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화. 당했다
*
두 사람은 말없이 날아올라 마궁 남쪽의 광장으로 향했다.
멀지않은 곳의 바깥에서는 몇 층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양식의 첨탑이 서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월공탑(越空塔)이군요.”
백여 장 높이의 탑 중 아래쪽 3분의 1에 마름모꼴 수정이 박혀 햇살을 반사하는 것을 보던 한립은 건물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성역에서 선계로 가려면 평범한 전송진법으로는 무리입니다. 여기 월공탑의 공간균열을 통해야 하지요.”
석파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북한선역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계면으로 가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고 들어가는 자원의 양도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비교적 인접한 곳으로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게 어딥니까?”
“금원선역(金源仙域)입니다.”
“금원선역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가본 적은 없지만 구운관과 백조산 본산이 있어 선역들 중에서 유명했고, 금동도 아마 그곳에 있을 거라 여겨 이름이 귀에 익었다.
“금원선역에도 전송을 받을 수 있는 진법이 몇 개 있지만 구원관이나 백조산 영역의 전송진은 종문의 신물이 있어야 이용 가능합니다. 그런 게 없으시면 운에 따라 금원선역 어디든 떨어지겠지요.”
“알겠습니다.”
석파공의 설명에 한립은 간단히 답하고 월공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내내 웃고 있던 석파공이 미간을 좁혔다.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과 새하얀 돌기둥에 복잡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탑의 네 벽에는 마름모꼴의 수정돌이 박혀 겹겹이 빛의 잔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복잡한 진법을 둘러싼 새하얀 돌기둥들 위에는 라후 진령 조각상이 생생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진법을 아직 발동하지 않았는데도 신비로운 빛과 함께 강렬한 공간 파동을 퍼트렸다.
“앞으로 성역에서 려 수사를 다시 볼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석파공이 입을 열고 진심을 밝혔다.
“안심하세요. 제가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라.”
“알겠습니다. 진법으로 들어가시지요.”
한립은 의식으로 진법을 자세히 살피며 어젯밤 대제사에게서 들은 것과 다른 점은 없는지 확인한 다음에야 걸음을 옮겼다.
“괜한 걱정이십니다. 월공탑은 어떻게 보면 황성보다 더 귀한 곳입니다. 여기에 무슨 짓을 해두었다가 탑이 날아가기라도 하면 황성을 날려 먹는 것이나 매한가지일 것이에요.”
석파공이 웃든 말든 한립은 말없이 그를 향해 눈짓했다. 어서 진법이나 발동하라는 뜻이었다.
석파공의 손짓에 따라 마족 장로 몇이 진법을 중간에 놓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결을 맺었다.
웅웅웅.
시끄러운 진동 소리와 함께 탑이 부르르 떨렸다.
탑 중심부에서 높게 솟아오른 은빛이 한립을 덮치고 벽에 박힌 마름모꼴 수정이 발산하는 오묘한 빛이 섞여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워졌다.
한립은 수많은 광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공간의 힘이 더 맹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송 직전 언뜻 석파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한 수사.”
공간 파동을 머금은 하얀빛이 진법을 투과해 그의 몸을 강타했다.
흠칫 놀란 한립은 퍼뜩 고개를 숙여 어떤 표식이 새겨진 옥패가 다가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 공기가 묵직해져 공간이 왜곡되고 온몸이 압력에 찢어질 것 같은 와중에 쾅, 하고 월공탑 지붕 위로 은빛이 솟아올라 사라졌다.
파스스.
극심하게 흔들려 먼지가 인 월공탑 표면에는 마름모꼴 수정들이 빛을 잃고 어둑해져 있었다.
잠시 후, 탑문을 걸어 나오는 석파공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으나 예전보다는 마음이 편해 보였다.
* * *
선계.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고 푸른 벽돌로 쌓인 고풍스런 도관.
산을 따라 수십 리나 이어지는 도관 내에 하얀 돌바닥에 새겨진 진법과 그 주위를 둘러싼 새하얀 돌기둥들이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진법을 두 종류의 옷을 입은 수사들이 포위하고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 하얀 장포를 입은 위풍당당하게 생긴 중년인과 뺨이 움푹 들어가고 턱수염이 별로 없는 노인이 우두머리인 듯했다.
