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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20화 (1,777/2,000)

2020화. 세월

*

한편 그물에 잡힌 물고기 신세인 청의 소녀는 그들의 대화에 열이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호막이 약해지고 있었다.

다섯 명의 도인들은 들고 있던 깃발에 피를 뱉어 흡수시켰고, 발생되던 금색 빛의 고리들을 더욱 굵게 만들었다.

결국 소녀를 지켜주던 푸른 보호막이 펑, 하고 깨져나갔다.

희색을 드러낸 도인들 중 각진 얼굴 사내가 음흉한 표정으로 소녀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주인님!”

이를 지켜보던 제혼이 도인들의 행동에 화가 나서 가만히 있는 한립을 재촉했다.

“걱정 말거라. 오늘 화를 당하는 것이 저 아이는 아닐 테니까.”

담담히 미소 짓는 한립을 보고 제혼이 움찔했다.

비틀거리는 것 같던 청의 소녀는 각진 얼굴 도인이 다가서자 눈빛이 달라졌다.

쉬쉬쉿!

그녀의 소매에서 푸른빛들이 날아가 각진 얼굴 도인의 급소를 꿰뚫었다.

그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바닥에 털썩 쓰려져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마지막 반격이었던지 청의 소녀의 기운이 더 약해졌다.

“대사형! 요녀를 죽여라!”

나머지 네 명이 그걸 보고 각종 선기 보물로 공격을 퍼부었다.

소녀는 두려운 기색 없이 등 뒤에 숨긴 손으로 수결을 맺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 순간, 푸른빛이 그녀의 머리를 지나갔다.

쇄도하던 공격들이 탄탄한 천처럼 펼쳐진 푸른빛에 빠른 속도로 튕겨나가 네 도인을 관통했다.

퍼퍼퍼펑!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흠뻑 몸을 적셨다.

깜짝 놀란 청의 소녀 앞에 한립과 제혼이 나타났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그녀는 두 사람의 방대한 기운을 감지하고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예를 올렸다.

“사소한 일인데 그럴 것 없어요.”

제혼이 얼른 어둑한 기운을 보내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선의로 한 행동이라 청의 소녀는 반감을 느끼지 않고 빙긋 웃으며 등 뒤의 손을 풀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금원산맥의 어느 세력에 속해있지? 저들은 또 누구고.”

한립은 힐끗 제혼을 보고 소녀에게 물었다.

제혼의 체면을 보아 목숨을 살려줄 수는 있어도 확인할 건 해야 했다.

“저는 엽소소라 합니다, 선배님. 청호족 사람이지요. 저들은 금마종 제자들인데 저희 종족과는 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금교수를 사냥하느라 원기를 상한 틈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는데, 두 분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한립은 제혼 때문에도 그랬지만 그녀가 호족(狐族)인 것을 보고 류낙아가 있는 천호족과 연관이 있을까 도운 것이었는데 괜한 생각을 한 듯했다.

“금마종 사람들은 수가 얼마나 되지? 세력은 어떠하고?”

“일대에서는 가장 큰 세력으로 문하의 제자가 만 명이 넘고 금선경 수사를 몇 명이나 보유하고 있습니다. 가장 강한 태상장로의 수행이 금선 후기라 알려져 있습니다.”

엽소소는 솔직히 답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의 질문에 답하느라 버티고 있던 엽소소가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다 이를 악물고 바로 섰다.

“부상을 당했으니 돌아가 치료를 하거라.”

그걸 본 한립은 손을 들어 푸른 빛 한 줄기 날려보냈다.

엽소소는 방대한 양의 따뜻한 기운이 주입되며 부상이 순식간에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단전의 요핵까지 밝아지며 크기도 조금 커진 듯했다.

엽소소는 감사 인사를 할 틈도 없이 기운을 다스리느라 가부좌를 틀고 공법을 운용했다.

“괜찮을까요?”

제혼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요력을 과도하게 써서 근본이 흔들릴 것 같기에 화근을 없애준 것이다. 요력만 회복하면 될 것이야. 그런데 이제보니 엽소소가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다른 이들에게 이리 대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혼백의 기운이 깨끗한 것이 마치 산에서 솟아나는 샘물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같이 있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요.”

“혼백의 기운? 그걸 감지한다고?”

처음 듣는 소리에 한립이 놀란 기색을 했다.

