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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23화 (1,780/2,000)

2023화. 이상한 사람

*

“엽라 족장은 어떻더냐?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더냐.”

묵묵히 서 있던 한립이 허공에 물었다. 그곳에 빛의 문이 열리고 제혼이 나타났다.

“엽라 족장의 혼백도 맑아요.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조금 전 혼백 파동으로 보아도 이상이 없는 게 거의 사실만 말한 것 같아요.”

“힘을 써가며 한독을 제거해준 보람이 있구나.”

“아까 말씀하신 류 씨 성의 호족이라면 천호족인 낙아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이야기를 들어보니 청호족이 천호족의 분파일 수도 있겠네요?”

“호삼 등의 몸에서 느껴졌던 천호족의 혈맥의 힘과 엽소소의 청호혈맥이 상당히 비슷했다. 엽라 족장이 언급한 류미라는 선조가 천호족과 연관이 있는 것이겠지.”

“이제야 알겠어요! 이곳에 남으신 건 조용히 수련할 장소가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류 씨 천호족 일가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해 청호족을 한동안 보호해 주시려는 거죠?”

“일단은. 떠나기 전에 따로 도움이 될 만한 자원을 챙겨줘야겠지. 그보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요즘 불안한 느낌이 자주 들어서 바로 폐관 수련에 들어갈 생각이다. 뭔지 모를 위험이 다가오는 것 같아.”

한립은 답을 찾지 못할 문제는 제쳐두고 화제를 돌렸다.

“주인님의 감은 항상 맞아떨어졌잖아요. 저도 어서 수행을 높여 최소한 원기라도 회복해 둬야겠어요.”

제혼이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달라졌다.

한립은 여러 벌의 금제 진법을 꺼내 거처 주변에 펼쳐두고 그와 제혼의 방에 따로 몇 겹의 금제를 발동한 다음 폐관에 들어갔다.

처음 그가 한 일은 천청단 제련이었다.

* * *

그 시각, 청호족 의사 대전 안.

엽라, 구 장로, 엽소소가 모여 있었다.

“그 인족 수사를 청호성에 상주하게 한다고요? 정체도 모를 인물을 끌어들이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대부분 청호족인들이 인족에 악감정을 지니고 있어 말이 나올 거예요”

구 장로가 인상을 찡그렸다.

“폐관 수련을 하려는 것이지, 성 내를 돌아다니려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그쪽에서 먼저 행적을 숨겨줄 것을 청했으니까 이미 청호성을 떠난 것으로 소문을 내면 될 겁니다.”

엽라가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악독한 인족중 한명입니다! 언제 무슨 짓을 해서 우리 종족을 망칠지 모른다고요.”

“우리를 이렇게나 도와줬는데, 남아서 수련만 한다는 청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구 장로님, 한 선배님과 제혼 수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한 선배님처럼 강한 분이 청호성에 계셔주시면 앞으로 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고요.”

엽소소도 거들며 입을 열었다.

“……족장님과 소주의 뜻이 그러면 저도 동의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인족들이니 암암리에 감시해야겠어요.”

구 장로는 그들의 뜻이 확고한 것을 보고는 한발 물러섰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 일은 구 장로에게 맡길 테니, 신중한 인물을 붙여서 되도록 들키지 않도록만 해주세요.”

엽라는 합리적인 건의라 생각해 허락했다.

“알겠습니다.”

구 장로는 빠른 걸음으로 대전을 나섰다.

* * *

3년 후.

밀실 속 한립은 은색 화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화로 뚜껑이 들썩이고 다섯 개의 남색 단약이 화로 속에서 날아올라 그가 들고 있는 옥병 속으로 떨어졌다.

파란 하늘을 닮은 색을 지닌 단약에서 그윽한 향기가 났다. 그리고 주변에는 그런 옥병이 수십 개나 더 놓여 있었다.

태을급 단약 제련은 처음이라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진언보륜이 있고 연단 경험이 풍부해 가면 갈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졌다.

그는 손을 저어 화로의 정염불새를 불러들이고는 옥병 속의 천청단 한 알을 꺼내 삼켰다.

가부좌를 튼 그의 주변으로 금빛이 자욱하게 퍼져 석실을 비추었다.

