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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18화 (1,775/2,000)

2018화. 주먹

*

“가라!”

기합을 넣은 도기가 검날을 손끝으로 스치자 첫 번째 불꽃 문양이 빛나면서 붉은 화염이 한겹 나타났다.

힐끔 한립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손끝으로 다시 검날을 스쳐 주황색 화염으로 두 번째 층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화염이 일곱 개나 쌓여 멀리서 보면 무지개 빛깔 부채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녹음이 짙던 산은 그 열기에 기후가 건조해져서 나무와 풀들이 말라 죽었고 금선경 수사들도 피가 끓는 것 같은 뜨거움에 고생을 했다.

“도 아우, 육신의 힘이 강하기는 해도 포위까지 한 마당에 일곱 번째 문양까지 발동해야 했습니까?”

근천이 옆에서 지켜보다 놀라 물었지만, 도기는 대답 없이 금색 비검을 휘둘렀다.

일곱 빛깔 화염을 품은 비검이 진법 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화염법칙의 힘이 물씬 느껴지는 비검을 보고도 한립은 두렵기보다는 신이나 가슴이 뛰었다.

“좋았어. 안 그래도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는 아무 동작도 취하지 않고 체내의 성신지력을 격발했다.

쿵!

일곱 빛깔 비검이 가슴에 박혀 열기로 그의 의복을 태우고 강철같이 단단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가지각색의 화염들은 그를 감싸고 사방팔방으로 불똥을 날려 진법마저도 웅웅 떨리게 했다.

진법을 지탱하던 금선 수사들은 힘의 충돌에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한참 뒤, 드디어 화염이 가시고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의가 조금 찢기고 타기는 했어도 긁힌 상처나 화상 자국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 저게 어떻게 된 겁니까!”

금천이 놀라 외쳤다.

“상상 이상으로 육신의 힘이 강한 놈입니다. 근천 도형, 방심해서는 안 되겠어요.”

잔뜩 인상을 찡그린 도기가 비검을 회수했다.

“이제 내 차례겠지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본 한립이 씩 웃고 즉시 천살진옥공을 발동해 전신의 현규를 펑펑 터트리면서 갈고리처럼 굽힌 다섯 손가락을 흑백 맷돌을 향해 뻗었다.

동시에 체내의 산악거원 혈맥을 발동해 체구를 열 배로 키우고 금색 털이 자라나게 했다.

두 개의 거대한 맷돌 판이 산악거원으로 변한 한립의 손에 맥없이 잡혔고 간신히 버티고 있던 금선 수사들은 부르르 몸을 떨다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안 돼, 어서 철수해야…….”

도기가 그럴 줄 알고 경고했지만 늦고 말았다.

흑백 맷돌을 장악한 한립의 힘이 물결처럼 퍼져 주변 사람들을 억누른 것이다.

한립이 맷돌 판들을 붕 돌려 금선들을 향해 떨어뜨렸다.

금선들은 대경실색해 법보며 부적을 꺼내 살아남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쿠아앙! 쿠쾅!

두 번의 폭음이 터지고 보물들이 만들어낸 보호막들도 터져나갔다.

90명의 금선들은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진흙 인형처럼 으깨져 죽었다. 그들의 원영도 마찬가지였다.

“이 죽일 놈이!”

대노한 근천이 직접 튀어나와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남색 빛의 장막이 퍼져 물의 영역이 그들이 있는 산 전체를 감쌌다.

“한 명은 불, 한 명은 물이라 확실히 함께 싸우면 서로 보완이 되겠습니다.”

수분기가 가득해진 와중에도 한립은 웃고 있었다.

그는 체형을 줄여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근천은 더이상 방심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빠르게 수결을 바꾸어 가며 소매를 펄럭였다.

근천의 힘찬 손짓에 마른하늘에 굵은 빗방울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립은 주변 천장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는 빗방울 속에 희미하게 보랏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독…….’

이런 생각을 하면서 뻗은 별빛 어린 주먹이 허공을 쿵, 때려 물방울들이 백 장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는 허공을 박차고 이동하려다 일순 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 틈에 푸른 물줄기가 뭉쳐 그의 두 다리를 꽁꽁 묶고 있었다.

“도 아우, 수박술(水縛術)은 지하 수맥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벗어나려면 수백 수천 줄기의 지하 수맥을 역류하게 할 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단시간 내로 벗어나지 못할 테니, 어서…….”

근천은 갑자기 겁에 질려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앞에 누군가 번득 나타나 시간법칙 파동을 거두고 상상을 초월하는 기혈의 힘을 폭발시킨 것이다.

