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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27화 (1,784/2,000)

2027화. 도착

*

보름 후.

삼강호 옆 소비산 위로 하얀 비행 베틀북이 도착했다.

그 위에는 하얀 비단 장포를 입은 중년인과 회색 머리 노인, 화려한 복색의 소년과 검은 장포 거한이 서 있었다.

동방백 일행이었다.

그들 아래 산 정상에서 비취색 장포를 입은 영준한 청년과 둥근 얼굴 노인이 서 있었다.

각각 소류종 장문인과 한립을 맞이했던 노 장로였다.

“선궁 외에 다른 곳에 정보를 흘린 것은 아니겠지?”

동방백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중차대한 일이라 사료되어 소식을 봉쇄해두었습니다. 종문 전체에서도 저희 둘밖에 모르는 일이고 수부를 빌려 기거하는 다른 수사들에게도 알리지 않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소류종 장문인인 청년이 잘 보이려는 듯 한껏 웃으며 답했다.

“다행이구나. 귀찮게 종문 전체를 멸할 필요는 없겠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방백의 말에 청년과 노 장로가 자신들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시선을 마주쳤다.

“……!”

그러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굳은 그들은 몸에서 미끌미끌한 푸른 이끼가 자라나 요사스러운 꽃까지 피웠다.

꽃은 그들의 생명력을 자양분 삼아 피어나고, 두 사람은 바짝 마른 시체가 되어 숨이 끊어졌다.

무표정하게 지켜보던 동방백이 고개를 돌렸다.

“려 장로, 그자의 기운이 아직 느껴지는가?”

“아직 이곳에 있습니다.”

쥐가 사람이 된 것처럼 생긴 마른 회색 머리 노인이 코를 킁킁거리고 답했다.

“그렇지!”

웃음을 흘린 동방백과 달리 광활한 호수를 보는 도기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도 장로, 할 말이 있으면 하게.”

“궁주님, 한립은 절대 방심할 만한 놈이 아닙니다. 고의로 행적을 드러내다니 뭔가 이상합니다.”

도기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혔다.

“지난번 일로 겁먹은 것 아닙니까? 동방 궁주님께서 친히 나서셨는데 저놈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흑도가 비웃음을 흘렸다.

“흑 장로, 도 장로의 말도 틀리지 않네.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동방백의 말에 도기가 공수를 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동방백은 베틀북을 조종해 삼강호 위에 도착했다.

“여깁니다.”

려운이 호수를 가리켰다.

“궁주님, 제가 단칼에 호수를 갈라 그놈을 끌어내겠습니다.”

흑도가 등에 멘 악귀 대검을 풀어 손에 쥐었다.

“됐네, 문턱을 넘기도 전에 싸움부터 할 수 있나.”

그는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손끝에서 푸른 빛 한 줄기를 호수로 쏘아 보냈다.

촤르르…….

고요하던 호수에 소용돌이가 형성되어 귀수부까지 통로를 만들었고, 동시에 푸른 영역이 호수를 포함한 전 구역을 봉쇄했다.

교룡처럼 호수를 파고든 푸른빛이 하얀 장막과 부딪치며 조사당이 드러났으나 제혼과 마주 앉아 있던 술을 마시던 한립의 잔에는 작은 파문도 일지 않았다.

“동방 궁주가 직접 온 것 같구나. 겨우 태을경 최고봉 수행으로 이리 오만방자해서야.”

호박색 술을 쭉 들이켠 한립이 술잔을 회수하고 일어섰다.

동방백 등 네 명은 소용돌이 통로를 통해 수면 아래로 내려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수사, 이름은 오래전부터 들었는데 이제야 뵙습니다.”

동방백은 아무리 봐도 평범해 보이는 한립을 훑었다.

“하하, 제 이름이 어쩌다 거기까지 알려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금원선역 궁주께서 여기까지 쫓아오실 만큼 엉덩이가 가벼운 분인 줄은 더 몰랐고요. 이거 직접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히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한립의 대답을 들은 흑도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까? 무고한 청호성 전족을 멸한 미치광이 살인마에게 뭐 얼마나 곱게 말해야 할까요.”