* * *

세월은 물 흐르듯 쉼 없이 흘러 백 년 뒤.

금원선궁의 휘황찬란한 금색 궁전 안에는 하얀 비단 장포를 입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인이 황금용이 새겨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로 선궁 궁주 동방백이었다.

그는 그윽한 눈으로 앞에 선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화난 표정이 아닌데도 분위기가 살벌했다.

작은 키에 반듯하게 생긴 소년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눈빛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도 장로, 새로운 몸도 찾아주었는데 어째서 백 년 동안 한립을 찾아내지 못하는 건가?”

“궁주님, 그놈은 천송관에서 탈출한 후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느 거대성에도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깊은 산골 같은 곳을 찾아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소년이 긴장한 낯으로 해명했다.

그는 다른 이의 몸을 빼앗아 새 생명을 얻은 도기였는데, 아직 몸과 융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맑고 앳된 목소리가 어색했다.

“아직 원거리 전송진법이 있는 거대 성들에는 나타난 적이 없으니 금원선역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도기의 말을 듣고 있던 동방백이 눈을 가늘게 뜨고 뭐라 하려다 표정이 달라졌다.

“돌아왔군.”

바깥에서 누군가 알현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방백의 허락에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작고 마른 노인과 악귀 모양 대검을 등에 맨 흑포 거한이 나란히 들어왔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도기 옆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동방백의 질문에 흑포 거한과 회발(灰髮) 노인이 시선을 마주쳤다. 노인이 눈짓을 보내자 흑포 거한이 뜸 들이지 않고 말문을 뗐다.

“궁주님께 아룁니다. 명하신 대로 천송관에 다녀왔으나 전투 흔적이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남아 있는 법칙 파동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흑도, 너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단 뜻이냐?”

“전투의 흔적은 말끔하게 지웠지만 죽은 선궁 수사들의 잔혼은 남아 있었습니다. 귀도 비술로 그중 일부의 흩어진 기억들을 조사해 보았는데, 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전투 장면으로 보아 그자는 9백여 개의 현규를 뚫었더군요. 거의 대라급의 신체 능력을 지닌 셈입니다.”

흑도라 불린 흑포 거한이 자세히 보고했다.

“현규가 9백여 개라……. 90명의 금선들이 협력해 양의음양진을 펼쳤는데도 소용이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도기가 중얼거렸다.

“직접 싸워보고도 그것조차 몰랐단 말인가? 그래놓고 당장 잡아들일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다니!”

“그게……. 모두 제 불찰입니다.”

동방백의 얼굴에 드디어 노기가 드러나자 도기가 쩔쩔맸다.

처음부터 한립을 너무 경시해서 뭔가 이상하다 싶을 때는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어 상대를 살필 겨를도 없었다.

“도 장로만을 탓할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용모며 신법, 수행을 능숙하게 감추는 자라 저도 귀도 비술을 펼쳐 망혼들의 기억을 수집하지 못했으면 알아내지 못했을 정보입니다.”

흑도는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그밖에 알아낸 것은?”

“최소한 3가지 종류의 진령혈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산악거원, 진룡 그리고 유천곤붕의 힘을 발휘해 거꾸로 양의음양진을 조종해 진법을 펼치던 사람들을 으깨 죽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대라현선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지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저를 추격할 때 그놈의 체내에서 뇌붕의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것도 진령혈맥이었군요.”

도기가 문득 그때를 떠올리고 흑도의 말을 보충했다.

“기이한 일이로구만, 진령혈맥을 그것도 최상급의 진령으로 네 가지나 지니고 있으면 혈맥이 발작했을 것인데?”

동방백이 미간을 좁혔다.

회발 노인은 흑포 거한의 이야기를 들으며 들고 온 십여 개의 옥간 중 무언가를 고르고 있었다.

“거기다 시간공법을 수련해서 금색 보륜(寶輪)으로 주변 사람을 속박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걸려들면 사고조차 느릴 수밖에 없더군요.”

도기가 덧붙였다.

“진령혈맥에 대라현선, 지존법칙을 익힌 태을경 수사……. 이 모든 게 한 사람이 익힐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런 자가 있었으면 벌써 선역이 떠들썩해야 하는 데 행적을 찾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동방백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가 생각하는 보물을 지녔다면 짧은 시간 동안 수행이 높아진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궁주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회발 노인이 그를 불렀다.

