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화. 말 못 할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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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토선역.
어딘지 알 수 없는 허공에 핏빛 구름이 떠서 진득한 피 냄새를 풍기는 검은 건물을 숨기고 있었다.
마치 숲의 나무줄기들처럼 층층이 겹쳐진 혈운(血雲)은 위로 갈수록 짙어졌고 굴곡진 처마 끝이 층마다 보였다.
그 맨 아래 ‘선옥(仙獄)’이란 혈홍색 글자가 적힌 수백 장 높이의 하얀 바위가 놓여 있었다.
달랑…….
바위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핏빛 구름 속에 검은 대전이 보였고, 지붕의 귀퉁이마다 커다란 팔각 방울이 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맑은 소리를 냈다.
방울 소리가 퍼질 때마다 은은하게 금빛 광채가 일렁여 주변의 짙은 피 냄새를 퍼트렸다.
그리고 대전 문 앞에는 흉악하게 생긴 흑갑 무사 둘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한 명은 하늘을 가를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도끼를, 다른 한 명은 거대한 창을 들고 있었는데 둘 다 눈동자가 핏빛이라 분위기가 흉흉했다.
대전에 두 줄로 나란히 선 주홍색 기둥들은 하나같이 주먹 크기의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대부분 문장에 형을 집행한다는 뜻의 ‘형기(刑起)’라는 두 글자가 들어갔다.
예를 들어서 모반을 하면 목을 베고, 무고한 범인들을 살해하면 혼백을 멸하며, 함부로 금술을 익히면 천등으로 만들어 불사른다는 내용이었다.
타닥타닥.
어둑한 대전 안에는 화로들이 높이 떠서 붉은 불길을 태웠다.
대전 안쪽 검은 철로 만든 탁자 앞에 커다란 인영이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 손과 발이 어찌나 큰지 방석만 하고, 상반신은 괴상한 문양이 새겨진 불로 지진 것처럼 붉은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붉은 머리카락 같은 화염 한 줄기가 나풀거렸다.
한립이 그를 보았다면 미라노조 설법에서 보았던 다섯 제자 중 하나이며 나중에 노조를 배신하는 기마자란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열화야, 그리 애를 썼건만 결국…….”
들고 있던 옥간을 내려놓은 기마자는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가장 아끼는 제자가 바로 그 아이였군요.”
그때 머지않은 화로 속에서 화염이 솟아 사람의 얼굴로 변하더니 끌끌 혀를 찼다.
“이런 혼란에 휘말리게 하지 않으려 내보냈건만. 치융도 내 마음을 얻지는 못했으나 이 스승을 위해 진언문에 갔다 목숨을 잃었고. 어쩌다 둘 다 회계까지 가서는 그리되었는지.”
“죽으면 뭐 합니까? 어차피 <대오행환세결>은 찾지도 못한 것을. 목숨만 내다 버리고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다니 멍청한 것들…….”
“아니, 아무런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치융이 회계로 들어가기 전 남긴 소식에 따르면, 아주 이상한 사람에 대해 언급을 했더군. 진언문 유적에서 가장 많은 것을 얻어낸 자니 <대오행환세결>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면 그의 손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이야.”
화로 얼굴이 조소함에도 기마자는 담담히 말했다.
“그게 누굽니까?”
“이름은 한립, 백 년 전쯤 금원선역에 나타났었다지.”
“껄껄. 내가 나설 때인가 봅니다. 선옥을 오래 지키고 있었으니 바깥 공기도 쐴 겸 잡아 오지요. 대신 그놈을 데려오면 한번 거하게 살육을 하는 겁니다? 내가 적당한 곳을 찾아놨어요. 눈에 띄지 않는 하계 어딘가라 아무도 그 일로 성가시게 하지 않을 겁니다.”
화로 얼굴이 높이 솟아 둥둥 떠서는 괴소를 터트렸다.
기마자는 그를 상대하지 않다가 화로로 손을 뻗었다.
펑!
화로 얼굴은 떨어져 나와 손발이 크고 붉은 머리를 지닌 사내 그러니까 기마자와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갈 테니 나를 대신해 선옥을 지키거라.”
“그러다 누가…….”
기마자의 분부에 화염이 변한 화신이 무어라 말하려 했다.
“여긴 선옥이다. 아무도 헛소리 못 할 거야. 이번에는 단 한 명만 데리고 금방 다녀오겠다.”
