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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26화 (1,783/2,000)

2026화. 기다림

*

잠시 후, 진분홍 옷을 입은 소녀가 나타나 삼강호로 안내했다.

그리 출중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동글동글한 얼굴에 웃으면 보조개가 들어가 친근감이 드는 소녀였다.

“어수룩한 분처럼은 안 보이는데 어쩌다 귀수부(鬼愁符)를 고르셨어요?”

소녀는 성격도 밝아서 딱히 말을 가리지 않았다.

“귀수부? 어째서 그렇게 부르는 거지?”

“헤헤, 아무도 열지 못하고 금제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쳐나오는 곳이라 귀신도 수심에 잠길 곳이라고 저희끼리는 ‘귀수부’라고 불러요. 물론, 손님께서 수부를 여시면 정식으로 다른 이름을 붙이실 수 있지만요.”

“호오, 귀수부라는 이름도 나쁘지 않군. 그걸로 하지.”

“그게……. 이름을 정하는 건 일단 수부를 연 다음에 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음, 내려가시면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괜히 금제의 반격에 크게 당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지.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한립은 자신을 걱정하는 소녀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에서 오래 일했지만 길이나 안내하는 하인의 이름을 묻는 경우는 많지 않아서였다.

“저는, 호소성이라고 해요.”

소녀는 조금 부끄러운 기색으로 답했다.

“소성이라……. 소성(小成), 작은 성취에 만족하며 일생을 평안히 보내라는 좋은 이름이군.”

한립은 조용히 말하다 내심 일전에 만난 또 다른 소녀 ‘엽소소’의 이름을 연상하고 탄식했다.

‘그녀의 이름도 참 소박하지 않았던가.’

지난달 말 우연히 청호성이 하루아침에 멸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호성 안에 있는 것이라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모두 도륙을 당해 생존자가 한 명도 없다는 말과 함께.

일자를 계산해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서 삼강호로 발길을 튼 것이었다.

소녀는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더는 입을 놀리지 않고 안내를 했다.

고요하게 물결치는 너른 호수를 본 한립은 유구한 세월이 담긴 거대한 자연 앞에 시름이 조금 달래지는 듯했다.

“도착했습니다. 호수 아래 천 장 정도 내려가시면 귀수부입니다.”

“고생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거라, 금방 돌아올 테니.”

“네? 저기…….”

호서성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한립을 훌쩍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에휴, 성격 엄청 급하시네.”

입을 비죽거리던 소녀는 호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금선도 다쳤던 귀수부에 진선경 후기나 되어 보이는 손님이 내려가서 무얼 하려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분수껏 안 되겠다 싶으면 물러나야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텐데…….”

촤륵!

호소성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돌연 호수에 물보라가 치고 누군가 옆으로 떨어졌다.

눈을 비빈 소녀는 한립이 벌써 돌아온 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빨리 포기하신 거예요? 몇 시진 걸릴 줄 알았더니.”

“어린 여자아이가 중얼중얼 혼잣말이 많더구나. 집사 장로에게 가서 내가 수부 개방을 했다고 알리고 오너라.”

한립은 그녀의 얼굴을 가리키고 웃음 지었다.

“예? 벌써 수부를 개방하셨다고요.”

“어서 가거라.”

놀란 호소성이 머리를 흔들고 얼른 소비산 쪽으로 날아올랐다.

오래지 않아 둥근 얼굴 노인은 호소성과 같이 호숫가로 와서 직접 수부 금제를 살피고 나서야 한립이 새로운 수부를 개척했다는 것을 믿었다.

“3년 동안은 오롯이 한 수사의 거처가 될 것입니다. 안에서 무엇을 찾으시든 수부를 망가트리지만 않으시면 모두 수사의 것이고요.”

“고맙습니다.”

“그렇지, 수부를 여셨으니 이름을 지어주시지요.”

장로의 말에 한립은 소녀를 힐끔 보고 말했다.

“귀수부로 하겠습니다.”

둥근 얼굴 장로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만 끄덕이고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소성, 너는 잠시 한 수사 곁에서 시중을 들며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 하면 종문에 알리거라.”

“존명.”

떠나기 전 그가 남긴 명에 호소성이 서둘러 답했다. 한립은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냐, 내려가 구경해보겠느냐?”

둥근 얼굴의 장로가 떠나고 한립이 호소성에게 말을 붙였다.

소녀가 급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립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푸른 보호막을 일으켜 호수 아래로 내려갔다.