“려운 장로, 의견이 있다면 말해보게.”

“의견이랄 것은 없고, 그간 곳곳을 떠돌며 흥미로운 소식들을 모아본 것인데 궁주님께서 그자를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갖고 왔습니다.”

동방백은 회발 노인이 바친 옥간 8개를 하나씩 미간에 대고 읽어 내려갔다.

주름이 점점 깊어지던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게 다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확실한가?”

“백 년 동안 수하들을 풀어 수집한 소식입니다. 제 수하들은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정보를 모으는 데만은 소질이 있는 자들입니다. 북한선역부터 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북한선궁이 촉룡도 백리염을 토벌할 때 그자가 려비우라는 이름으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겁니다.”

“제 아들 도우도 그쯤 살해를 당했습니다.”

도기가 가슴 아픈 얼굴로 말했다.

“촉룡도에 숨겨져 있던 시간공법인 <진언화륜경>을 가져다 수련했군.”

동방백은 그런 도기를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 후로도 려비우라는 이름이 종종 등장합니다만 하나같이 사소한 일들이라 행적을 숨기는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려한’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자도 역시 한립일 가능성이 크고요.”

려운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너무 기상천외한 일이 아닌가. 그 짧은 세월 동안 북한선역, 흑산선역, 흑토선역, 만황은 물론 금원선역까지 돌아다니며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거의 다 연관되어 있다니.”

“조사에 따르면 촉룡도 토벌, 명한선부의 출현, 진언문 유적의 재림과 그의 동선이 일치합니다. 공수 가의 공수천, 공수구 형제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고요.”

“진언문 유적 사건 이후에는 어디로 갔다가 갑자기 우리 금원선역으로 온 것이지?”

“이걸 먼저 봐주십시오.”

동방백의 질문을 듣고 려운은 또 다른 옥간을 꺼내 바쳤다.

“이건 풍청수 도조의 회계 기행을 담은 기록이 아닌가?”

“진언문 유적에 나타났던 이들을 회계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짐작으로는 한립도 아마 회계에 있었던 것 같은데, 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역으로 갔다가 다시 선계로 돌아온 듯합니다. 그다음 일은 아시는 대로이고요.”

려운이 마지막에 도기를 힐끗 보았다.

그의 말에 대전 안에 조용해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던 도기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겁먹은 듯 진땀을 흘렸다.

“윤회전과 밀접한 관계이고, 수많은 계역을 넘나들며 죽거나 다치기는커녕 수행이 급격히 상승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지?”

동방백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현재의 실력이나 수행이 느는 속도로 보아 무언가 특별한 신분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 윤회전 뿐만 아니라 마족에도 줄이 닿아 있는 것 같으니까요.”

흑도는 심사숙고해 답했다.

한립이 그 말을 들었으면 어이가 없어 울지도 웃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건드렸단 소립니까…….”

도기가 후회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궁주님께서는 어찌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려운이 동박백의 의견을 구했고, 흑도와 도기도 그의 말을 기다렸다. 황금용 의자에서 일어난 동방백이 몇 걸음을 거닐다 멈추었다.

“그자의 신분이나 배경이 어떻든지 그 물건은 포기할 수 없다. 행적을 찾아내면 경거망동하지 말고 보고한 뒤 명을 기다려라.”

“부득이하게 충돌하게 되면 어찌하면 좋을지요?”

려운이 또 물었다.

“충돌하게 되면 반드시 제압해야겠지……. 최대한 생포에서 물건의 행방을 알아내고 구운관으로 압송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해도 늦지 않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세 사람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잘 새겨듣거라. 이 일은 딱, 여기 있는 사람들만 알고 있다. 정보가 새어나가 천정 감찰사들이 알게 되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예!”

이번에는 세 사람 다 짧고 확실하게 답했다.

그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동방백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한립 같이 이상한 내력을 지닌 자는 처음 본데다, 아직 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게 너무 많았다.

더욱이 그런 자가 아직 천정의 주요 인물로 파악되지 않은 것이 더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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