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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19화 (1,776/2,000)

2019화. 혼란

*

수결을 맺은 백의 사내가 구슬을 가리키자 구슬이 밝게 빛나며 한립과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주선방에 오른 지 2, 3천 년 밖에 안 되었을 텐데 어찌…….”

“당시에도 수행을 숨기고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금선이었던 제 아늘 녀석이 당한 것도 그 때문일 테고요.”

“그럴 리가, 천정이 면밀히 조사한 내용에 그렇게 오차가 클 리가 없지.”

“하지만 조사가 잘못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아닌지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법체쌍수로 현선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무슨 역천의 보물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도기는 짐짓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생각이 난 것인가?”

“예, 제 아들 도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도우가?”

“북한선역에서 려비우와 악연을 맺고 제게 관련 소식을 전했는데 시간법칙을 지닌 보물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자세히 알아볼 생각을 못했는데 그게 그 자가 급격히 강해진 이유가 아닐지요?”

“자세히 말해보게.”

백의 사내는 정신이 번쩍 든 표정이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아직 자료는 보관하고 있으니 사람을 시켜 가지고 오라 하겠습니다.”

도기는 전신 법기를 꺼내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잠시 후, 금포를 입은 청년이 바깥에서 날아들어 그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궁주님과 도 백부임을 뵙습니다.”

“내가 말한 물건은 가지고 왔더냐?”

“도우 형님에 관한 자료입니다.”

금포 청년이 옥간들을 꺼내 탁자에 올려두었다. 백의 사내는 청년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옥간 하나를 들어올렸다.

“잘했다, 이만 물러가 보거라.”

도기도 손을 저어 청년을 보내고 다른 옥간을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옥간의 양이 꽤 많았지만 두 사람의 능력에 내용을 훑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건!”

하얀 옥간을 든 백의 사내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관련 내용을 찾으셨습니까?”

도기가 묻자 백의 사내는 옥간을 건네주었다.

내용인 즉, 도기가 시간법칙 결정(結晶) 보물을 지닌 누군가를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맞습니다, 바로 이거예요. 궁주님께서는 이 보물이 려비우의 빠른 성장과 연관이 있을 거라 보십니까?”

“이제 려비우의 수행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어졌다. 즉시 조화정립(造化晶粒)을 발견했다고 보고를 올려야 해!”

흥분한 백의 사내는 정자를 빠져나와 화원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 조화정립이요?”

놀란 도기가 따라붙으며 물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기록에 따르면 조화정립은 수련 속도를 늘리는 효과가 있는데다 영초를 빠르게 숙성시킬 수 있다고 하네. 려비우의 빠른 성장이나 시간법칙 결정을 지니고 있던 것이 모두 우연이라 할 수는 없겠지.”

“그랬군요! 제가 조사를 소홀히 해서 그 자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도 장로.”

백의 사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도기를 돌아보았다.

“궁주님?”

“정말 이전에는 조화정립일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것인가?”

“제발 제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구원관의 흥망이 걸린 보물인데, 제가 담이 아무리 커도 욕심을 부렸겠습니까!”

그의 시선과 함께 쏟아지는 위압감에 도기가 냉큼 바닥에 엎드려 애원하 듯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조화정립의 행방을 알아낸 공이 크다. 돌아가 있으면 선궁에서 적합한 육체를 찾아 보낼 것이다.”

백의 사내는 덜덜 떠는 척하는 도기를 내려다보다 담담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궁주님!”

위압갑이 사라지자 도기가 숨을 몰아쉬며 인사를 했다.

백의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휭 하니 사라지자 도기는 천천히 일어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바깥으로 향했다.

그의 눈 속에 교활한 웃음기가 스쳐지나갔다.

도기가 ‘궁주님’이라 부른 백의 사내는 금원선궁 안쪽의 대전으로 들어갔다.

대전 안에 둥실 뜬 금색 원반에는 복잡한 전신진법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양면에 ‘구원관’이라는 글자와 산하도가 새겨진 영패를 꺼내들고 그것을 전신 진법 위에 내려놓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침음하다 영패를 품에 집어넣은 그는 바깥의 다른 궁전으로 들어섰다.

“여봐라!”

상석에 앉은 백의 사내의 말에 허공에 파동이 일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

작은 눈을 지니고 입술 위로 누런 콧수염을 기른 회색 머리 노인과 검은 장포를 걸치고 악귀 머리 형태의 손잡이를 지닌 검은 거검을 등에 맨 사납게 생긴 사내였다.

