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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33화 (1,790/2,000)

2033화. 금속수(金屬獸)

*

촌민들은 걸음을 서둘렀지만 백수곡에 이르자 달이 중천에 뜬 자시(子時)가 되었다.

주변을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감싸고 있고, 부드러운 달빛이 내리쬐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백수곡에 이른 촌민들은 숙연한 얼굴로 징과 북을 치는 것 외에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립은 골짜기 안쪽 거대한 바위 두 개가 가까이 붙어서서 공간을 만들고 그 아래로 샘물이 고여 맑은 호수를 이룬 것을 보았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슬쩍 손가락을 까딱인 그는 호수의 물을 가져와 살펴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분명 골짜기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시간법칙 파동이 느껴졌는데 샘물은 아주 평범했다.

그가 의아해하는 동안 촌장은 사람들에게 명을 내려 노인들을 수레에서 내리고 조심스럽게 호수로 옮겼다.

노인들은 가부좌를 튼 상태로 가슴까지 오는 얕은 호숫물에 들어갔다.

촌장은 다른 촌민들을 데리고 삼배를 올린 후 골짜기에서 빠져나와 마을로 돌아갔고, 한립도 같이 돌아와 인사를 하고 자신의 초옥으로 돌아갔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백수곡으로 돌아왔다.

골짜기로 돌아간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샘물 주변 절벽의 기암괴석들에 금전문을 닮은 주술문자들이 가득했는데 하나같이 온전하지 못해 진작 힘을 잃은 듯했다.

“이곳을 지날 때 희미하게 시간법칙 파동을 느꼈던 게 우연이 아니었어. 이렇게 망가졌는데도 아직 효과를 발휘하다니.”

바위의 주술문자들이 지닌 은닉 효과에 감탄하던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이곳이야말로 그가 몸을 숨길 최적의 방법이 아니던가!’

이런 생각을 한 그는 백수곡을 샅샅이 뒤져가며 바위의 주술문자들을 볼 때마다 손을 들어 허공에 베꼈다.

해가 뜰 무렵이 되자 이마에 땀방울이 가득해진 그는 깨끗한 바위에 올라가 주저앉았다.

지난밤 남아 있는 주술문자들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복원해보기도 하고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돌멩이에서 나머지 부분을 찾아내기도 했다.

고생 끝에 진법 수리를 마치자 골짜기 안에 짙은 안개가 차오르면서 외부에서는 아예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고공으로 올라가 의식을 퍼트려 직접 수색을 해보았지만 시간법칙 파동은 티끌만큼도 감지되지 않았다.

골짜기로 돌아간 그는 안쪽의 샘물로 걸어갔다.

사람 모양을 이루는 바위 사이에 있는 샘물에서 하얀 안개가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샘물이 모인 호수에 앉아 있던 노인들은 눈알이 푹 튀어나오고 전신의 피부가 잿빛으로 말라붙어 숨이 끊긴 지 오래였다.

“너희는 운이 좋지 못했구나…….”

한립은 탄식하며 손을 뻗어 호수에 담가보았다. 청량한 샘물에서는 어떤 이상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음?”

찬찬히 샘물 깊은 곳을 살피던 그는 뭔가 따뜻한 기류를 느끼고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따뜻한 물줄기는 주변의 샘물과 달리 약간 미끈거리는 것 같았고 시간법칙의 힘이 작용해 손등의 잔털들이 급격히 자라났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손을 거둔 한립이 웃음 지었다.

“시간 흐름을 가속시켰어. 이 아래 뭔가가 있구나.”

손을 저어 여덟 구의 백골 시체들을 한쪽으로 치운 그는 허리를 굽혀 샘물 바닥의 돌멩이들을 치웠다.

“의식으로도 감지가 안 된다라…….”

이번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한립은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양쪽의 두 바위를 보았다.

눈동자에 보랏빛을 밝힌 그는 바위 안쪽에서 주술문자들을 발견했다.

바위에 둥근 고리 형태의 주술문자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저건…….’

고리형 주술문자 안에서 바위 깊은 곳으로 금색 광채가 흘러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을 본 한립은 붕, 떠올라 두 손을 그 위에 가져다 대었다.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해 손바닥에 금빛을 일으키니 고리형 주술문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좌우 반대 방향으로 휘어졌다.

