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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16화 (1,773/2,000)

2016화. 협의

*

“적린공경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으시면 직접 들어가 보시지 그럽니까? 적린공경은 마역보다 안전하지 않아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은 유념하시고요. 대황자의 전철을 밟아서야 쓰겠습니까?”

한립은 농담조로 말했다.

“석참풍이 정말 죽었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석파공이 미간을 좁히고 침음했고, 뒤에 서 있던 마족 사내들의 안색도 달라졌다.

“려 수사, 사실 우리 둘 사이에는 원한도 없지 않습니까. 똑똑한 분이 제가 열셋째 아우보다 이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마역이 어찌 되든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제사가 제혼을 구하는 것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폭공계부 일은 잊어 드리고 바로 마역을 떠나 더는 이런 황당무계한 집안 다툼에 끼어들지 않을 겁니다. 삼황자께서는 제 제안이 어떠십니까?”

“저를 곤란하게 만드십니다. 적린공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열셋째 아우의 행방이라도 알려주세요. 대체 살아있기는 한 것입니까? 성역으로는 돌아온 것이고요?”

“분명히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 같은데, 이렇게 나오시겠다…….”

한립은 굳은 얼굴로 흐릿하게 사라져 대전 왼편의 쪽문 앞에 나타나서 발뒤꿈치로 바닥을 쿵! 찍었다.

검은 돌이 깔려 있던 바닥이 들썩이고 먼지가 풀풀 피어오르면서 그 안에서 누군가 핏물로 뒤덮인 얼굴로 튀어나와 달아나려 했다.

대전에 충격이 가지 않게끔 일부러 힘을 빼지 않았다면 지하에서 그대로 숨이 끊겼을 자였다.

왜소한 체구에 전신에 검은 비늘이 돋은 사내는 기다란 손톱으로 다시 땅을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눈앞이 번득이고 한립이 나타나 발로 상대의 갈고리 같은 손을 뻥 차서 붕, 띄운 다음 한 손으로 목을 틀어쥐었다.

“은신술이 뛰어나 하마터면 대전으로 들여보낼 뻔했지 뭡니까.”

한립은 그대로 번득 다시 석파공 무리 앞으로 이동해 냉소를 흘렸다.

그에게 목이 붙들린 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엄하다! 어서 원손을 놔줘라!”

철탑 사내가 소리를 질렀고 서생 노인도 이마의 주름이 늘어났다.

“놔주라고?”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바로 목을 비틀어 부러뜨리고 휙! 하고 원손이라는 자를 철탑 사내 쪽으로 던져버렸다.

“죽어!”

분노에 눈을 부릅뜬 철탑 사내가 갑옷에 검은빛을 일으켜 비죽비죽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거목 크기의 마갑거인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마갑거인이 마기에 휩싸인 팔각형의 거대 망치를 불러내 수결을 맺으니 그 주위로 붉은 문양들이 퍼져나갔고, 한립이 있는 바닥에도 붉은 문양이 도달해 두 다리가 쇠를 부어 굳힌 것처럼 묵직해졌다.

마갑거인의 걸음에 쿵, 하고 땅이 흔들리고 바닥이 깨져 먼지가 풀풀 날렸고, 팔각형 망치가 한립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한립 머리 위 공간이 구겨지는 것처럼 겹겹이 주름져 망치의 위력이 얼마나 센지 알 수 있었다.

마갑거인은 조그만 인족 따위는 일격에 죽일 심산이었다.

그런데 망치가 머리에 닿기 직전, 한립이 가볍게 바닥에서 발을 떼더니 그를 향해 다가섰다.

펄럭이는 장포 아래로 몸 곳곳에서 하얀빛들이 반짝이고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

“조심! 어서 피하세요!”

마갑거인이 피하지 않고 망치를 틀려는데, 뒤에서 마른 노인이 큰소리로 경고를 했다.

몸을 살짝 굽혔다 핀 한립은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퍼퍼펑, 소리가 연달아 들린 팔을 위쪽으로 날렸다.

쿠앙!