“궁주님.”

두 사람은 백의 사내를 향해 예를 올렸다.

회색 머리 노인은 목소리가 가늘어서 쥐가 찍찍 대는 것 같았고, 흑포 거한은 굵직하고 탁해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려운, 북한선역으로 가서 한립이란 자에 대해 샅샅이 알아와야겠네.”

“예.”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흑도, 천송관으로 가서 한립의 종적을 쫓고 반드시 위치를 파악하되 들켜서는 안 될 것이야.”

“예!”

이번에는 흑포 서한이 고개를 숙였다.

그 시각, 한립은 남색 마차를 타고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조골진인의 저물법기에서 찾은 것으로 이전에 타고 다니던 벽옥비차와 엇비슷한 수준의 보물이었다.

마차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는 도기 무리에게서 찾은 백여 개의 저물법기들을 불러내 내용물을 살폈다.

도기의 저물법기에 의식을 불어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금색 영패가 들렸다.

한쪽에는 용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나머지 면에는 ‘도기’라는 이름과 ‘금원선궁’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영패를 본 한립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 신분영패는 금원선궁 장로영패였다.

다음으로 근천이란 자의 저물법기를 뒤지니 금원선역 대종문인 천수종 장로라는 신분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다른 금선들은 절반은 금원선궁, 나머지는 천수종 소속이었다.

다들 수행이 낮지는 않았고 선궁이나 대종문 제자라는 신분이 있어 상당한 선원석을 지니고 있었다.

선기, 단약, 재료 등으로 분류한 물품들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지만 대신 선원석은 태을경 수사가 백만 년은 놀고먹을 수 있는 수량이었다.

정리를 마친 그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수행과 육신의 힘이면 대라경 수사가 직접 나서도 달아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금원선궁 배후에는 천정이라는 방대한 조직이 있었다.

혹시라도 천정 도조의 관심을 끌면 제 아무리 그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자마자 일을 벌여놓았으니 행적을 숨기며 다니는 것 밖에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립은 금원선역에 관한 자료가 담긴 두꺼운 경전 몇 권을 휘리릭 넘겨 보았다.

도기 등이 지니고 다니는 경전은 내용도 상세하고 지도는 물론 인문지리 등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는 경전들을 다 살피고는 눈을 반짝이고 수결을 맺었다.

남색 마차가 방향을 틀어 어딘가로 나아갔다.

* * *

십년 뒤, 금원선역 어딘가에 남색 마차가 나타나 은하수처럼 하늘을 갈랐다.

전방에는 시야 양쪽으로 뻗은 거대한 금색 산맥이 구름을 뚫고 솟아있어 마치 하늘이 뚝 갈라진 것 같았다.

“여기군.”

마차 앞에 서서 산맥을 바라보는 한립의 표정이 편해보였다. 그 옆에는 얼마 전 깨어난 검은 장포를 입은 소녀 제혼이 서있었다.

그녀도 아직은 약간 창백한 얼굴로 산맥을 응시했다.

금원산맥(金源山脈)은 금원선역에서 가장 큰 산맥으로 선역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립이 평생 본 것 중에 가장 거대한 산맥이었고, 당연히 광활한 면적에는 기회와 위험이 공존했다.

이름 그대로 금속 속성 원기가 짙은 금원산맥 전역에는 관련 영맥이 흘렀다.

그 속에서 금속 속성 재료가 많이 발견되어 수많은 수사들이 보물을 찾기 위해 몰려들었는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자연적으로 형성된 금속성의 파동이 강해져 평범한 수사들은 심한 제약을 받았다.

게다가 금속성 원기가 충만한 만큼 기이한 금속수(金屬獸)라는 짐승들이 서식해 수사들을 괴롭혔다.

한립이 금원산맥으로 온 것은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부나방처럼 몰려드는 수사들과 막대한 자원을 놓고 몰려든 여러 세력 때문이었다.

선궁이 금원산맥 서쪽 끝에 자리를 잡고 일대를 장악하려 했으나 워낙 영역이 넓어서 대부분 지역은 각종 종문세가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난 경험으로 이대로 수련하면 쉽게 선규를 뚫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대량의 선원석도 있으니 조용히 폐관수련을 할 곳만 찾으면 수행을 높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도기 등의 습격을 받고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다.

그는 윤회전 가면으로 용모를 바꾸어 까만 얼굴에 검은 수염을 기른 금선 초기 사내로 변신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주인님, 저도 윤회전 가면으로 변신해야 할까요?”