“혼절해 있는 동안 원기는 상했지만 법칙 수행은 진일보해서 사람마다 각기 다른 혼백 기운을 감지할 수 있게 됐어요. 그걸로 사람의 성격이나 천성을 짐작할 수 있고요. 이제 누구도 제 앞에서 본성을 속일 수 없는 거죠!”

제혼은 뿌듯한 얼굴로 답했다.

“그렇다면 내 혼백 기운은 어떠하냐?”

“주인님의 혼백 기운은 워낙 방대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네 글자로 요약하면 ‘광명정대(光明正大)’해요.”

“광명정대라,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말이구나. 그냥 양심에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수련의 길은 험난해서 자비롭고 손속이 모질지 못한 사람은 오래 살아남기 어렵잖아요. 어떤 때는 과감한 판단을 내려야 목숨을 건질 수도 있고요. 그래서 겉보기에는 냉정해 보이시지만 자신의 원칙이 있고 이에 위배되지 않게 행동하시는 것 같아요. 그것만으로도 어려운 일인걸요.”

“잠들어 있는 동안 생각이 많이 컸구나.”

한립이 싱긋 미소를 짓고 금마종 도인들의 저물법기로 눈을 돌렸다.

겨우 진선인 그들의 물건이 눈에 차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지닌 금원산맥 관련 경전이 필요했다.

한립이 경전을 읽는 동안 제혼은 방해하지 않고 옆에 서 있었다.

시간이 흘러 엽소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활기가 넘치고 기운도 예전보다 강해져 있었다.

“목숨을 구해주신 데다 원기를 소모해 도움을 주시다니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무엇이든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별일 아니니 마음에 둘 것 없다.”

엽소소의 말에 한립이 손을 저었다.

“괜찮으시면 저희 청호족이 머무는 청호성으로 가서 며칠 지내심이 어떨지요? 제가 감사를 표하고 싶어 그럽니다.”

기대감 어린 엽소소를 보고 제혼은 말없이 한립을 보았다.

“그러지. 어차피 금원산맥을 유람하고 있었을 뿐,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한립은 두 여인이 모두 자기만 바라보자 흔쾌히 답했다.

“다행입니다! 선배님들 저를 따라오십시오.”

엽소소가 입에서 푸른 화염을 뿜어 금마종 사람들의 시체를 태우고 선박 법보를 불러냈다.

그녀의 빈틈없는 일 처리에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두 분 선배님의 성함도 알지 못하네요.”

그들을 태우고 가면서 엽소소가 물었다.

“난 한립이라 하고, 저 아이는 제혼이라 한다. 선배라 부를 것 없이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되고.”

눈을 반짝인 한립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댔다.

이제 수행도 늘었고 그동안 돌아다니며 가짜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싫증이 났다.

“한 선배님과 제혼 선배님셨군요. 생명의 은인이신데 그리 대할 수는 없지요. 청호족이 요족이라고 해도 예는 압니다.”

엽소소가 정중하게 답했다.

“엽 낭자, 구한 건 주인님이지 나는 아니니까. 난 선배라 부르지 말고 제혼이라고 불러요.”

제혼이 배시시 웃으며 엽소소의 손을 잡았다.

“아…….”

엽소소는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다 한립의 표정을 보고 안심했다.

제혼은 어린아이처럼 처음 온 산맥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엽소소는 상냥하게 답하느라 두 사람은 수시로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박이 산간 평지에 도착했고, 그곳에 금색 성이 세워져 있었다.

산만한 성은 모든 재료들이 금빛이라 주변의 금색과 잘 어우러졌다.

성 주변의 금색 돌기둥 위에 수백 개의 커다란 구슬들이 올려져 있었는데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었다.

“소주, 돌아오셨습니까!”

마차가 그 앞에 서자 푸른 장포를 입은 청호족 사람들이 나타났다.

맨 앞에서 달려온 마르고 키 큰 사내가 반색을 하다 한립과 제혼을 보고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저들은…….”

“내가 모셔온 귀빈들이시다. 내 목숨을 구해주신 분들이니 무례를 범하지 말도록.”

엽소소의 말에 마른 사내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귀한 손님들이셨군요.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마른 사내가 포권을 했다.

제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한립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성을 살폈다.

성 아래 꽤 강한 나무 속성 영맥이 흐르고 있었다.

금속 속성과 나무 속성의 원기가 충만한 곳이라 청호족이 좋은 곳을 찾아 깃든 것 같았다.