팔각형 망치의 머리 부분이 터져버리고 망치의 손잡이는 호선을 그리며 어딘가로 날아갔다.

한립이 방출한 엄청난 힘이 마갑거인의 팔뚝을 타고 올라갔다.

펑! 펑! 펑…….

연달아 폭음이 울리며 마갑거인의 갑옷과 그 아래 피부가 피떡이 되어 으깨졌고 살점 사이로 드러난 뼈도 형편없이 부러져 이리저리 비틀려 난리였다.

이때 청포 노인이 마갑 거인의 어깨로 몸을 날려 손바닥으로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자 푸른빛이 응집해 엄청난 힘이 어깨를 타고 팔로 내려가 한립의 힘과 충돌했다.

쾅!

마갑거인의 한쪽 팔은 완전히 가루가 되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팔만 잃고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곡 노인…….”

마기를 회수해 몸을 수축한 철탑 사내가 고마움을 표했다.

팔이 참혹하게 터져나가 극통이 밀려들 텐데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권풍은 막았지만 내상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 상처 부위에 남은 상대의 힘을 제거하기 전에는 팔을 재생하지 마세요.”

바닥에 내려선 마른 노인이 당부했다.

한립은 어느새 뒷짐을 지고 서 있었지만 공격을 이어나가지는 않았다.

“야양성 안에서 사람을 상하게 하시다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석파공이 나서서 차갑게 물었다.

“저들을 살려둔 것만으로도 제게 감사를 표하셔야지요.”

“적린공경 안에서 수확이 적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마족과 완전히 돌아서기라도 하겠다는 뜻입니까?”

“마족 전체를 등에 업고 저를 겁주지 마십시오, 삼황자. 물론 저는 굳이 그렇고 싶지 않지만, 이렇듯 저를 겁박하시면 소란을 피울 수도 있습니다! 아, 물론 야양성 안에도 저기 ‘곡 노인’ 보다 훨씬 강한 선배님들이 머물고 있는 것을 압니다.”

한립은 힐끗 마른 노인을 보았다.

맑은 눈빛을 지닌 노인은 기운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언제라도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하, 허나 그렇다고 한들 어떻습니까? 제가 죽자고 덤비면 야양성은 몰라도 여기 마궁 황성은 절반 정도 때려 부수고 달아날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돼서 마주를 대신해 집무를 수행 중인 삼황자께서 욕을 먹어도 저는 모릅니다? 대황자께서 계실 때는 그렇게 태평했다고 말들이 많던데, 삼황자께서 나서시고 황성이 파괴되면 마족 체면이……. 쯧쯧, 그 뒤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겁니다.”

한립은 자신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에 석파공은 표정에 변화가 없없으나 마음은 무거웠다.

한립 말대로 황성이 파괴되면 부황이 진노해 그의 권한을 거둬갈 것은 당연했고, 그때가 되면 석경연이 나서리라.

힘들게 석참풍을 죽여 놨더니 남 좋은 꼴만 시키는 셈이었다.

문제는 한립이 그럴 능력이 되냐는 것인데.

“현수 공법으로 이미 저를 넘어선 자입니다. 저자를 상대로 싸워 이길 수는 있겠지만 잡아 죽이기는 무척 어려울 것으로 보이고, 그 과정에서 황성 절반이 날아갈 수 있다는 말도 허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때 석파공의 머릿속에 곡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잠시 생각을 하던 석파공은 활짝 웃음 지었다.

“려 수사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제 바람이었나 봅니다. 의지가 확고하시니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일을 마치는 대로 성역을 떠나겠다는 약속만 지켜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러려면 이곳의 전송대진을 이용해야겠지만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성궁으로 다시 찾아주시면 제가 직접 배웅하지요.”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석파공은 고민 없이 답했다.

“그럼 수고해 주십시오……. 시간이 늦었는데 그만 들어가 쉬시고요.”

미소를 머금은 한립은 집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축객령을 내렸다.

그 모습에 언뜻 이를 악문 석파공이 수하들을 데리고 돌아섰다.

그렇게 석파공 무리가 사라진 후에도 한립은 주변을 샅샅이 훑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대전으로 돌아갔다.

