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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22화 (1,779/2,000)

2022화. 도움

*

은색 불새가 한립의 소매 속으로 돌아가고, 남색 얼음이 사라지고 깨어난 청의 부인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엽소소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곧 소녀의 몸에서 푸른 빛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푸른 털이 자라고 체형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소소야!”

안색이 급변한 청의 부인이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다.

“움직이지 말게!”

한립은 두 손을 움직여 청의 부인과 엽소소의 체내에 각각 푸른 빛을 불어 넣었다.

“뭐 하는 짓이야!”

두 사람이 뻣뻣하게 굳어버리자 백의 여인이 버럭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펄럭이는 소매 속에서 다섯 줄기의 수정실을 뿜어 그녀마저 고정해 놓은 한립은 수결을 맺은 손으로 바닥의 진법에 핏빛을 방출했다.

웅!

핏빛 진법이 발동되어 청의 여인과 엽소소의 몸을 핏빛 실로 연결했다.

번득 사라져 청의 부인 옆에 이른 한립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굵직한 핏빛이 그의 손바닥에서 빠져나와 청의 부인의 몸을 돌며 푸른 혈맥 문양을 엽소소의 체내로 옮겨나갔다.

엽소소는 잃어버린 혈맥의 기운을 되찾아 짐승의 털이 사라지고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극심한 체력 소모로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진법을 멈춘 한립은 두 사람에게서 손을 뗐고 동시에 엽소소, 청의 부인 그리고 백의 여인도 자유를 되찾았다.

“이분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청의 부인이 오랜 병치레로 어지러워하자 엽소소가 부축을 했다.

“어머니, 제가 말씀드렸던 한 선배님이세요. 한 선배님, 저희 어머니세요.”

정신을 차린 엽소소도 빠르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한 수사셨군요. 저는 청호족 족장 ‘엽라’라 합니다. 제 한독을 제거해주신 데다 소소가 청호혈맥을 회복하도록 도움을 주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앞으로 저희 청호족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청의 부인이 정중히 인사를 하자 곁의 백의 여인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손님이 된 도리로 청호족에 머물면서 이 정도 도움은 드려야지요.”

“한 선배님, 너무 대단하세요. 간단히 어머니의 한독을 해결해 주시고 제 혈맥의 힘도 돌려주셨잖아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엽소소는 한립을 거의 숭배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나 역시 혈맥의 힘에 관해 연구했었고, 다행히 엽라 족장님과 엽 수사의 혈맥의 힘이 아직 완전히 섞이지 않아서 가능했던 일이다.”

한립은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한 수사, 족장님과 소주를 구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상한 일이 있어 여쭈려 합니다. 이곳은 청호족의 금지 구역인데 어찌 들어오신 겁니까?”

백의 여인이 다가와 감사 인사를 빌미로 그를 추궁하려 했다.

“한 수사, 이쪽은 장로 엽구입니다. 엽구 장로, 귀빈께 실례는 삼가세요.”

엽라가 서둘러 그녀의 신분을 밝히고 작게 질책했다.

“실례라뇨,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밤에 딱히 할 일도 없고 달이나 구경하러 나왔다가 이곳에서 원기 파동이 느껴져 무슨 일인지 살피던 중이었습니다. 상황이 위급해 보여 허락도 구하지 않고 끼어들었으니 마땅히 제가 사과를 해야지요.”

한립은 가볍게 웃음 지었다.

“그러셨군요. 정말 감사드려요.”

엽소소가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너 이 녀석, 혈맥의 힘을 옮기는 큰일을 상의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벌이다니! 한 수사께서 안 계셨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기나 하는 것이야.”

엽라의 꾸중에 고개를 숙인 엽소소가 입을 내밀었다.

딸아이가 반성하지 않자 엽라는 눈에 힘을 주었지만 한립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대놓고 혼내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일로 귀한 손님에 대한 대접이 부족했습니다. 소소가 배웅해드릴 것이니 들어가 쉬시지요. 내일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한립이 떠나고 엽소소가 그를 따라 지하 통로를 빠져나왔다.