900곳의 현규를 밝힌 한립이 천살진옥공을 전력으로 운영해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포로롱.

경악한 근천은 피하지 못하고 급히 가슴 앞에서 물의 파동을 모아 푸른 장벽을 만들어냈다.

놀랍게도 물의 장벽의 기이한 힘이 한립의 주먹을 이끌어 분명 닿았는데도 닿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금입니다! 어서요!”

근천의 외침에 한립의 등 뒤 백여 장 뒤 허공에서 전신에 붉은 화염을 감은 도기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가라!”

아홉 개의 문양이 반짝이는 금색 비검은 아까 일곱 빛깔 화염 위로 하얀색과 검은색 화염이 추가돼 5품 선기에 버금가는 기운을 방출했다.

비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립의 등 뒤에 도착했다.

파앗!

그와 동시에 한립 뒤쪽에서 투각이 된 금색 고리가 떠올라 회전하면서 사방팔방으로 금색 광선을 내뿜었다.

웅웅 진동한 비검은 아홉 겹의 화염으로 미친 듯이 금색 광선을 불살랐지만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한립을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던 도기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고,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던 근천은 의식의 흐름마저 느려진 것처럼 굳어 있었다.

“보여줄 재주가 이게 다라니, 실망입니다…….”

한립은 진령혈맥들을 동시에 움직여 핏빛 속에서 삼두육비의 마물로 변했다.

금털 거원, 진룡, 금색 눈동자를 지닌 거대 새의 머리를 하고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한 손으로 물의 장막을 봉쇄하면서 겨드랑이 밑 금색 비늘이 돋은 다른 손을 뻗어 근천의 심장을 뽑아냈다.

아직 뛰고 있던 핏빛 심장은 그의 손아귀에서 터져버렸다.

피를 뿜은 근천의 단전에서 원영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원영이 달아나기도 전에 한립의 주먹이 들이닥쳤다.

거의 동시에 한립이 몸을 돌리면서 가장 아래쪽 두 손을 뻗어 진언보륜의 광선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는 비검을 낚아챘다.

뜨거운 열기가 두 손을 타고 체내로 흘러들어 진령혈맥이 발작을 일으킬 때와 비슷하게 피를 들끓게 했다.

한립은 코웃음을 치며 대수롭지 않게 비검을 양손으로 쥐고 비틀었다.

산악거원, 진룡, 곤붕 세 가지 진령혈맥에 천살진옥공이 더해진 힘에 5품 선기도 저항하지 못했다!

금속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비틀리던 비검은 결국 터져 산산조각이 났다.

지글지글 끓으며 흩어지는 화염 탓에 손의 피부가 새까맣게 변하고 살에서 익는 냄새가 났다.

이에 손을 휙휙 털던 한립은 핏빛을 거두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도기를 향해 웃어 보였다.

도기는 비검이 조각난 순간 피를 토하고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도 장로, 제 혼백을 가져가 등불을 피우신다던 분이 이렇게 가시면 되겠습니까.”

번득 사라진 한립이 그의 옆에서 나타났다.

황망한 얼굴의 도기는 대답할 여유도 없이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그런 그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한립이 나란히 날아가면서 공격을 하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처음 선계에 올라온 나를 도우가 먼저 건드리지 않았으면,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아비인 당신이 오늘 이런 꼴을 당했겠습니까? 자식 교육을 잘못한 자신을 탓하세요…….”

두 눈이 핏빛으로 변한 도기는 정혈을 불살라 속도를 높였는데도 한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처럼 혼백을 뽑아 만년이나 고문할 생각은 없습니다. 도우의 혼백이나 잠시 가지고 놀 생각이니 나중에 잘 찾아보세요.”

“이 개자식이!”

도기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멈춰서 화염영역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붉은 불 구름이 떠올라 주변 온도가 삽시간에 올라갔다.

그의 단전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오면서 동시에 피부가 쩍쩍 갈라졌다.

콰릉!

불 속성 법칙의 힘이 파도를 치며 날아가 열기로 주변 공간을 왜곡시켰다.

진작 대비를 하고 있던 한립은 물러나면서도 보랏빛이 반짝이는 눈으로 폭발의 중심을 관찰했다.

“그런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듯 싶습니까.”

잠시 후, 냉소를 흘린 그가 폭발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허공에 열기가 가득했지만 법칙의 힘은 약해서 원영이 자폭해 낼만한 위력에는 못 미쳤다.

화염 속에서 수백 개의 주먹만 한 불덩이들이 서로서로 결합되고 있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한립은 손을 들어올려 비검 18자루를 날려보냈다.