“누굴?”
“그가 알만한 녀석을.”
입꼬리를 끌어올린 기마자가 불구슬로 변해 혈운과 인접한 금색 공간으로 날아올랐다.
* * *
60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갔다.
청호성 조용한 별원 옆, 깨끗하게 정리된 오솔길에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린아이 몇이 알록달록한 종이로 만든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다니면서 시끌시끌하게 떠드는 소리가 담 넘어 별원으로 전해졌다.
별원 정원 안에서는 검은 의복을 입은 마른 소녀가 대나무 숲 아래 탁자에 기대앉아 턱을 괴고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녀는 다름 아닌 제혼이었다.
깨어난 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된 그녀는 걱정 없이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에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소를 머금고 있던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건물 안쪽에서 푸른색 새 장포를 입은 한립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출관하시고, 수행이 크게 느신 건가요?”
“쉽게 수행이 는 편이지. 현규가 늘어 <대오행환세결> 수련이 쉬워질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말이다.”
말은 안 했지만 계속해서 폐관 수련을 하기만 하면 태을 후기에 이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축하드려요!”
“그간 나를 위해 호법을 서느라 고생했다……. 청호족은 별다른 이상이 없더냐?”
“족장이 건강을 회복하고는 청호족 전체에 훨씬 생기가 돌아요. 금마종 쪽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요. 사실 주인님이 수련하는 동안 누군가 눈치챌까 걱정했는데 저도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조용해서 놀랐어요.”
제혼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수련은 여러 물줄기가 모여 바다를 이루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성취가 올라 조용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거기다 화지동천 안에서 여러 절세진법으로 기운을 차단하고 폐관 수련을 했으니……. 허나 태을 후기에 이를 때는 화지동천 안에서 수련해도 소란을 피할 수 없을 테니 장소를 옮겨야겠다.”
한립과 제혼이 웃는 낯으로 근황을 공유하는 동안 청호족 의사 대전 안에는 사람들이 모여 북적거렸다.
“족장님, 어쩐지 그자가 우리를 찾아왔을 때부터 의심스러웠습니다. 선궁에서 온 소식이 틀리지는 않을 게 아닙니까! 사술을 익히기 위해 범인들을 도륙한 자를 청호성에 둘 수는 없습니다.”
구 장로가 초조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그 인족이 무슨 꿍꿍이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니 아무래도 방비를…….”
또 다른 장로도 말을 이었고 말이 없는 다른 이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요? 한 선배님의 기운이 어딜 보아서 사술에 미쳐 사람을 마구잡이라 죽이는 사람 같은가요.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으면 저를 구해주고 나중에는 어머니까지 도와주지는 않았을 거예요.”
푸른 옷을 입은 엽소소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그들과 논쟁을 하는 중이었다.
생명의 은인이 청호족 사람들에게 욕을 먹자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직 어리셔서 인족의 교활함에 속으신 겁니다. 더 큰 이익을 위해 작은 은혜를 베푼 것이라면요? 그가 악인이 아니라고 쳐도 청호족에 화근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선궁의 수배범을 숨겨준 일을 어떻게 책임지시려 그럽니까?”
한숨을 내쉰 구 장로가 물었다.
“선궁이 이 일을 알아내면 우리 청호성은 끝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족장님, 어서 판단을 내려 주십시오!”
다른 장로들도 탄식하며 우려를 표했다.
“장로님들, 한 선배님은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청호족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그런 배은망덕한 종족이었던가요?”
엽소소가 목소리를 높이자 대전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생각은 잘 들었습니다.”
그때 온화한 음성이 들려왔다.
상석에 단정하게 앉은 여인, 엽소소의 모친 엽라였다.
“선궁의 수배가 사실이라고 해도 청호족의 은인을 배신할 수는 없어요.”
“맞습니다, 어머니…….”
“하지만, 선궁이 노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청호성에 더 머물게 둘 수는 없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분과 우리 모두에게 화가 닥칠 겁니다.”
손을 들어 딸아이의 말을 막은 엽라가 말을 끝맺었다.
그 말에 엽소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신과 어미의 목숨을 구해준 한립에게 감사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어미의 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다들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소야, 한 선배님은 네가 청호성으로 모셔온 분이다. 이 일도 네가 직접 가서 상의를 드리는 것이 좋겠구나.”