“저건 금오석(金烏石)입니다. 금원산맥 깊은 곳에서 나오는 광석인데 금속수의 침입을 막을 수 있어 대부분의 성들이 저걸 이용해 성벽을 짓지요. 그렇지 않았다가는 금속수 때문에 하루도 안심하고 살지 못할 거예요.”

엽소소가 그의 시선이 성벽으로 향한 것을 보고 설명해주었다.

금오종 수사들이 지닌 서책에서 관련 내용을 보았던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사내는 한립과 제혼의 수행을 가늠해보고는 안색이 달라졌다.

“선배님들 저를 따라오시지요.”

사내가 공손히 길 안내를 했다.

“엽평, 어머니는 어떠시지?”

엽소소가 그 옆으로 가서 전음으로 물었다.

“여전하십니다. 벽파담(碧波潭)에서 요양 중이시고 구 장로께서 옆에서 시중을 들고 계셔서 악화는 되지 않으셨고요.”

“다행이네. 이번에 화혈귀원진(化血歸元陣) 재료를 다 모아왔으니 어머니를 치유할 수 있을 거야!”

엽평은 엽소소의 말에 기뻐하기보다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한립이 힐끗 그들을 보았다.

전음으로 대화를 나눴지만 그의 귀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곧 청호성이라고 적힌 성문에 이르렀으나 엽소소가 있어서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나무로 지어진 건축물들은 다른 성에서 보았던 것과는 양식이 달랐다.

어떤 건물들은 나무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지었기에 자연의 기운이 충만하게 느껴졌다.

“저희 청호성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독특한 풍경을 지녔지요?”

엽소소가 웃음 지었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제혼을 보니,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제혼은 이전보다 훨씬 명랑해져서 문득문득 금동을 떠올리게 했다.

금동과 흰둥이는 지금쯤 어디에 있으며 원하던 것을 찾았는지 궁금했다.

“청호족 족장이 제 어머니세요. 최근 몸이 안 좋으셔서 직접 두 분을 맞이하지 못하시는 점 이해 부탁드릴게요.”

“상관없다. 우리가 먼저 당연히 주인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게 도리겠지만 몸이 좋지 않다니 요양을 방해하지 않으마. 청호성 풍경이 독특한데 엽 수사가 구경시켜 줄 수 있겠지?”

“물론이죠.”

엽소소는 한립의 요청에 신이나 답하고 엽평 등을 물린 다음 직접 성을 안내했다.

수천 리에 달하는 청호성 안에는 물줄기도 몇 개 흐르고 야트막한 산도 있어서 구경하기가 나쁘지 않았다.

* * *

어느새 해가 지고 엽소소는 그들을 데리고 성 중심부의 커다란 궁전으로 데리고 갔다.

궁전 앞에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푸른 여우 조각상이 옥석으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뒤로 길게 늘어트린 9개의 꼬리가 장관이었다.

“천호전(天狐殿)입니다. 청호족 족장이 거주하며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 쓰이는 곳이에요.”

“천호전? 청호족이 지은 건물인데 어찌 청호전이라 짓지 않고.”

한립은 ‘천호’라는 단어에 흥미를 보였다.

“선조께서 정하신 이름이라 그 의미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천호전 옆에 조용한 별채가 몇 곳 있는데 귀한 손님들이 오시면 그곳으로 모십니다. 해가 저물어가니 한 선배님과 제혼 수사도 들어가 쉬시지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지.”

엽소소는 청호족 시종 둘을 불러 별채 바깥을 지키게 하고 떠났다.

별채 안으로 들어가니 푸른 돌을 깐 길이나 주변의 꽃밭과 푸른 대나무 등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대청에 앉았다.

“여기서 폐관 수련을 하실 생각인 거죠?”

제혼이 다가와 물었다.

“어찌 그리 생각했더냐?”

“그럴 게 아니라면 주인님 성격에 엽소소를 구하고 바로 떠나셨을 거잖아요. 원기를 써서 수행이 늘도록 돕고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으셨을 테고요.”

“청호족은 금원산맥의 작은 세력에다가 외진 곳에 성이 위치해 확실히 몸을 숨기고 수련하기 나쁘지 않은 곳이다.”

“저도 좋아요! 그런데 청호족 사람들이 외지인을 배척하는 눈치던데 괜찮을까요? 실력을 드러내면 억지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니 안심하고 있거라.”

제혼의 걱정에 한립이 웃으며 성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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