치지지직.

금빛 뇌전이 작열하면서 그물을 치고 불덩이들을 덮쳤다.

점점 커지던 불덩이들이 잘게 흩어지는 것을 본 한립은 비검들을 회수했는데 그 중 한 자루에 비취색 저물반지가 걸려 있었다.

“죽은 척하고 달아날 거였으면 저물법기도 없앴어야지, 이런 걸 아까워해서야.”

그는 반지를 손에 들고는 몸을 돌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한참 뒤, 아래쪽 고목에서 작은 불씨가 빠져나와 표표히 아주 먼 곳으로 사라졌다.

* * *

금원선궁 모처의 어둑한 대전 안.

바닥과 벽에 암홍색 문양들이 거대한 진법을 이루고 깜빡깜빡 음울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법 중앙에는 검은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위로 뻗어나간 7개의 가지마다 고대 등잔이 놓여 녹색 불길을 태우고 있었다.

훅.

돌연 7개의 녹색 등불이 몇 배로 커지더니 등잔을 벗어나 떠올랐다.

우웅!

곧 허공에 7개의 등불이 북두칠성 모양의 진법을 이루고, 그 중앙에서 흐릿하게 도기의 잔혼이 떠올랐다.

“칠성등(七星燈)을 준비해 두지 않았으면 꼼짝 없이 죽을 뻔 했구나!”

중얼거리는 도기의 표정은 무척 섬뜩했다.

“한립, 내 아들을 죽이고 내 수행을 망쳤으니 이제 너와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네 놈이 죽거나 내가 죽거나다! 내 직접 너를 죽일 수는 없어도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네 놈을 끝장내 주겠다!”

도기의 잔혼은 아래쪽 북두칠성 모양 진법을 향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진법의 등불을 흡수한 잔혼은 점점 또렷해졌고, 검은 돌기둥 끝이 갈라지면서 숨겨 놓았던 부적이 날아올라 하나가 되었다.

몸이 검은 액체로 이뤄진 도기는 흡족하게 몸을 움직여보다가 바깥으로 나섰다.

반 시진 뒤, 금색 궁전 앞.

“도 장로님!”

궁전 대문 좌우에 있던 시종 한 명이 도기의 모습을 보고 놀라며 예를 취했다.

“궁주님을 뵈야겠다. 고하거라!”

도기는 누가 보아도 급해 보였다.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됐으니, 도 장로를 들게하라.”

시종이 안으로 들어가 보고를 하려는데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기가 문을 열고 들어가 대청과 수백 장에 이르는 긴 회랑을 지나 거대한 화원으로 들어섰다.

각종 꽃과 꽃나무가 심어져 있어 다채로운 색과 향기가 눈과 코를 즐겁게 하는 곳이었다.

화원 안에 하얀 정자에서 백의 사내가 뒷짐을 쥐고 서서 연분홍 꽃이 핀 나무를 감상하고 있었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인데 천영부(天影符)로 공간을 초월해서 나를 보러 온 것이지?”

몸을 돌린 중년인은 그리 출중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백발이 희끗희끗 보이는 데다 눈빛이 깊어 꽤 신중해 보였다.

“원거리에서 연락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제 육신을 파괴해 미리 펼쳐둔 칠성등 금제로 간신히 건진 잔혼을 천영부로 실체화한 겁니다.”

도기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뭐라? 누구의 짓이지?”

“천정 주선방에 이름이 오른 한립이라는 자입니다. 려비우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고요.”

“한립……. 려비우라면 기억하네. 연신술을 익혀서 수배령이 내려졌고 자네의 아들 도우도 그에게 당했다고 했었지. 현상금으로 선원석 5천 개가 걸려 있고 말이야. 그 자가 금원선역에 있단 말인가? 허나 천장이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진선경 수행을 지니고 있었을 텐데,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기껏해야 금선의 경지에나 이르렀을 자에게 패했단 말인가?”

“자료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으나 직접 만나보니 이미 태을경 수사였고, 육신의 힘도 강해 최소 태을현선 급이었습니다! 저와 근천 수사 그리고 거의 백 명에 가까운 금선 수사들이 양의음양진을 펼쳐놓았지만, 저를 제외한 모두가 그 자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법체쌍수에 두 공법이 모두 태을경에 이르렀다고? 그럴 리가!”

“제가 어찌 궁주님을 속이겠습니까? 천혼주(天魂珠)를 이용해 전투를 기록한 것이니 봐주십시오.”

도기가 입에서 손톱 크기의 구슬을 꺼내 백의 사내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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