“예…….”
“소주께서 직접 가시는 것은 제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제가 가지요.”
구 장로가 당장 얼굴을 굳히고 나섰다.
“구 장로, 누차 말하지만 한 수사는 청호족의 은인이고 우리 소소와는 인연이 있는 분입니다. 소소로부터 시작된 인연은 당연히 그 끝도 이 아이가 맺게 해야 할 거예요.”
“구 장로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가고 싶습니다.”
엽라와 엽소소가 잇달아 말했다.
“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제가 동행이라도 하겠습니다.”
구 장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반 각 뒤, 두 개의 둔광이 별채 밖에 나타나 주변에서 놀던 아이들이 ‘언니’, ‘누나’ 하며 몰려들었다.
엽소소는 그들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 구 장로와 같이 별채의 문을 두드렸다. 통통, 하는 소리가 몇 번 울리기 전에 따뜻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엽소소와 구 장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한립이 제혼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선배님…….”
엽 소소는 인사를 하려다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깨닫고 염치가 없어져 고개를 푹 숙였다.
구 장로는 엽소소보다 한 걸음 앞에 서서 주위를 특히 한립을 경계했다.
“엽 낭자와 구 장로가 함께 온 것을 보면 사적인 일은 아닌 듯한데 무슨 일인지 편하게 말해보세요.”
한립의 말에 구 장로가 입을 열려는데 엽소소가 손을 들었다.
“한 선배님, 제 무례를 용서하세요. 사실은 일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엽소소는 그녀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와서 선궁의 수배에 관해 소상히 알리고 청호족이 그들을 떠나게 할 거란 말은 미뤄두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한립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 지었다.
“하하, 선궁이 이상한 짓을 다 벌이는구나. 나를 찾다 찾다 못 찾겠으니 별 죄명을 다 가져다 붙이고.”
제혼이 옆에서 듣고 있다 말없이 웃음 지었다.
“한 선배님이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엽소소도 긴장을 풀고 미소 지었다.
구 장로가 그런 엽소소를 보고 입을 열려 했다.
소주가 이런 일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그녀가 대신 떠나라 말하는 게 확실할 것 같았다.
“엽 낭자, 선궁의 수배 소식이 금서성까지 전해졌으면 청호족도 조사를 받게 될 날이 머지않았군. 내가 청호성에 계속 남아 있다면 화를 부를 테니 짐을 챙기는 대로 떠나겠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한립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에 구 장로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
“정말 한 선배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걸 믿습니다. 그저…….”
엽소소는 한립이 먼저 그렇게 말하자 더욱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청호성에 머물며 신세를 질만큼 졌으니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지. 제혼, 방으로 가서 짐을 싸거라. 잠시 후 떠날 것이다.”
웃으며 손을 저은 한립이 제혼에게 말했다.
제혼은 별채 곳곳을 돌아다니며 봉인 금제를 펼치느라 배치해 둔 법기 등을 신속하게 정리했다.
“저희 일족이 선궁에 저항하기에는 너무 미약한 존재라 선배님께 이런 불편함을 드립니다. 저희가 비밀은 꼭 지켜드릴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공손히 예를 올린 엽소소가 장담했다.
“아니다. 우리가 떠나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금서성으로 가서 선궁 사람에게 우리가 청호성에 머물렀다고 고발하거라. 단단히 준비하여 이야기에 빈틈이 없어야 할 것이야.”
“네? 방금 뭐라고…….
“놀랄 것 없다. 내 말은 청호족에서 먼저 선궁에 우리의 행적을 고발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야.”
한립은 깜짝 놀란 엽소소와 구 장로를 보고 씩 웃어 보였다.
“거짓 정보를 흘려 다른 곳으로 향하셨다고 알려달라는 말씀인가요?”
“아니, 우린 청호성을 떠나 금원산맥 북쪽으로 갈 것인데 그것까지 정확히 알려주면 된다. 괜히 우리를 위한다고 거짓말을 했다가는 청호족에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니, 명심하고.”
“선배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엽소소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소주,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입니다. 선궁에서 조사를 나와 청호성을 들쑤시게 두느니 우리가 먼저 고발을 하는 것이 청호족에 유리합니다. 한 수사도 청호족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일 테고요.”
한참 침묵하던 구 장로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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