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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21화 (1,778/2,000)

2021화. 혈육의 정

*

늦은 밤 따스한 달빛이 내리는 청호성.

다들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엽소소가 성 동쪽의 울창한 숲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궁장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푸른 옥관까지 쓰고 있어 청호족 소주의 위엄이 느껴졌다.

엽소소는 수풀 앞쪽에 부서진 푸른 여우 조각을 향해 열 손가락을 모아 경건하게 예를 올리고 손끝을 그어 피를 흘려보냈다.

웅.

푸른 여우 조각상의 눈에 빛이 들어와 푸른 빛이 허공을 갈랐다.

쉭!

전방의 허공이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갈라지자 엽소소는 주변을 살피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이 하얗게 변한 엽소소는 다음 순간, 수십 리밖에 되지 않는 분지에 들어서 있었다.

정갈하게 밭을 갈아 다양한 영약과 영초를 심어 놓은 분지 곳곳에서 금제 보호막이 반짝였고 짙은 약 향이 느껴졌다.

엽소소는 그런 영약밭은 신경 쓰지 않고 날아갔다.

팟.

그녀 뒤쪽 허공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나타나 한립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각양각색의 영약들은 그가 화지 공간에 심어 놓은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세월 동안 공을 들였고, 장천병이 있어 겨우 그 정도 규모의 영약밭을 꾸렸는데 청호족 같은 작은 종족이 이런 곳을 지니고 있다는 건 놀라웠다.

* * *

분지 깊은 곳으로 날아간 엽소소 앞에 청록색 연못이 나타났다.

연못 옆 푸른 바위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밀자, 그 아래로 지하로 통하는 기다란 계단이 나왔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 커다란 하얀 구슬들이 박혀 빛을 발하는 석실 앞에 섰다.

석실로 들어서자 백옥 침상에 푸른 옷을 입은 젊은 부인이 누워있었는데, 놀랍게도 하반신이 남색 얼음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뼈가 시릴 정도로 냉기가 가득한 그곳에서 청의 부인은 고통을 참고 있었고, 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은 그 옆에 서서 어깨를 붙들고 푸른 빛을 불어 넣고 있었다.

백의 여인은 금선 초기의 존재였다.

“소주, 돌아오셨군요.”

여인은 청의 부인에게서 손을 떼고 곧바로 인사를 했다.

침상의 부인도 눈을 뜨고 엽소소를 바라보았다.

“소소야, 왔구나.”

병중에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청의 부인의 눈빛이 따뜻해 보였다.

“어머니!”

당장 침상으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은 엽소소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난 괜찮다. 최근 냉기의 침식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구 장로 덕에 버틸만 해. 그보다 이렇게 오래 어딜 다녀온 것이야? 무슨 일은 없었고?”

“그게, 금서성에 가서 몇 가지 물건을 교환해 오다 금마종 것들을 만나 위험해 처했는데 운 좋게 두 선배님을 만나…….”

엽소소는 거짓과 진실을 섞여 간단하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뭐라고요? 인족 수사를 청호성에 들였단 말입니까? 다른 이들은 몰라도 족장께서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탓인데…… 인족 수사들을.”

듣고 있던 백의 여인이 싸늘하게 질책했다.

“구 장로님, 인족 수사가 어머니를 이렇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인족 전체를 적대시할 건 아닌 것 같아요. 금원선역에 얼마나 많은 인족이 들어와 있는데 청호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들과도 교류해야 한다고요. 청호족을 위해 사사로운 은원보다는 종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 고려할 때예요.”

엽소소도 어머니를 해친 인족이 밉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탄식하듯 말했다.

대청 바깥에서 그림자로 변해 듣고 있던 한립이 그녀의 말에 탄복했다.

살다 보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구 장로가 더 뭐라고 하려는데 청의 부인이 손을 들어막았다.

“구 장로, 이 일은 소소의 말대로 하세요. 금선급 실력자와 친분을 터놓으면 앞으로 청호족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부상당했던 일은 그만 신경 쓰시고요.”

“족장님과 소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따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엽소소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소소야, 다양한 부족과의 교류가 청호족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네 안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이리된 마당에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어머니는 반드시 괜찮아지실 거예요!”

청의 부인의 말에 엽소소가 격동해 외쳤다.

“그래, 꼭 건강해질 것이니 걱정 말거라.”