한립은 영약 밭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는 길에 보니 상당히 품질이 좋은 영약들이 자라고 있던데 청호족이 영약 재배에 원래 능한 것이냐?”

“와, 주변에 금제가 펼쳐져 있는데도 뭐가 있는지 알아보신 거예요? 하긴 한 선배님의 실력에 겨우 이런 금제 때문에 불편하실 일은 없겠죠.”

어미가 완쾌되어 마음이 가벼워진 엽소소가 쾌활하게 말했다.

“제가 과장하는 게 아니라, 영약 재배로는 금원산맥 전체에서도 저희 청호족이 최고예요!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세요? 여기 목록이 있으니까 무엇이든 말씀만 해주시면 사람을 시켜 보내드릴게요.”

엽소소는 뿌듯하게 답을 하고는 옥간을 꺼내 주었다.

“안 그래도 몇 가지 필요한 영약이 보였는데, 사양하지 않고 받겠네.”

한립은 옥간의 내용과 밭에 심어진 영약들을 비교해 보았는데 소녀가 내준 목록 그대로였다.

“저기……. 구 장로님이 이상하게 굴어도 이해해 주세요. 한 선배님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구 장로님의 부모님은 물론 동생들까지 전부 인족 수사에게 목숨을 잃어서 인족 전체를 무척 적대시하시거든요.”

“그랬군.”

그제야 한립도 백의 여인의 과한 적의를 이해했지만 어차피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 * *

지하 석실 안, 벽에 펼쳐진 금제들이 사라졌다.

“인족 수사들을 증오하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청호족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도와준 한 수사에게는 되도록 그런 내색을 삼가세요. 최소한 예의는 차려야 하지 않겠어요.”

길게 한숨을 내쉰 엽라가 당부했다.

“저자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여기에 왔는지는 아십니까?”

냉소를 흘린 구 장로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자가 이상한 파동을 감지하고 살피러 왔다고 했지요? 몇 겹의 금제를 뚫고 파동을 느꼈다고 해도, 분지에 펼쳐둔 적멸허무대진(寂滅虛無大陣)을 지날 때 무언가 반응이 있었어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분명 다른 목적을 가지고 소주를 몰래 따라와 지켜보고 있었을 거예요.”

“일리가 있지만 전부 추측에 불과합니다. 또 여기까지 소소를 따라왔다고 해도 청호족에 악의는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당장 아까만 해도 한 수사가 나서지 않았으면 우리 셋은 이곳에서 다 죽었어요. 우리가 없는데, 남은 청호족이 그가 무엇을 요구하든 거절할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믿고 싶으시다면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이든 내 몸의 한독을 가볍게 없앤 걸 보면 우리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절대 밉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만 명심해 두세요.”

“그렇지만……. 알겠습니다. 그래도 청호족에 해를 끼치면 그때는 제 목숨을 걸고 그자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구 장로의 아픔을 알기에 엽라가 더는 뭐라고 하지 않고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족장님, 막 한독을 제거해 아직 기력을 되찾지 못하셨을 텐데 어서 쉬시지요. 저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구 장로가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앉은 엽라는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 * *

이튿날 아침, 엽라와 엽소소가 한립이 머무는 거처로 찾아왔다. 그러나 구 장로는 보이지 않았고, 화지 공간에서 수련 중인 제혼도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청호성은 외진 곳에 있어서 금원산맥의 다른 번화한 성들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귀한 분을 모실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이런 협소한 공간을 내드려 부끄럽습니다.”

엽라가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밤새 기운을 모은 덕분인지 그녀의 안색은 훨씬 나아 보였다.

“원래 이런 고즈넉한 환경을 좋아합니다.”

한립은 그들을 방으로 들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청호족이 영약을 기르는데 능하다던데, 이것들을 좀 구했으면 합니다.”