백옥 침상 위에 반듯하게 누운 제혼은 얼굴을 찌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놀란 한립이 바로 의식으로 상태를 살피고 얼굴을 풀었다.

아직 깨어나지는 못했지만 단전에 실낱같은 본원의 힘이 차올라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잔불처럼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촤아아.

백옥 침상 뒤로 물소리가 일고 대제사의 신형이 나타났는데 회백색 연기를 뿜는 그의 몸에서 타는 냄새가 났다.

“얼굴이…….”

한립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대제사는 제 얼굴을 손으로 훑고 쓴웃음을 지었다.

“윤회법칙의 힘을 이용해 함부로 천기를 알아내는 대가랄까요?”

그의 뺨에는 방금 불에 지진 것 같은 상처가 생겨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몸의 다른 상처들도 그럼…….”

“미래를 엿볼 때마다 천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이런 상처들이 나타나곤 합니다. 어떤 영단 묘약을 사용해도 이런 상처들은 낫지 않고 더 악화되고 곪아가기만 하지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런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립은 대제사가 이전에 제혼을 구해주려 하지 않았던 것은 대황자의 입김도 있었겠지만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정도로 몸에 상처가 쌓였으면 아무리 수행이 높아도 목숨을 잃을 날이 머지않았을 것이다.

“대제사,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한립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당장은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으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저를 한 번만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요? 무슨 일인지 미리 들을 수 있겠습니까?”

“원래 천기는 함부로 누설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대제사가 고개를 젓고 한립이 뭐라 더 물으려는데 제혼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제혼!”

한립은 제혼이 깨어나려는 줄 알고 불렀지만 몸을 웅크린 그녀는 답이 없었다.

“본원의 힘이 상실된 지 너무 오래고 의식의 힘도 고갈되어서 수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혼백을 지켜주지 않았으면 벌써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을 겁니다. 혼백이 다시 기운을 차릴 시간이 필요하니 걱정말고 기다리시면 알아서 깨어날 거예요.”

“저희를 도와주신 일을 삼황자에게는 어찌 해명할 생각입니까?”

“저들이 제가 협박받아 어쩔 수 없이 도왔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부족해 보이시면 몇 대 더 때리시던가요.”

한립의 우려에 대제사가 아직도 문밖에 기절해 있는 두 사람을 눈짓하며 웃었다.

“삼황자가 그리 쉽게 속을 위인이 아닌지라…….”

“안 믿는다고 해도 어쩌겠습니까? 자기도 여기까지 직접 와서 그냥 돌아가 놓고 저를 탓하기라도 하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제혼을 다시 화지 동천 안에 옮겨주고 그 옆을 지켰다.

* * *

이튿날 아침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기운이 조금씩 강해지는 것을 느낀 한립은 안심하고 대제사에게 인사를 한 뒤 마궁 모처로 향했다.

오래지 않아 석파공 등 십여 명이 광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곡 노인 외에도 태을 후기의 수사가 셋이나 더 있고 나머지도 태을 중기, 초기의 수사들이었다.

“잔뜩 끌고 나오셨군요.”

한립은 태연한 얼굴로 웃음 지었다.

“수사와 같은 귀빈이 떠나시는데 예를 다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한립은 번득 그들을 지나 이동했고 접선을 탁, 접은 석파공이 그를 뒤따랐다.

나머지 사람들은 약간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수사와 친분을 쌓아둘 것을 하고 후회하고 있다면 너무 늦은 걸까요?”

“처음 뵈었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적린공경에 들어가기 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차이가 있습니까?”

“물론 없지요. 제게 폭공계부를 쥐어 주기 전이었다면 늦지 않았겠으나, 삼황자께서 시간을 거스르는 능력이 없다면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군요…….”

석파공이 탄식했다.

그걸 지켜보던 한립이 망설이다 한숨 섞인 한 마디를 덧붙였다.

“꼭 그래야만 했습니까?”

석파공도 그가 자신이 아닌 석천공의 일을 말하는 것을 알아챘지만 그 안의 숨겨진 내막을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어 그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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