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2화. 이상한 샘
*
제혼이 양팔로 그를 꽉 끌어안고 있다가 그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괜찮으세요?”
“괜찮다. ……벌써 쫓아오는구나.”
한립은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별 것 아닌 재주로 내 시간을 허비하게 하는구나.”
멀리서 금빛이 사라지고 기마자가 튀어나와 웃음 짓고 있었다.
그가 든 검은 빛을 만발하는 짧은 손도끼에서 검은 천 같은 공격이 빠져나온 듯했다.
한립은 기마자의 눈빛에 속마음까지 꿰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급히 시간법칙을 운용해 전신을 뒤덮고 나서야 그런 묘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체 누구십니까? 처음 뵙는 분 같은데요.”
“열화, 치융이 네게 내 초상이라도 보여주지 않더냐? 본 좌는 ‘기마자’다. 들어본 이름일 테지? <대오행환세결>만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예? 그게 무엇입니까?”
한립은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네 놈은 치융이 전한 소식대로 고분고분하게 명에 따를 녀석이 아니구나. 솔직히 말하든 안 하든 상관없다. 추혼술을 하면 어차피 다 알게 될 터이니!”
냉소를 흘린 기마자가 달려들었다.
금빛을 일으킨 한립이 뒤로 물러나는데 제혼이 결심이 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싸우세요.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어요.”
그 말에 한립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하하, 참으로 여인을 아끼는 자가 아닌가! 안심해도 좋다. 나 역시 여인은 죽이지 않으니까. 그저 네 혼백을 원할 뿐이다!”
크게 웃음을 터트린 기마자가 손도끼를 가지고 놀다 허공을 내리찍었다.
처음보다 몇 배는 넓은 검은 천이 펼쳐져 더 빠른 속도로 한립에게 쇄도했고, 검은 천이 가른 허공은 거울처럼 깨져 공간균열이 나타났다.
신중한 표정의 한립이 급히 진언보륜을 불러내 금색 파동으로 수백 장을 덮고 검은 천을 막았다.
검은 천이 멈추기는 했지만 금색 파동 구역도 흔들거려 간신히 구속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언화륜경>을 이 정도까지…….”
기마자는 의외라는 얼굴이었으나 크게 개의치 않고 검은 손도끼를 또 휘두르려 했다.
그 순간, 한립의 몸에서 금빛이 퍼져나가 금색 영역을 넓혔고 기마자까지 그 속에서 열 배 이상 느려졌다.
진언보륜과 시간영역을 동시에 펼치면 선령력 소모가 빨랐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열댓 개의 금색 구뢰목들이 나타나 그를 사이에 두고 눈부신 뇌전빛을 뿜어냈다.
기마자는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전신에 금색 화염을 일으켜 화염 영역을 퍼트렸다.
한립도 상대의 영역에 영향을 받아 속도가 열 배로 느려졌지만 여전히 완강하게 수결을 맺고 있었다.
뇌전 진법이 거의 완성되려는데 노호성을 터트린 기마자가 금색 횃불을 불러내 더욱 강한 금빛이 퍼졌다.
한립과 구뢰목들로 만든 뇌전 진법, 심지어 진언보륜과 금색 파동까지 움직임이 고정되었다.
표정을 푼 기마자가 수중의 손도끼에서 검은 천을 뿜어냈다.
파삭!
금색 파문을 도자기처럼 깨트리고 도끼의 검은 빛이 한립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한립의 왼쪽에서 투명한 금색 액체가 절반 정도 채워진 옥병이, 오른쪽에서는 금색 모래가 가득 든 모래시계가 떠올랐다.
앞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금색 횃불 뒤로는 금색 나무가 나타났다.
웅웅웅웅웅!
진언보륜을 포함한 다섯 개의 시간 신통이 공명하며 시간도문을 밝혀 강대한 시간법칙 파동을 내뿜었다.
오십 가닥의 시간법칙의 실이 진언보륜 등 보물들에서 날아올라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대한 금색 고리를 이룬 채 회전하고 있었다.
기마자의 영역인 단시화경(斷時火境)이 흔들리더니 불꽃들을 금색 고리 속으로 빼앗겼다.
“이게 무슨!”
그 모습에 기마자가 화들짝 놀랐다.
기마자가 보는 앞에서 행동의 자유를 되찾은 한립이 뇌전 진법을 완성했다.
“가자!”
쿠쿠쿵!
한립의 외침과 함께 괴뢰목과 진법에서 눈부신 뇌전들이 튀어나와 그와 제혼을 감쌌다.
