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4화. 불새
*
죽이려면 죽이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지만 화지동천에 두고 영약밭을 지키는 영수로 삼으면 좋을 것 같아 봐주는 중이었다.
화아앗!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금속수들이 갑자기 서로의 꼬리를 말더니 눈부신 빛 속에서 한 마리의 거대 호랑이로 합쳐졌다.
크앙!
거대 금속수가 포효하며 달려들었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오채화지 안에서 불길이 꿈틀거리더니 거대한 불새가 날아올라 은색 부리로 금속수를 쪼아버린 것이다.
“잠깐…….”
한립이 입을 떼자마자 두 동강이 나버린 금속수는 그대로 불새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리려 손을 들어 올리려던 한립이 허탈하게 입을 다물자 불새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됐다, 됐어. 흰둥이가 돌아오면 그 아이에게 시켜도 되니까.”
어색하게 웃음 지은 한립은 진령혈맥을 거두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거대 불새도 몸집을 줄여 그에게 날아들었다.
한립은 작은 새의 날개를 들어 올려 노란색, 녹색, 파란색, 남색 네 개의 구슬을 찾아냈다.
“칠채화단사.”
예상은 했지만 많은 수량에 조금 놀라웠다.
불새가 부리를 뻐끔거리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도 한립은 말뜻을 이해했다.
“붉은 건 네가 이미 먹었단 말이지?”
불새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잘했다. 칠채화단사를 전부 흡수할 수 있다면 훨씬 강해질 수 있을 것이야.”
한립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밝게 웃음 지었다.
흥분한 불새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진짜 연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여기서 화단사(火丹砂)를 소화하고 있거라. 난 다른 곳을 살피고 있을 테니.”
한립은 정염 불새를 오색화지에 놔두고 지하 동굴을 나와 지면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 금색 대전이 나왔는데, 들어가 보니 복잡한 환형 무늬들이 새겨진 동그란 백옥 방석 세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재미있는데…….”
방석을 들여다본 한립은 일순 어지러움을 느끼다 정신을 차렸다.
웃음을 흘린 그가 방석을 들어 올리려다 바닥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뗐다.
잠시 그곳에 머물던 한립은 대전을 지나 멀리 금색 건물들이 보이는 백석 광장에 이르렀다.
“선부 주인이 누구였는지.”
작은 비경 안에 마련된 금색 건물들은 누군가의 선부(仙府)였고, 주인은 정취가 넘치는지 속세의 시와 문장을 포함한 수많은 경전을 모아두고 있었다.
이런저런 방들을 구경하던 그는 큰 기대 없이 마지막 건물로 들어갔는데 연단실로 보이는 곳에서 뜻밖의 수확을 거둬들였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어.”
크고 작은 병들이 가득 놓인 나무 찬장 사이로 허리까지 오는 연단로가 놓여 있었다.
찬장의 병에는 금선 수사에게 적합한 용림단(龍林丹)부터 태을경 수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영해단(靈海丹)까지 다양한 단약들이 들어 있어서 한립은 하나씩 확인하며 그것들을 챙겨두었다.
“저건 뭐지?”
그러다 그의 시선이 불길이 싸늘하게 식은 연단로로 향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자 연단로 뚜껑이 들썩이고 그 안에서 금빛이 새어 나왔다.
짙은 시간법칙 파동을 감지한 한립은 직접 몸을 굽혀 연단로 안의 용 눈알만 한 단약 10개를 확인했다.
‘약성이 아주 강했건만 아직 완성되지 못했어. 무엇이 급해 성공을 앞두고 자리를 뜬 것이지?’
침음하던 그는 잠시 고민하다 뚜껑을 다시 덮어 두었다.
막 정염불새를 불러내 연단을 돕게 하려던 한립은 불새가 칠채화단사를 소화하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웃으며 원영의 불길을 일으켰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화로와 함께 49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류화영지(流火靈芝)를 주재료로 만든 단약이었다니. 그러니 시간법칙이 그리 농염했지.”
원영의 불길을 거둔 한립이 뚜껑을 치우자 자욱한 김이 올라왔다.
10개 중 3개는 갈라져 실패했지만 7개는 영롱한 광택을 지닌 7품 도단이었다.
이걸 가지고 대오행환세결을 수련하면 효과가 클 터였다!
별다른 고생도 하지 않고 도단 7개를 얻은 한립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옥병을 꺼내 단약을 담았다.