그녀는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이미 자포자기 한듯 보였다. 그 모습에 고개를 숙인 엽소소의 눈빛이 결연해지고 번개처럼 어미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너…….”

놀란 청의 부인이 눈을 부릅떴다가 눈이 풀려 기절했다.

“소주, 뭐 하시는 겁니까!”

백의 여인이 놀라 소리쳤으나 엽소소는 대답 없이 혈홍색 붓을 꺼내 침상 주위에 재빨리 진법을 그려 넣으며 품에서 재료들을 꺼내 놓았다.

백의 여인은 대체 뭐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으나 그녀의 심각한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흘러 해가 떠오르려 할 때 드디어 백옥 침상 주변의 복잡한 진법이 완성되었다.

“이건…….”

“화혈귀원진(化血歸元陣)이에요.”

“예? 화혈귀원진은 혈맥의 힘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역천의 진법입니다! 설마 자신의 몸에 있는 청호 혈맥의 힘으로 족장님의 한기를 밀어내려는 것입니까? 절대 안 될 말입니다. 화혈귀원진을 펼쳤다가는 다시는 혈맥의 힘을 되찾을 수 없고 그 길로 수행도 떨어져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몰라요!”

“어머니만 살릴 수 있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엽소소는 담담하다 못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한립도 마음이 움직였는지 미간을 좁혔다.

“……꼭 하셔야겠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수행도 높으니 성공 가능성도 클 거예요.”

“아뇨, 제가 구 장로님보다 수행은 낮아도 청호혈맥은 정순해요. 그리고 화혈귀원진은 서로 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펼쳐야 효과가 좋고요.

“허나…….”

단호한 엽소소의 말에 백의 여인도 말문이 막혔다.

“한독(寒毒)이 만만치 않아 어머니를 살릴 가능성은 5할밖에 되지 않아요.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우리 둘 다 여기서 목숨을 잃게 되겠지만, 금선경 존재이신 구 장로님이 계셔주시니 청호족은 괜찮을 거예요. 구 장로님께서 잘못되시는 거야말로 일족의 큰 불운이 되겠죠.”

엽소소의 말에 백의 여인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 이 일은 제가 해야만 해요. 저와 어머니가 떠나면 청호족은 구 장로님께 부탁드릴게요.”

이렇게 말한 소녀가 핏빛 진법으로 들어서려는데 백의 여인이 옷깃을 붙들었다.

“구 장로님…….”

“아까 청호족을 이끄는 우리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전 종족의 이익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소주께서는 재능이 뛰어나시고 청호혈맥도 정순하셔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따지면 저나 족장님보다 훨씬 청호족을 이끌기에 적합한 분입니다. 족장님의 상태가 악화되어 화혈귀원진으로 치료할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무턱대고 이리하시겠다니, 족장님께서도 이런 일은 원치 않으실 거예요.”

“아뇨, 사사로운 감정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청호족을 위해 이성적으로 판단한 거예요. 어릴 적부터 수련이 순조롭기는 했으나 이제 겨우 진선 중기인 제가 정말 금선이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진선 한 명을 희생해 금선을 살릴 수 있는 확률이 5할이나 되는데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엽소소가 천천히 손을 뿌리치는데 백의 여인은 순간 뭐라고 더 설득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저를 구하시려다 천수종(天水宗) 악인들에게 부상을 당하시고, 구 장로님도 그 일로 피해를 입으셨어요. 어머니가 정말 돌아가시면 저는 평생 죄책감 속에 살며 그것이 심마가 되어 결국 금선에 이르지 못할 것 같아요. 진선경 후기에 이르는 것도 헛된 꿈이 될지도 모르고요. 구 장로님, 부탁드려요!”

엽소소는 탄식하며 물러서는 백의 여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진법 안으로 들어가 청의 부인의 머리맡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특이한 수결을 맺은 소녀의 입에서 신비로운 주문이 흘러나왔다.

휘잉.

석실 안에 바람이 불고 핏빛 진법이 눈부신 빛을 머금어 강렬한 파동을 퍼트렸다.

안색이 달라진 백의 여인이 서둘러 석실 벽을 향해 수결을 맺은 손을 뻗어 보호용 금제를 일으켰지만, 미약하게 기운이 흘러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백의 여인은 그런 것까지는 신경 쓰지 못하고 혈진 안의 두 사람을 주시했다.