눈을 부릅뜬 기마자가 분노한 얼굴로 검은 손도끼에서 빛을 폭파했다.
콰콰쾅!
삽시간에 열 배나 커진 거대 도끼는 막대한 법칙 파동을 발산하며 허공을 찍었다.
쿠웅.
폭이 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검은 천이 허공을 부수면서 수천 리 규모의 공간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하늘이 갑자기 새까맣게 변해 먹구름이 몰려들고 광풍이 불었다. 하지만 기마자의 이번 공격은 허탕이었다.
뇌전이 검은 도끼보다 빨랐던 것이다.
콰릉, 벼락이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고 한립과 제혼이 자취를 감춘 다음에 검은 천이 달려들어 구뢰목을 가루로 만들었다.
표정이 가라앉은 기마자가 도끼를 거두고 감응을 하다가 번쩍 눈을 떴다. 싸늘한 그의 눈빛이 곧 평정을 되찾았다.
“<대오행환세결>을 지닌 게 분명해. 그걸 수련했으니 다른 시간의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거겠지. 가장 강력한 시간공법 답구나!”
그의 눈이 이글거리고, 소매를 펄럭인 기마자는 금빛 둔광으로 변해 금원선궁 방향으로 돌아섰다.
* * *
금원선궁에서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금원산맥 깊은 곳.
금색 산봉우리 내부에 여러 문양이 복잡하게 새겨진 석실이 파여 있었다.
콰르릉!
열댓 개의 구뢰목이 박힌 금빛 뇌진이 반짝거리다가 굵직한 빛기둥을 만들어내자 한립과 제혼이 그 안에서 나타났다.
“여긴…….”
제혼이 동굴 안을 둘러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금원선궁으로 가기 전 혹시 몰라 준비해둔 구목뇌진(拘木雷陣)이다. 진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금원선궁에서 극히 먼 곳이니 기마자도 여기까지는 쫓아오지 못할 것이야.”
한립은 수결을 풀고 주위의 시간 신통들을 거두다 갑자기 휘청거렸다.
한쪽 무릎으로 바닥을 찍은 그의 입가에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인님!”
“뇌진을 펼치는 데만 온 힘을 집중해 기마자의 도끼에서 흘러나온 힘에 내상을 입은 것뿐이다.”
한립은 괜찮다고 손을 젓고는 녹색 단약을 꺼내 삼켰다.
“주인님께서 미리 대비해두지 않으셨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부상이 가볍지 않으신 것 같은데 여기서 잠시 쉬어갈까요?”
“구목뇌진을 동원해 기척을 남겼으니 금제를 펼쳐 두었다고 해도 누군가 눈치를 챘을 수 있다. 바로 이곳을 떠나야 해.”
손에서 푸른빛을 뿜어 뇌전을 회수한 한립은 몸을 바로 세우고 수결을 맺어 뇌전 진법을 형성했다.
금원산맥 변두리에는 추적추적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콰릉!
먹구름 속에서 은빛 뇌전이 번득이고 뇌전 전송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의 신형이 떨어져 산 정상의 숲을 뒹굴었다.
몇 그루의 나무를 부러뜨리며 굴러간 두 사람은 커다란 바위 옆에 멈춰 섰다.
“주인님!”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벌떡 일어나 온몸에 진흙이 묻은 청년을 부축해 세웠다.
“난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부상은 억눌러 놓았는데 선령력과 체력이 고갈되어 이러는 것이다.”
한립은 얼굴로 떨어지는 비를 훔쳐내며 쓴웃음을 흘렸다.
“기마자, 정말 비열한 자예요. 동방백과 싸우고 지쳐 있을 때 쫓아와서는…….”
“원래 사람의 계획은 하늘의 안배를 따라가지 못한다 했다. 기마자가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구나. 그래도 여긴 그럭저럭 안전한 것 같으니 잠시 휴식을 취하다 떠나면 될 것이야.”
한립은 단약을 삼키고 가부좌를 틀었다.
잠시 후, 훨씬 나아진 얼굴로 그가 일어서자 제혼이 쪼르르 달려와 옆에 섰다.
“걱정되는 게 있는데 기마자 말고도 우릴 쫓는 이들이 더 있어요. 저희가 금원선궁에 쳐들어가기 전, 동방백이 구원관의 대라경 존재와 연락해 그의 명을 받은 남 씨 오누이가 오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남 씨 오누이라.”
“실력이 상당한 것 같은데 동방백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아 정확한 정보는 취하지 못했어요.”