우웅!

고리형 주술문자에 밝은 빛이 들어오고 시간 가속이 몇 배가 되어 눈부신 빛의 장막이 두 바위 사이의 공간을 덮었다.

한발 앞서 바위를 벗어나 물러나 있던 한립은 머뭇거리다 앞으로 나섰다.

퐁.

그가 그 안으로 사라지고, 금색 빛의 장막이 사라진 샘물은 수심이 점점 얕아지다 해가 기울기 전에 말라붙었다.

이제 남은 것은 샘물 호숫가의 백골 시체들뿐이었다.

* * *

금원산맥 중부와 서부의 접경지대에 높은 산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손발이 유난히 크고 피부에 기괴한 문양이 새겨진 붉은 머리 사내가 발로 부서진 괴뢰를 짓밟았다.

여태껏 한립을 추격해온 기마자였다.

“벌써 136마리째다. 지난번에도 괴뢰에 정혈을 남겨 우리를 따돌리더니 똑같은 수법을 썼어. 괴뢰를 잡아도 정혈은 스스로 타 없어지니, 정말 허점을 드러내지 않는 놈이로구나. 웅산아, 한립은 원래 이리 교활한 자이더냐?”

기마자가 뒤에 선 청년을 돌아보았다.

한립이 이곳에 있었다면 낯설지만 익숙한 기운을 지닌 청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지난날 촉룡도에서 왕래하다 결국 그의 손에 죽은 웅산 부도주였다.

“원래 머리가 비상한 자입니다. 그걸 깨닫기까지 저도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고요. 이렇게 빨리 천정의 커다란 후환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조용히 잡아들이려 했건만 금원선궁에 쳐들어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동방백 그 멍청한 것까지 죽여 천정도 그를 주시하기 시작했을 것이야.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제는 선옥의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수색할 수도 있을 테니까.”

“대인, 금원선역 중부 쪽으로 달아난 것 같던데 그곳은 세력이 복잡해 수색이 어렵지 않을지요…….”

“천정도 그들을 참아준 지 오래다. 그깟 종문들이 불만을 드러낸다면 이참에 쓸어버리면 될 것이야. 허나 종문세가의 늙은이들이 얼마나 약아 빠졌는데 그런 눈치도 없겠더냐? 오히려 다들 화를 피하려고 앞다투어 수색을 강화하고 그들의 기반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한립 그자는 줄곧 어느 세력에 속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러 종문 세력이 견제하며 손에 넣지 못한 지역들을 위주로 수색하면 성과가 있을 겁니다.”

웅산의 제안에 기마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희미하기는 하지만 동남쪽에서 기운이 느껴졌다.”

기마자는 불꽃에 휘감긴 새빨간 베틀북을 불러내 웅산을 태우고 사라졌다.

* * *

금색 빛의 장막으로 들어선 순간, 한립은 강렬한 법칙의 힘에 붙들려 금실로 꽁꽁 묶였다.

눈만 굴려 아래쪽을 보니 무성한 수풀이 수백 리를 이어져 있었고, 그 끝은 짙은 회색 안개가 둘러싸고 있는 작은 비경이 있었다.

“엄청난 시간법칙의 힘!”

눈을 돌려 자신을 에워싼 금실들을 본 한립이 탄식했다.

마치 진언보륜으로 구속되었을 때와 느낌은 비슷했다. 사고는 느려지지 않고 오히려 감각만 예민해져서 날카로운 금실이 몸을 파고드는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흠칫 안색이 달라진 그는 숲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거대한 금색 신영 두 개가 거목들을 뚝뚝 부러뜨리면서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호랑이 2마리였는데, 짐승의 등 뒤로 작아 보이는 깃털 날개를 달고 있었다.

“금속수(金屬獸)?”

금속수는 한 짐승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금속 속성 원기가 응결해 만들어져 날고 기는 짐승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한립은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 달려드는 주변의 금실들과 모종의 균형을 이루어 수십 초 후에는 조금씩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금실이 수백 가닥이라 그 전에 호랑이 금속수들이 도달할 게 뻔했다.

크항!

두 마리 금속수들이 뛰어올라 각각 머리와 허리를 물어뜯으려 들었다.