쉬쉬쉭!

진법에서 핏빛 빛의 실들이 떠올라 엽소소의 몸을 휘감고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한립은 이채를 띠고 그걸 지켜보았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푸른 빛을 방출하는 엽소소는 여전히 주문을 읊는 중이었다.

소녀의 푸른 빛이 문신처럼 전신으로 퍼져 강렬한 혈맥 기운을 드러냈다.

동시에 위엄 있어 보이는 푸른 여우 허상이 떠올랐는데 꼬리가 두 개뿐이었다.

엽소소는 손을 뻗어 청의 부인 이마에 대었고 손바닥을 타고 핏빛 실들이 빠져나와 그대로 주입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엽소소의 몸에 난 푸른 문신들은 옅어지고 혈맥 기운을 주입받는 청의 부인의 몸으로 문신이 옮겨가고 있었다.

허공에 나타난 푸른 여우 허상이 점차 희미해졌다.

희색을 드러낸 엽소소는 다른 손으로 수결을 맺어 청의 부인의 단전 위에 푸른 빛을 방출했다.

쿵.

푸른빛이 몰려들어 화염층을 이루고 청의 부인의 하반신을 타고 올라오는 얼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백의 여인은 그걸 보고 약간 긴장이 풀린 듯했으나 어둠 속 한립은 보랏빛 눈동자를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푸른 화염이 남색 얼음을 허리에서 종아리까지 밀어냈다.

남색이 옅어지기 시작한 종아리를 보면 곧 한독을 전부 밀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남색 얼음이 녹는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더니 화염에 버티기 시작했고, 엽소소의 푸른 문신이나 푸른 여우 허상은 거의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불현듯 극한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남색 얼음으로 청의 부인을 꽁꽁 옭아매고 있었다.

지면의 핏빛 진법은 물론 엽소소의 몸에까지 차가운 기운이 타고 올라왔다.

창백해진 소녀는 기운이 거의 쇠해 당황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백의 여인은 급히 석실 금제를 발동하려 했다.

엽소소가 그런 그녀를 돌아보면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백의 여인이 걸음을 멈추자 침상에 누워 있던 청의 부인이 한기에 자극을 받아 깨어났다.

그녀는 주변을 살펴 상황을 파악하고는 기합을 넣으며 스스로 푸른 화염에 힘을 실어 잠시 남색 얼음의 침식을 늦추었다.

“구 장로, 어서 소소를 데리고…….”

청의 부인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남색 얼음의 맹공이 시작되어 푸른 화염을 펑, 흩어버렸다.

그녀의 가슴까지 타고 올라간 얼음이 아예 전신을 집어삼키려 들었고, 엽소소도 몸 절반이 얼어붙어 있었다.

눈빛이 흔들리던 백의 여인이 이를 악물고 그들을 구하려 달려들려는데 검은 그림자가 그녀 앞을 막아섰다.

바로 한립이었다.

“인족 수사!”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보는 백의 여인의 눈에 증오심이 엿보였다.

“두 사람을 살리고 싶으면 얌전히 거기 서 있게.”

한립은 침착한 목소리로 충고하고는 한 손을 들어 푸른빛을 방출했다.

그러자 그 즉시 푸른 화염은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확 살아나 맹수처럼 남색 얼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걸 본 백의 여인도 손에 하얀빛을 응결해 놓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한립은 그러든 말든 소매를 털어 또 다른 푸른 빛줄기를 화염에 불어넣어 남색 한기를 빠르게 제압해나갔다.

엽소소가 거의 생명력을 쥐어짜 내 간신히 몰아내던 남색 한기가 한립의 대수롭지 않은 손짓에 다시 종아리까지 밀려 내려갔다.

그의 손에서 마지막으로 은색 불덩이가 날아가 불새로 변해 그 안으로 사라졌다.

한기 속에서 맑은 지저귐이 들린 후 작열하는 열기가 석실을 가득 채웠다.

남색 한기가 터지며 사라진 것은 물론, 뜨거운 열기가 석실 전체의 온도를 끌어올렸다.

백의 여인은 움찔 놀라며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오래지 않아 은색 불새가 부리에 주먹 크기의 남색 화염을 물고 나타나 훅, 들이 마셔버렸다.

맛좋은 음식을 먹은 것 마냥 신이나 지저귀는 게 퍽 신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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