“동방백을 죽였으니 더는 그들과 얽힐 필요 없다.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최선이겠지. 금원선궁 세력은 금원산맥 서부만 장악하고 있고 중부와 동부는 여러 선가 종문과 수도세가들이 버티고 있어 복잡하다고 들었다. 조용히 움직이려면 그곳으로 가는 게 좋겠어.”
“네!”
“제혼, 추적을 피하기 위해 난 한동안 선령력을 봉인하고 육신의 힘만으로 이동할 것이다. 선령력 파동을 숨기기 위해 너도 화지동천에 들어가 있는 것이 좋겠구나.”
한립은 은색 빛의 문을 열어 제혼을 죽루로 들여보내 주었다.
* * *
시간이 흘러 2년 후, 금원산맥 중부의 낮은 산들 사이에 청사요(靑絲坳)라는 땅이 있었다.
그곳에는 촌민들이 사는 여량촌(余粮村)이 있었는데 외부세계와 교류하지 않는 폐쇄적인 마을이었다.
어느 날 밤, 여량촌 사람들은 푸른 대나무로 만든 비옷인 도롱이를 어깨에 덮고 손에는 횃불과 북, 징 같은 것을 든 채 여덟 대의 손수레를 끌고 뒷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 대나무로 만든 수레에는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얀 꼬부랑 노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표정이 없어 목석같아 보였다.
촌민 무리 속에 푸른 장포를 입은 키 큰 사내가 어울리지 않게 눈에 띄었다.
가장 앞에 선 중년인과 나란히 걷던 그가 물었다.
“촌장님, 다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촌장이라 불린 사내는 눈빛이 혼탁해서 한창인 장년 사내 같지가 않았다.
“백수곡(白首谷)으로 가고 있습니다, 한 의원님.”
청포 사내의 물음에 촌장이 망설이다 답했다. ‘한 의원’은 기마자를 피해 도망쳐온 한립이었다.
반년 전, 우연히 마을을 지나다 전염병이 도는 것을 보고 도와주었더니 그를 떠돌이 의원이라 착각한 촌민들이 감사의 뜻으로 마을에 남게 해주었다.
원래는 한 이틀 머물다 떠나려 했는데 이상한 사실을 발견해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눈앞의 촌장만 해도 겉보기에는 40대였지만 실제로는 500여 년을 살아왔고 다른 촌민들도 하나같이 생김새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아차려서였다.
선계의 범인들은 수명이 길어 1백 년, 2백 년 정도는 살 수 있었지만 선술을 익히지도 않은 범인들이 이렇게까지 오래 사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백수곡에요? 거기는 왜…….”
“그것이……. 휴, 한 의원님은 저희 마을의 은인이시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대나무 수레에 탄 노인들이 몇 살일 것 같습니까?”
걸음을 멈춘 촌장이 그를 쳐다보았다.
“150세 정도로 되어 보입니다.”
“그렇죠, 보신 그대로 저들은 150살입니다. 저보다 훨씬 어른으로 보이는데 실은 제가 더 나이가 많습니다. 제가 올해로 513살이거든요.”
“예?”
고개를 끄덕인 촌장의 말에 한립은 놀란 척을 했다.
“하하, 너무 놀라지 마세요. 마을에는 저 같은 사람들이 더 있습니다. 저보다 더 나이가 많은 분들도 있고요.”
“어떻게……. 무슨 영약이라도 드신 겁니까?”
“영약은요, 무슨. 전부 백수곡에 있는 샘물 덕이지요.”
“샘물이요? 샘물에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가 있단 말입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백 년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 촌민들을 데리고 샘물에 들어가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곤 하지요.”
“그렇게 하면 반로환동(返老換童)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말해도 틀린 건 아닙니다만 그리 단순하게 말할 수가 없어요. 어떨 때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청년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또 어떨 때는 멀쩡한 사람이 백골이 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각자의 운인 것이죠.”
“그랬군요…….”
“한 의원님은 아직 한창이시니 샘물에 들어갈 생각은 마십시오. 젊어진다고 해도 병을 고쳐주는 것은 아니라서 마을에는 여전히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나온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의원님이 마을에 남아 주시기를 바라서입니다.”
“떠돌이 의원에 불과한 제게는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래도 고민을 해보고 결정을 해도 될지요?”
“하하, 그러세요. 괜찮으니 충분히 고민해보세요.”
두 사람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촌장이 슬쩍 한립에게 처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백 살이 되긴 했지만, 아직 소녀와 같은 아가씨가 있어 그에게 소개해주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한립은 또 한 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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