“도기 아우, 그건 대체 어디서 들은 정보입니까? 오늘 나타나는 게 확실한 겁니까?”
쪼글쪼글한 노인이 적막을 깼다.
“근천 도형, 어젯밤에 계면 너머에서 도우를 죽인 흉수가 오늘 회룡관(回龍觀) 전송대에 나타날 거란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시간이 없어 사실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급히 수하들을 이끌고 왔기에 근처에 있는 수사에게 도움을 구한 겁니다.”
도기라 불린 중년인이 답했다.
“당시 아우의 아들을 죽인 자는 겨우 진선경 수행을 지녔다고 들었는데 너무 과한 준비 아닙니까?”
“그게 저도 이상한데……. 소식을 전한 자가 그의 수행이 태을경 이상일 거라는 말을 남겼지 뭡니까.”
“그럴 리가요? 도우를 죽인 지 몇 해나 지났다고, 제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그 사이에 진선이 태을옥선이 되지는 못했을 것 아닙니까? 다 아우를 위해 하는 말이니,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지금의 지위에 이르기 위해 그간 적으로 돌린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근천이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거짓 정보로 농락하는 것이라 해도 무시할 수가 있어야지요. 게다가 이게 함정이라면 근천 도형께서 도와주실 것 아닙니까.”
“하하, 제가 오지 않았어도 이 정도면 대라경 수사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겨우 금선경 최고봉 수사 다섯에 금선 중후기 수사 마흔여 명이 다인 걸요. 도형께서 사람들을 더 모아주셔서 양의음양진을 채워주지 않으셨으면 최고의 위력을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근천의 말에 도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듣자니 시간법칙을 익혔다던데 주제를 모르는 놈입니다.”
“어디 촌구석 출신이라 법칙 수련의 비사도 모른 채 막다른 길로 들어섰겠지요. 그래도 진선 수행으로 제 아들과 공수구를 죽인 것을 보면 시간법칙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힌 것 같습니다.”
“하하. 시간법칙을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해도 양의음양진에 갇혀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걱정마세요. 오늘 그 놈이 나타나기만 하면 피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근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도기가 조금 안심한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다 안색이 변했다.
“왔다…….”
공기의 흐름이 확 달라지고 바람이 몰아치면서 산이 어둑해졌다.
“진법을 펼쳐라!”
도기가 진지하게 명을 내리자 금선 최고봉 수사 아홉이 대답을 하고 다른 이들을 배치해 복잡한 진을 쳤다.
90명의 수사들이 신속하게 수결을 맺으며 주문을 외워 지면과 돌기둥의 문양들을 밝혔다.
콰릉!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어 뇌전빛을 터트렸다.
강렬한 공간 파동을 품은 은색 빛기둥이 일곱 빛깔 광채를 퍼트리며 전송진으로 떨어졌다.
은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푸른 장포를 걸친 한립이었다.
그런데 은빛이 사라지자마자 우웅, 하고 검은색과 하얀색 빛이 교차해 전송진으로 떨어졌다.
계면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감내해야 할 공간압력은 태을경 수사에게도 무리였지만, 한립은 워낙 몸이 튼튼해져서 머리가 조금 어지럽고 나른한 것 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연신술을 운용하니 그마저도 회복되었고 말이다.
반듯하게 선 그의 발밑으로 옥패가 떨어지면서 파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몸을 굽혀 옥패를 주워든 한립은 진법을 펼치고 포위한 선궁 복색의 수사들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석파공에게 또 당했구나…….”
한편 근천은 키가 좀 큰 것을 제외하면 여러모로 평범한 청년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저 자입니까?”
“맞습니다, 확실해요!”
도기가 한립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을 처음보았지만 한눈에 이놈이 내 아들을 죽인 흉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려비우라고 불러줄까 아니면 한립이라고 불러줄까?”
도기가 서늘하게 외쳤다.
마지막에 석파공이 불길한 끝인사를 남길 때 무슨 일이 생길 거라 예상은 했지만 낯선 사람들이 포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나를 본 적은 없어도 도우는 만나보았겠지. 네가 죽인 내 아들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도기를 보니 확실히 생김새가 도우와 비슷해 보였다.