옥병을 거두고 그곳을 나선 한립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은색 빛의 문을 열어 제혼을 불러냈다.
“주인님, 여기는…….”
“정체 모를 선부 비경 안이다. 바깥보다는 안전할 테니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실력을 쌓을 생각이다.”
“금원선궁 궁주까지 죽였으니 선역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거예요. 천궁도 그걸 생각해 절대 가만있지 않을 테고, 기마자 같은 대라급 존재가 더 나타날지도 모르죠. 주인님은 안심하고 수련하세요. 제가 호법을 설게요.”
“저곳이 비경의 입구이다. 선부 자체에 이미 금제가 펼쳐져 있어 입구만 잘 지키면 될 것이야.”
한립은 손을 들어 고공의 구름 속에 숨겨진 작은 균열을 가리켰다.
“네! 저기 광장에서 수련하면서 문을 잘 지켜볼게요.”
“그러고 보니 너도 기운이 강해진 것 같은데.”
“맞아요, 긴 잠에서 깨어난 후에 몸속에 미약하게 느껴졌던 법칙의 힘이 나날이 커지고 있어요. 이에 맞춰 매일 배고픔이 강해지지만요.”
“배가 고프다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고, 귀물들을 잔뜩 잡아먹고 나서야 조금 허기가 가셔요. 나중에 귀도 수사들을 만나면 시험해 봐야겠어요.”
한립의 의아한 얼굴에 제혼이 답했다.
“그래, 난 저기 대전에 들어가 수련할 테니 이후의 일은 네가 맡기마.”
한립과 제혼은 화원을 지나 각자 대전과 그 앞의 광장으로 향했다.
* * *
3백 년 뒤, 선부 비경의 백옥 광장.
흑의 소녀가 땡볕에 앉아 고공의 공간균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은색 소인(小人)이 앉아 있었는데, 몸에는 은색 화염을 두르고 머리 위로 일곱 빛깔 화염들을 흩날려서 일곱 색깔 머리카락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흑의 소녀는 제혼이고, 그녀의 어깨에 앉은 조그만 녀석은 정염불새였다.
칠채화단사를 완전히 소화시키자 사람의 형상으로 변할 때 키도 커지고 일곱 빛깔 화염 머리카락도 생겼다.
“소정아, 너도 주인님이 어서 나오셨으면 좋겠어?”
제혼이 정염불새의 감정을 읽고 웃음 지었다.
소녀에게 ‘소정’이라 불린 정염불새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칠색 화염 줄기들이 팔랑였다.
칠채화단사를 삼킨 정염불새의 위력은 제혼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칠색 화염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해서 비경의 숲을 홀랑 태워버릴 뻔할 것을 제혼이 제때 나서 건물 쪽까지 번지지 않게 막았지만 백옥 광장 반쪽은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이때 광장이 부르르 떨리고 비경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을 반짝인 제혼이 날아오르자 넋 놓고 있던 정염불새가 어깨에서 미끄러질 뻔하다 자세를 고쳐잡았다.
숲 주변의 회색 안개가 밀려나면서 비경이 조금씩 확장되고 있었다.
“이번 달만 벌써 세 번째야.”
십여 초 뒤 진동이 사라지고 회색 안개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혼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립이 폐관 중인 금색 대전을 내려다보았다.
한립은 80년 전 태을경 후기에 이르렀음에도 출관하지 않고 계속 수련을 하고 있었다.
* * *
그날 밤, 금색 대전에 광채가 줄줄 흐르고 내부에 반투명한 금색 꽃봉오리가 맺혔다.
그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의 피부는 백옥처럼 투명해서 금색 골격과 혈관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금빛을 반짝이는 선규의 수도 359곳이나 되었고, 태을경 최고봉에 이르렀다.
그의 아래에는 백옥 방석 3개가 놓여 있었고 환형 무늬들이 퍽 어둑해져 시간법칙의 힘을 거의 소진한 것 같았다.
그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고 눈을 뜨니 눈동자부터 손가락 세 마디 길이의 금빛이 길게 새어 나왔다.
후우.
하얀 안개를 토해낸 그는 태을옥선의 몸이 완벽해진 것을 느꼈다.
“여기까지가 한계로구나. 단번에 대라경에 이르는 것은 무리였단 말인가.”