한립의 말투가 싸늘해졌다.

동방백이 눈짓을 해 흑도가 경거망동하지 않게 말렸고, 려운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피고 있었다.

한립의 시선이 그들을 지나 수려한 소년에게 닿았다.

“도 장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날 운 좋게 목숨을 건지셨으면 목숨 아까운 줄 아셨어야죠…….”

도기는 그의 시선에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혀가 마르고 식은땀이 나서 눈을 부라리기는 해도 뭐라 대꾸할 수는 없었다.

“한 수사, 우리 같은 신분에 그런 하찮은 생명들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요. 그보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 있어 찾아왔습니다. 지닌 물건만 내주시면 그간의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하고 구원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동방백이 허허 웃으며 그를 따라온 목적을 밝혔다.

구원관이라는 단어에 한립은 그가 말하는 ‘물건’이 뭘 말하는지 금방 알아들었다.

동공을 수축한 한립은 장천병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구구절절 변명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이 일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는 기밀이었기에 여기 나타난 누구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간 선궁 세력과 정면충돌을 피한 것은 무서워서라기보다는 다른 우려들이 있어서였는데 그의 한계를 자꾸 시험하니 본때를 보여줄 때가 된 것 같았다.

“천정과 적이 되지 마시라 충고드리겠습니다. 수사의 자질이면 편안히 수련에만 매진해서 더 높은 경지를 노려보셔야지요…….”

“난 누가 쫄래쫄래 쫓아다니는 걸 싫어해서 말입니다. 쓸데없이 떠들지 말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져가 보세요. 그게 뭔지 묻는 것도 귀찮군요.”

동방백의 말을 끊은 한립이 나른하게 말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동방백이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자마자 오래 참고 있던 흑도가 잔영을 남기면서 튀어 나가 핏빛 문양을 일으킨 악귀 거검을 내리쳤다.

까만 구름이 거검에서 몰려나와 조사당으로 떨어졌다.

쩡!

조사당 보호막이 깨진 뒤 검은 구름 속에서 흉측하게 생긴 거대 귀물들이 줄줄이 빠져나와 피에 굶주린 모양새로 한립과 제혼을 덮쳤다.

기세등등한 흑도의 공격에 한립은 제혼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깨어나자마자 포식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입맛을 다시는 제혼은 식욕이 동하는 얼굴이었다.

“너무 급히 먹지는 말거라. 괜히 체할라.”

한립의 농에 고개를 끄덕인 제혼이 폭발적으로 솟구쳐 악귀 거검의 귀물을 뚫고 까만 구름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대로 멈춘 까만 구름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 참…….”

동방백이 의아한 얼굴로 흑포 거한을 보았는데 그도 어찌 된 일인지 몰랐다.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표정이 확 달라진 그는 겁에 질렸고, 동방백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먹구름 속을 들여다보았다.

흉악한 귀물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양 기겁해서는 달아나려 했지만 거검에 속박된 처지라 어쩌지 못하고 붙들려 있었다.

출렁이는 먹구름 속에서 두 개의 괴상한 뿔과 거대한 거원의 머리가 드러났는데, 갈라진 미간에서 제3의 요목이 나타나고 등 뒤로 거무튀튀한 뼈 가시가 솟아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저건……. 형수!”

눈을 반짝인 동방백은 악귀보다 더 악귀 같은 짐승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흑도도 진작 그걸 알아채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귀도 공법을 익힌 그에게는 그야말로 천적이 나타난 꼴이었다.

황급히 수결을 맺어 악귀 거검을 회수하려 했으나 형수가 미간의 눈동자에서 핏빛 빛기둥을 뿜어 거대한 사슬을 만들고 귀물들을 꿰뚫어 버렸다.

형수는 원래도 음기와 사술 귀물의 천적이었는데 생사의 고난을 거치면서 수행이 깊어진 지금의 제혼은 귀물들을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었다.

치지지직.

