들이 어떻게, 설마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고?”
“모르죠. 겉으로는 금한선궁의 명을 받는 것 같아도 사실상 구원관의 그림자 호위라 저들이 나타났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니긴 하네요.”
놀란 청년의 말에 바로 하얀 구슬을 치운 묘령 소녀가 전음으로 답했다.
“진작 남들이 몰라야 하는 더러운 일들을 처리하는 영위(影衛)에 대해서는 들어 봤습니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왜 왔는지 모르니 상황 봐가면서 해야죠.”
그들은 몇 마디를 더 나누다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렇게 북적거릴 줄은 몰랐는데요? 이번 일은 재미있겠어요.”
남안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웃음 지었다.
“비경이 나타나면 파리 떼가 꼬이는 법이지.”
남원자가 하찮다는 눈빛으로 다른 이들을 깔보았다.
“오라버니, 우리도 비경이 나타났다는 말에 온 거잖아요. 뭐, 목적은 다르지만 그렇게 말하면 우리도 파리 떼 중 하나가 되는 거라고요.”
“잇, 다시 그리 말대꾸를 하면 다음 임무에는 널 데리고 오지 않을 것이다!”
누이의 불평에 남원자가 말문이 막혔다가 괜히 성질을 부렸다.
“자기가 이상하게 말해놓고 나만 뭐라고 해.”
“됐으니, 장난은 그만하고 이제 할 일을 해야겠지.”
“그래서 한립이 이 중에 있을 거라고요? 그런 큰 죄를 지어놓고 숨지는 못할망정.”
정색한 오라비를 보고 남안도 웃음기를 빼고 진지하게 말했다.
“보통사람이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그자는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 반대로 움직였을 수도 있다. 선궁의 조사에 따르면 이곳으로 향한 건 확실하니 이런 큰일이 생겼는데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지.”
“알겠어요. 무슨 일이든 진짜 재미없게 이야기한다니까.”
남원자는 남안의 말에 대꾸 없이 손바닥 크기의 거울을 꺼내 들고 주문을 외웠다.
구슬에서 환영이 퍼져 나와 허공으로 스며들었고 남원자는 주저 없이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거야. 오라버니, 같이 가요!”
남안이 그런 그를 서둘러 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