한립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 같아 헛웃음을 지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태을경 후기가 되고 또 태을경 최고봉에 이른 것만도 남들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허리를 펴고 대전을 나가려는데 귓가에 착,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백옥 방석이 금이 가면서 깨지는 소리였다.
이상한 일은 깨진 방석이 가루가 되더니 대전 곳곳으로 퍼지고 동시에 격렬한 진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립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빠르게 대전을 빠져나와 백석 광장에 떨어졌다.
“주인님, 뭔가 이상해요…….”
제혼이 정염불새를 데리고 날아들었다.
“내가 선부 비경의 비관을 건드려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구나.”
“그럼 어서 떠나요!”
“아쉽지만 그래야겠구나.”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는데, 수련에 매진하느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들이 몸을 날려 고공의 공간균열로 빠져나가려다 우뚝 멈춰 섰다.
비경의 출구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있었어요. 소정아, 너도 봤지?”
제혼이 깜짝 놀라 어깨 위의 은염 소인에게 물었다. 은염 소인이 칠색 화염을 나풀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비경에 변화가 생겨서겠지.”
한립도 진작 정염불새가 확 달라진 것을 보았지만 그걸 묻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맞다, 그간 열댓 번 지진이 있었고 가장 심했을 때가 주인님께서 후기 고비를 뛰어넘으실 때였어요. 이번 달에만 연달아 네 번째고 지진이 있을 때마다 안개가 주변으로 퍼져 공간이 넓어졌어요.”
“이상한 점을 찾지는 못했느냐?”
“처음에는 인근을 돌아봤는데 별다른 점은 찾지 못했고, 나중에는 지진이 빈번해져서 함부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광장을 지켰어요.”
제혼의 대답에 한립이 어찌 된 일인지 고심하고 있는데 대전에서 쿵, 하고 산만한 금색 빛기둥이 솟아 하늘까지 이어졌다.
그 후 점차 진동은 약해졌는데 대전에 다가가 조사해 보려고 하니 무형의 힘이 막아섰다.
“주인님, 왠지 땅바닥이 점점 치솟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제혼이 돌연 이렇게 물었고, 금빛을 주시하던 한립은 사방의 안개가 급격히 중앙으로 몰려들며 비경의 땅이 수축하는 것을 보았다.
* * *
선부 비경 바깥의 금원산맥 중부, 청사요.
땅이 흔들리면서 굉음이 퍼지고 있었다.
“지룡(地龍)이 꿈틀거린다!”
쿠쿠쿠…….
여랑촌 촌민들이 가가호호 뛰어나와 주변을 둘러보는데 백수곡 방향에서 거대한 금색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기적이다! 신선이 나타나실 징조야!”
누군가의 외침에 다들 앞다투어 바닥에 엎드려 금색 빛기둥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여량촌 뿐만 아니라 청사요 동남쪽에서도 8개의 둔광이 나타나 인근 고공에 멈춰 섰다.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금선경 노부인이 노란 용 지팡이를 들고 진선경의 젊은 남녀들을 이끌고 있었다.
비슷한 황토색 깃털 장포를 걸친 것이 다들 같은 종문 사람이었다.
“임 사숙님, 무슨 보물이나 비경이 나타날 조짐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어서 가봐야 합니다!”
하얀 피부를 지닌 사내가 흥분해 소리쳤다. 다른 젊은 제자들도 그러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다들 경거망동 말거라. 보물이 나타날 조짐이기는 하지만 천기현상의 정도로 보아 우리 몇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속히 종문으로 소식을 전해야 한다.”
노부인도 격동하기는 했지만 냉정히 판단을 내렸다.
그들은 분분히 전신 원반을 꺼내 소식을 전했는데, 또 다른 둔광 두 개가 나타나 비열하게 생긴 흑포 수사 둘로 변했다.
둘 다 금선 수사였다.
“흑살종!”
노부인 뒤의 청년이 낮게 중얼거렸다.
“저들은 신경 쓰지 말고 다들 저곳으로 가자.”
그들을 힐끗 본 회색 머리 노부인이 무리를 이끌고 인근의 산봉우리로 내려갔다.
두 흑포인들도 노부인 일행을 살피고 다른 산봉우리로 내려가 전신 법기를 꺼내 들었다.
금원산맥 곳곳에서 이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름이 지났지만 금색 빛기둥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기세가 더 강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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