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핏빛 사슬에 뚫린 수천 마리 귀물들이 가루가 되어 검은 연기로 흩어졌다.

형수는 코를 찡그리며 광채를 방출해 검은 연기를 모조리 휘감고 들이마셨다.

콰르릉!

경악한 흑도가 악귀 거검을 회수하려 했을 때는 이미 핏빛 사슬이 뱀처럼 따라붙어 수많은 뇌전을 발산했다.

흑도 역시 벼락을 맞은 것처럼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암녹색 빛을 뿜어 푸른 덩굴로 장검을 대신 잡고 끌어당겼다.

기이한 법칙의 힘에 핏빛 뇌전들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푸른 덩굴이 거검과 사슬의 틈을 만들며 끼어들었다.

충격에서 벗어난 흑도가 칼집에 거검을 넣었지만 이미 보물의 먹구름은 절반 이상 사라진 뒤였다.

“감사합니다, 궁주…….”

심각한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 흑도는 동방백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말을 마치기 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가까이 서 있던 려운은 먼저 한립이 보이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번득 흑도의 등 뒤에 나타난 한립은 그가 반응할 기회도 주지 않고 뒷목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흑도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동방백을 주시하며 으득, 목뼈를 부러뜨려 버렸다.

이에 노한 동방백은 손바닥으로 힘껏 한립을 후려쳤다.

휭!

천지영기들이 몰려들어 푸른 나무 꼬챙이를 이루고 한립에게 날아들었다.

진작 흑도에게 손을 뗀 한립은 진언보륜을 역전해 가장 반응이 느린 도기의 옆을 지나며 조사당 앞 광장으로 돌아왔다.

일부러 그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추락하는 흑도의 머리에서 빠져나온 검은 원영은 형수가 냉큼 큼지막한 앞발로 낚아채 입속에 집어넣었다.

모든 것을 본 도기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러 비틀거리며 아래로 하강했다.

난색을 표한 려운은 동방백 옆으로 붙어서서 회색 영액으로 주변을 두르고 한립의 기습에 대비했다.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심복을 잃은 동방백은 매우 놀란 상태였다.

크항!

그가 한 손으로 허공을 쥐자, 수많은 나무 꼬챙이들이 나타나 수백 장 크기의 나무로 된 용으로 변해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무토막 용이라, 날 세 살짜리 어린아이로 아는 겁니까?”

한립은 비웃으며 주먹을 쥐어 성신지력을 한 곳으로 응축했다.

쿵!

성신지력이 눈부신 하얀빛을 터트렸고 목제 용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먼지가 뿌옇게 흩어지는 사이 동방백이 번득 튀어나와 한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슁.

모깃소리 같은 미세한 파공음 뒤로 암녹색 용 모양 나무 지팡이가 한립의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돌풍에 휩싸인 지팡이 주변으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한립은 뻔히 보면서도 피하지 않고 손을 뻗어 청죽봉운검을 불러냈다. 그러자 검 끝과 지팡이 끝이 정확히 충돌했다.

파칙!

금빛 뇌전이 번득이며 암녹색 나무 지팡이가 연기가 되어 피어올랐다.

“궁주라는 사람이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실망스럽습니다.”

한립의 웃음소리에 동방백은 분노하기보다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는 천천히 조사당 앞 광장에 내려섰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처음부터 일부러 나를 자극해 광장으로 유인하던데, 미리 준비한 진법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어디 무엇을 준비한 것인지 보기나 합시다.”

동방백은 오만하게 물었다.

“하하……. 이런, 동방 궁주 당신이 분노가 아닌 그 자만심 때문에 걸려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기왕 오신 것 쉽게 떠날 생각은 버리시지요.”

한립은 수결을 맺어 조사당이 위치한 야트막한 산을 가리켰다.

쿠쿠쿵.

산만한 괴수 네 마리가 땅속에서 일어나 각각 우산, 선검, 거울 그리고 구렁이를 쥐고 있었다.

일곱 빛깔 우산을 든 보라색 괴수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보물에서 내뿜은 광채로 천지영기의 흐름을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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