물속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깜깜해졌지만 이렇게 깊이 내려온 것은 처음인지 호소성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호수 아래 뚝뚝 끊어진 산봉우리들이 주변에 보이고 여러 빛이 장막을 이루어 곳곳의 수부를 감싸고 있었다.

꼭 물속에 별들이 뜬 것만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한립은 호소성을 데리고 밑바닥으로 내려가 수십 장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에 내려섰다.

산 정상에 산을 따라 기다랗게 세워진 저택이 보였다.

소녀의 팔을 잡은 한립이 다가서자 빛의 장막이 흩어지며 그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조사당……. 여기가 조사당이었나봐요?”

호소성은 저택 대문에 걸린 편액을 보고 놀란 듯했다.

“아니면 이 오랜 세월 동안 이곳의 금제를 뚫지 못할 리가 없지.”

“그럼 손님은 어떻게 금제를 푸신 거예요?”

“책을 많이 읽었다.”

미소를 지은 한립은 어느 정도 사실대로 말했다.

조사당을 보호하던 금제는 오래된 경전에서 보았던 종류였고, 무슨 종문 전체를 지키는 거대 진법도 아니라서 그의 실력에 파훼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와, 한몫 단단히 챙기시겠어요! 대부분 종문에서 조사당에 종문의 경전이나 보물들을 가져다 놓잖아요.”

호소성이 엄청 부럽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경전은 몰라도 귀한 보물은 기대 말거라. 조사당이 위치한 산마저 누군가 일격에 베어냈는데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면 진작 가져다 적을 막기 위해 썼겠지, 아직 여기 모셔 두었겠느냐.”

한립은 계단을 올라 검은 대문을 밀면서 가볍게 답했다.

“아아, 아깝네요. 그래도, 경전이라도 있으면 좋죠! 상급 공법이 얼마나 귀한데요.”

조금 실망하던 소녀는 금방 기대감에 차올랐다.

끼익.

문을 열자 오랜 세월 먼지가 쌓인 조사당 문 뒤로 폭이 좁고 기다란 뜰이 나타났다.

텅 빈 뜰에는 녹슨 청동 물 항아리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립은 항아리 안에 절반 정도 맑은 물이 담겨 있고, 암녹색 수련(垂蓮)이 떠서 짙은 물 속성 법칙의 힘을 방출하는 것을 감지했다.

“엄청난 물의 기운이…….”

겨우 원영기 수행을 지닌 호소성은 법칙의 힘은 느끼지 못하고 물의 기운만 느끼는 듯했다.

“보아하니 아직 쓸 만한 물건이 남아 있었구나.”

한립은 청동 물 항아리를 은백색 빛으로 감싸 화지동천 안으로 옮겨 두었다.

뜰 양쪽으로 회랑이 있고, 그 끝에 대전이 보였다.

대전 안은 논의를 하던 공간이었는지 진작 썩어버린 방석 몇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뒤로 작은 뜰이 또 나왔는데 백석을 갈아 둔 것이 연무장인 듯했다.

연무장을 지나 조사당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원원류장(源遠流長)’이란 네 글자가 적힌 주홍색 편액이 걸린 대전이 나왔다.

그 안에는 9층으로 이루어진 제사상이 설치되어 있었고 각각의 상마다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목패가 놓여 있었는데, 평범한 범인 가문의 조상을 모시는 명패라기보다는 장수를 기원하는 장생패에 가까웠다.

대충 세어보니 80여 개로 종문의 장문인과 장로들의 장생패 같았다.

가장 아래쪽 제사상에 올려진 두툼한 금색 옥간은 금빛이 좌르르 흘러 봉인금제가 느껴졌으나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영력 부족으로 힘이 약해져 있었다.

대충 금제를 깬 한립은 책을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한 권은 종문의 멸문 전까지 역사를 기록한 책이었고, 다른 한 권은 족보 같은 것으로 종문의 창립 조사부터 내외문 제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기 있던 종문이 청정종(淸淨宗)었네요. 이렇게 오랜 세월 전승되던 종문도 멸문은 피할 수 없었나 봐요…….”

호소성이 탄식했다.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진언문과 명한선부를 떠올렸다.

그런 거대 종문들도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망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제사상에 ‘상청류(常淸流)’라 적힌 장생패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져 손을 뻗어 불러들였다.

두 눈에 보랏빛을 반짝인 한립은 입꼬리를 말고 손끝으로 톡톡 몇 군데를 건드렸다.

파앗.