“당신이 도우의 아비이자 공손구가 말하던 도 장로인가 보군요.”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니었어. 피로 맺은 원한은 피로 갚아야 하는 법, 쳐라!”
고개를 끄덕인 도기가 명을 내렸다.
전송대 위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공간이 압축되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천지영기가 사라져서 별안간 적린공경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그의 표정이 진법에 갇힌 것 치고는 꽤 묘했다.
“음양극석(陰陽極石)을 발동하라!”
도기는 당황하지 않고 인상을 찡그린 채 계속 명을 내렸다.
쿠쿠쿠…….
순간 금선 수사들이 분분히 두 손을 뻗어 진법을 움직였고, 흑백의 빛의 장막에서 검은빛은 오른쪽으로 흰빛은 왼쪽으로 자석에 이끌리듯 뭉쳐 맷돌의 아래위 돌이 움직이는 것처럼 공간을 쥐어짰다.
맷돌 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한립은 공간이 겹겹이 겹치는 것을 보며 꼼짝 않고 있었다.
휘이.
귀 양옆으로 바람 소리가 들려오며 온몸에 압박이 가해졌다.
가슴이 갑갑해진 한립은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려 양쪽에서 가해지는 힘에 저항하면서 꼼짝하지 못했다.
도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에 마음 놓고 웃음 지었고, 근천은 겨우 이런 일로 자신까지 끌어들인 도기를 향해 입을 비죽였다.
“양의음양진에 걸려들었으니 저놈은 죽은 목숨이다! 더욱 강하게 옥죄어서 육신은 가루로 만들고 혼백만 취하거라. 내 그걸 가져다 등불을 피워 만년은 불살라 줄 것이야!”
“예!”
도기의 의기양양한 외침에 아흔 명의 금선 수사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도 장로를 도와 진법을 펼쳤으니 못해도 각자 선원석 10개씩은 받을 수 있을 테고 앞길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금선 수사들은 분분히 수결을 바꾸어 가며 지닌 선령력을 아낌없이 진법으로 쏟아부었다.
우우웅!
흑백 맷돌 표면에 주술문자들이 번득이면서 한립의 팔꿈치까지 두 힘이 응축되어 무시무시한 마찰음을 냈다.
‘흠…….’
진법 안의 한립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참에 적린공경에서 단련한 몸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할 요량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콰콰쾅…….
흑백 맷돌이 거의 맞닿으면서 흐릿하게 한립의 신형이 사라졌다.
“잠깐도 버티지 못하고 이렇게 가루가 된 겁니까? 도기 아우께서는 어서 혼백을 취할 준비를 해야되겠습니다. 이러다 혼백까지 사라지겠어요.”
근천이 힐끔 진법을 보며 밝게 말했다.
“내 아들이 저런 변변치 못한 놈의 손에 죽었을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마 너무 방심한 탓에 암습을 당한 것이겠지요. 휴, 아무리 자식이라도 평소에 엄히 가르칠 것을…….”
고개를 저은 도기는 회한에 젖어 탄식했다.
“도우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 저놈이 제 힘으로 이길 수 없자 함정이라도 판 것이겠죠. 아니면 원래는 실력이 있는 녀석인데 선령력과 법칙의 힘을 쓸 수 없어 무력하게 당했거나요.”
근천이 손을 저으며 그를 위로하려 했다.
“어찌 되었든 드디어 원수를 갚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도기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끼기긱.
흑백 맷돌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꽉 아물렸던 두 돌판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겨우 이겁니까? 몸의 강도를 확인하기에도 부족해서야.”
진법 안에서 한립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력으로 진법을 가동해라! 눌러 죽여!”
안색이 확 달라진 도기가 급히 외쳤다.
그의 명령에 이미 대세가 그들에게 기운 줄 알고 편안한 마음으로 임하던 금선들은 선령력을 끌어올려 양의음양진으로 주입했다.
우우웅!
더욱 밝게 빛나는 흑백 맷돌의 힘은 대단했지만 한립이 양손으로 벌리는 힘만은 못했다.
이때 한립의 표정은 그야말로 무덤덤해서 전신이 땀에 젖은 것도 다 연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걸 본 도기가 수결을 맺어 금색 비검을 불러냈다.
도신에 9개의 불꽃 문양이 새겨져 있어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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