“금원산맥에서는 널 알아볼 이는 없으니 그럴 것 없다.”

제혼의 물음에 한립이 고개를 젓고 마차를 몰아 금원산맥으로 들어섰다.

천기원기가 짙었으나 금속성 원기를 제외한 다른 원기는 극히 적었다. 어차피 단약과 선원석을 이용해 수련할 예정인 한립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거예요?”

“산맥 내에 수많은 종문 세력들이 퍼져 있다고 들었다. 그나마 바깥쪽이 평온한 편이라니 둘러보도록 하자.”

“좋아요!”

* * *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만 리를 이동했다.

후앙!

어느 산봉우리를 지나는데 금빛이 번쩍이고 늑대 형상의 괴수가 뛰어올라 마차를 물어뜯으려 했다.

한립은 손가락을 튕겨 금색 검기로 늑대 괴수를 베어 버렸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딱 절반으로 갈린 괴수의 몸에서 대량의 금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푸른 빛이 그의 손에서 날아가 늑대 괴수의 시체를 끌어왔다.

처음에는 말랑말랑하던 괴수의 몸이 빠르게 굳어 조각난 조각상처럼 변했다.

“이게 금속수에요?”

제혼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다가왔다.

한립은 일반 광물과 다를 바 없는 금속수의 시체를 보고 던져 버렸다. 실력은 둘째 치고 금속수는 바위와 완벽하게 융합하여 은신에 뛰어났다.

여기서 폐관수련을 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때 의식으로 만들어낸 음파가 좌측 전방에서 들려왔다.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는 여인의 것이었다.

한립은 의식을 음파로 바꾸는 수법이 꽤 신선하다고 느꼈다.

“주인님, 우리…….”

동정심이 들었는지 제혼이 그를 쳐다보았다.

“가서 무슨 일인지 보자꾸나.”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제혼이 원하니 한립은 마차의 방향을 틀어 은밀히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어느 협곡 옆에 멈춘 마차에서 다섯 개의 금빛이 둘러싸인 예쁘장하게 생긴 청의(靑衣) 소녀가 보였다.

열심히 싸우고 있는 소녀가 바로 음파를 퍼트려 도움을 요청한 장본인 인듯했다.

소녀는 이미 얇게 변한 푸른 보호막으로 공격을 막으면서 특이한 음파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흠?”

한립은 소녀가 푸른 여우 꼬리를 늘어트리고 있는 것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진선 중기의 그녀를 둘러싼 금빛들 속에는 금관을 쓰고 금색 깃털 도포를 걸친 진선경 도인들이 들어 있었다.

옷깃에 금색 말 도안이 수놓아져 있어 같은 종문으로 보이는 그들의 수행은 청의 소녀보다 낮았지만 일대 다수로 싸우며 승기를 잡고 있었고, 각각 금색 깃발을 들고 빛의 고리를 내뿜었다.

“금교수(金蛟獸)의 내단을 내놓고 항복하거라. 청호혈맥을 타고난 것을 보아 죽이지 않고 사존께 생신 선물로 받쳐주겠다.”

다섯 명 중 각진 얼굴을 지닌 사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청호족 같은 작은 종족은 언제 멸망할지 모르지 않더냐! 우리 금마종 세력이 백 배는 강하니 금선이신 사존의 시첩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야!”

또 다른 도인이 광소를 터트렸다.

“금교수와 싸우느라 원기가 바닥나지 않았으면 너희 다섯이서 나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청의 소녀가 분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이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야. 대사형, 저런 요녀의 헛소리를 듣고 있을 게 아니라 오금요광진(五金耀光陣)을 펼쳐 보호막을 깨트리고 잡아가죠! 사존께 청호족 시첩을, 그것도 청호족 소주를 바치면 큰 상이 내려질 겁니다.”

뚱뚱한 도인이 소리쳤다.

“안 된다. 오금요광진은 위력이 너무 세서 보호막을 깨면 저것의 얼굴을 상하게 할 수도 있어. 사존께 바칠 선물인데 천천히 힘을 소모하게 만들어 데려가야 하지 않겠느냐.”

각진 얼굴 도인이 신중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대사형께선 생각이 깊으십니다!”

“무리해서 강력한 공격을 하다가 선물을 망칠 수도 있지요.”

“맞습니다. 힘이 바닥날 때까지 괴롭혀 봅시다!”

다른 도인들이 분분히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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