엽라의 말에 한립은 준비한 옥간을 건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천청단(天靑丹)’이라는 태을급 단약의 재료를 모아왔는데, 대량의 선원석에 회계, 마계, 적린공경에서 모은 귀한 재료들을 지니고 있어서 대부분을 윤회전 가면을 통해 구했다.

그런데 운 좋게 아직 찾지 못한 몇 가지 영약을 청호성에서 발견한 것이다.

엽라는 엽소소에게 영약 밭일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목록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저도 수량이 많고 너무 오래된 영약들을 원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냥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값을 치를 것이니 이것을 가져가시지요.”

한립은 저물법기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저와 제 딸아이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영약들을 구해 드려야겠으나, 최근 청호족 사정이 좋지 않고 외부의 견제를 많이 받는 터라 염치 불고하고 이 선원석들은 받아두겠습니다.”

엽라는 의식으로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민망해하면서 말했다.

“그런 말 마세요. 원하는 물건을 얻고 값을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한립은 손을 저었다.

“소소야, 어서 사람을 시켜 원하시는 재료들을 구해오거라.”

“예.”

엽라의 명에 엽소소가 대답을 하고 방을 나섰다.

“무례인 줄 알면서도 확실히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희 청호성에 오신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요?”

엽라는 딸 아이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한립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조용하고 안전한 성안에서 한동안 폐관 수련을 하고자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그냥 수련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청호족의 다른 물건이나 보물은 제 눈에 차는 것이 없을 테니, 그쪽으로는 마음 푹 놓으시고요.”

“그렇군요. 한 수사 같은 분이 청호성에 남아 수련을 하신다면 저야 환영입니다. 얼마든지 계셔도 됩니다.”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저와 제혼에 대한 이야기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만 신경 써 주세요. 그러는 것이 저희뿐 아니라 청호족에게도 좋을 겁니다.”

한립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마쳤다.

“물론입니다.”

순간 멈칫한 엽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지어 편해진 마음으로 금원산맥에 대해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책에서 보니까 금원산맥의 여러 세력 중 요족은 많지 않고 거의 다 외부에서 이주해 왔다고 하더군요. 특히 나무 속성의 신통과 환술을 쓰는 청호족은 금원산맥이 살기에 그리 좋지 않을 텐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까?”

“맞습니다, 저희도 아주 오래전에 멀리서 이주해 여기에 뿌리를 내렸지요.”

“혹시 어디서 오신 것인지 물어도 될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남아 있는 경전에도 정확히 적혀 있지 않고, 어느 선조께서 수기로 남기신 기록에만 금원대륙 남쪽에서 올라왔다고만 쓰여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오래전 다른 지역에서 류 씨 성을 쓰는 호족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과 청호족의 느낌이 비슷하단 생각에 물은 것입니다.”

한립은 미소를 지었다.

“류 씨 성을 쓰는 호족이요? 저희 청호족이 막 이곳에 도착했을 때 ‘류미’라는 여인이 종족의 일원이 되어 영약을 기르는 법을 전수해 주셨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와 소소도 그분의 후대라 할 수 있고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남겨 놓은 글이 없어 신비로운 선조 중 한 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분과 한 수사께서 말씀하신 류 씨 성의 호족이 연관이 있는 걸까요?”

눈을 반짝인 엽라 족장이 자신의 추측을 말해주었다.

“글쎄요. 저도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터라 영약을 기르는데 능했는지는…….”

“그분에 관해 제게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엽라의 물음에 한립은 생각을 정리해서 만황구역을 지나가다 류 씨 호족을 만났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엽라가 말이 없어졌을 때, 엽소소가 저물법기를 들고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한 선배님. 받아주세요.”

내용물을 확인한 한립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방해하지 않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엽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리둥절한 표정의 엽소소와 함께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한립은 그들을 배웅하고는 곧장 방 안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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