푸른 빛에 휩싸인 장생패 안에서 숨겨져 있던 옥간 하나가 날아올랐다.

한립은 옥간만 취하고 장생패는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종문의 비밀 경전이에요?”

“그래, 청정종의 공법인 <무형록(無形錄)>이다.”

“헛고생하신 걸까 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돈 될만한 걸 건지셨네요! 안심이에요.”

호소성이 웃으며 하는 말에 한립이 잠시 멍해졌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조사당을 더 뒤져보았지만 다른 물건은 나오지 않아 소녀는 꽤 실망한 눈치였지만 한립은 그렇지 않았다.

<무형록>은 물 속성 법칙의 힘을 수련할 수 있는 공법으로 그가 익힐 것은 아니지만 흑풍해역의 지기화신을 위해 남겨둘 생각이었다.

게다가 화지동천에 넣어둔 청동 항아리와 그 안에서 자라는 금색 수련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 그가 이곳을 위해 치른 선원석의 값어치는 훨씬 넘어섰다.

조사당은 물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공기가 상쾌했다.

한립은 호서성을 데리고 조사당 문턱에 앉아 말없이 위쪽 빛의 장막을 바라보았다.

“호 낭자, 집사 장로가 나를 따라다니며 무엇을 하는지 수시로 보고하라고 했겠지?”

“어떻게 아셨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호소성이 깜짝 놀라 묻고는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게, 손님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이곳에 수부를 빌리는 모든 손님에게 종문에서 사람을 붙이거든요…….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서 거절하실 수 있어요. 보통 예쁜 언니들이 가면 거절을 잘 안 하는데, 이번에는 노 장로님께서 웬일인지 저를 시키시더라고요.”

“처음 나를 보고 얕보는 마음을 먹었기에 내가 수부 금제를 파훼하지 못할 거라 여기고 너를 부른 것이겠지.”

“정말 그랬겠어요…….”

“꼭 기억하거라. 남들은 너를 얕보거나 무시할 수 있지만 너는 스스로를 그리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 보기에 자질은 충분한데 네가 아직 원영 후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수련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해서겠지?”

한립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호소성은 무슨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저계 수사에게 적합한 단약은 없지만, 이후 합체기를 넘어서면 쓸 수 있는 단약이 있다. 잘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쓰거라.”

한립이 느닷없이 주홍색 자기 병을 꺼내 주자 호소성은 손을 뻗어 받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걸 본 한립이 자기 병을 그녀의 손에 건네주고 손을 들어 소녀의 미간을 가리켰다.

머리가 띵, 해진 호소성이 비틀거리다 바로 섰는데 머릿속에 <무형록> 공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저…….”

화들짝 놀란 호소성이 입을 뻐끔거렸다.

“받아 두거라. 오래지 않아 삼강호가 뒤집힐 것이다.”

한립은 숙연히 말하고 문턱에서 일어섰다.

“선배님, 여기서 무슨 큰일을 벌이시려는 건가요?”

호소성은 손님에서 선배님으로 호칭을 바꿔 물었다.

“일을 벌인다기보다는 누굴 기다리고 있다.”

“친구 분이신가 봐요?”

“적이다.”

호소송이 떠보듯 물었는데 한립은 거침없이 답했다.

“아…….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내 이미 소류종에서 네 몸에 심어 놓은 표식을 제거해 두었으니 즉시 소비산을 떠나 아주 멀리 가거라. 앞으로 수련에 매진하고 이곳으로는 절대 돌아오지 말고.”

“선배님,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그녀의 질문에 한립이 소녀를 응시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네게 대신해 푸는 것이다…….”

호소성은 그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보았다.

“알겠어요. 나중에라도 수행을 쌓으면 선배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소녀는 잠시 고민하다 그를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가보거라.”

한립은 웃으며 호소성을 보내주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그의 옆에 파동이 일며 제혼이 나타났다.

“주인님, 저 아이가 당장 소비산으로 가서 고발할 거란 걱정은 안 하세요?”

“내 안목을 그리 못 믿는 것이냐?”

한립이 웃음 짓자 제혼도 따라 웃었다.

“정말 그렇게 한다고 한들 상관없다. 소류종에 내 본명을 밝힌 것이나 여기 온 목적이 바로 선궁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려는 것 아니었더냐.”

“오기만 하면 절대 살려 보내지 않을 거예요.”

“그래, 손님 맞을 준비나 하자꾸나.”

한립은 손뼉을 짝, 쳐서 분위기를 환기하고는 조사당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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