한립이 거대한 입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맑은 지저귐 소리가 들리고 은색 불새가 몸에서 빠져나와 날개를 펼쳤다.

쾅! 쾅!

대량의 불똥이 튀고 금속수들은 은색 불새의 날개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하앙!

분노에 차 포효한 호랑이 금속수들이 다시 뛰어올라 정염불새의 날개를 물어뜯었다.

정염불새가 하늘 높이 솟구쳐 피했는데도 두 날개가 찢겨나갔고 금속수들은 불길이 뜨겁지도 않은지 으적으적 씹어 삼켰다.

그걸 본 한립은 깜짝 놀랐다.

정염불새의 은색 화염이 얼마나 강한데 그걸 씹어 삼킨단 말인가!

그가 전력으로 진언보륜을 역전해 몸을 감싼 금실을 벗겨내는 동안 날개 일부를 뜯긴 정염불새는 두려움 대신 분노로 활활 타오르며 맹렬히 하강했다.

운석처럼 떨어진 불새가 두 금속수를 이글이글 끓는 화염으로 감싸 금색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금속 속성의 원기로 이루어진 금속수들은 원기를 잃는 듯했다.

쾅!

은색 화염 속에서 뛰어다니던 금속수 두 마리가 느닷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부딪쳤다.

이에 금빛이 사방으로 튀고 충돌한 머리 사이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은색 화염을 갈랐다.

금속수들은 지체없이 갈라진 화염 사이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불길이 일어 다시 합쳐지려 했지만 금빛이 융합을 방해했다.

호랑이 금속수들은 정염불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네 발로 힘차게 뛰어올라 다시 한립을 향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이미 금실의 속박에서 벗어난 한립은 별빛 주먹을 쥐고 금속수들의 머리를 냅다 내리쳤다.

쿠궁쿵쿵!

금속수들은 뛰어오르던 것보다 더 빠르게 떨어져 바닥에 깊은 구멍을 남겼다.

한립은 아직 융합하지 못한 정염불새를 힐끗 보고 따라 내려와 금속수들이 구덩이를 기어 나오기 전에 주먹질을 퍼부었다.

퍽퍽퍽퍽.

잠시 후, 주먹을 거둔 한립은 바닥은 엉망이 되었지만 금속수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땅속으로 통로를 뚫어 달아난 것이었다.

“가자, 네 분풀이를 한 다음에 금빛을 제거해 원래대로 돌아가게 해주마.”

한립은 정염불새에게 의식연계로 말을 걸었다.

그러자 두 줄기의 화염들이 똑같이 생긴 은색 불새 두 마리로 변해 그의 어깨에 앉았다.

구덩이 바닥으로 뛰어든 한립은 가면 갈수록 뜨거워지는 공기와 흙에서 느껴지는 독 기운에 코를 찡그렸다.

갈림길로 이어지는 통로는 아주 매끈해서 금속수들이 급히 뚫은 게 아니라 이전부터 있던 것이었다.

통로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하하, 이번에 네가 포식을 하겠구나…….”

한립은 의식으로 통로를 살피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리저리 통로를 돌아 도착한 드넓은 지하 공간에 오색 화염 연못이 출렁이고 있었다.

붉은색, 녹색, 노란색, 푸른색, 남색의 화염들이 교차하며 타오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한립이 때려눕힌 금속수 두 마리는 그 화염 연못 옆에서 금색 광석을 파먹으며 원기를 보충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정염불새를 씹어 먹나 했더니 오채화지(五彩火池)의 열기를 품은 광석을 주식으로 삼았었군.”

웃음 짓는 한립 어깨 위에서 두 마리 은색 불새도 오채화지를 보고 신이나 통통 뛰었다.

“하하, 가보거라.”

한립의 명이 떨어지자 두 불새가 날개를 펴고 화염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그걸 본 금속수 두 마리가 급히 뛰어올라 막으려 했지만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번득 사라졌다.

“이놈들!”

두 손으로 금색 호랑이들의 꼬리를 잡은 그는 붕, 돌려 바닥에 메다꽂았다.

호되게 구른 금속수들은 재빨리 몸을 뒤집어 달려들었지만 진령혈맥을 일으켜 커다란 금색 거원으로 변신한 한립은 금속수들을 가지고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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