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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15화 (1,772/2,000)

2015화. 부실

*

며칠 뒤, 밤.

황성 북쪽의 연달아 세워진 궁전들 사이를 마족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이에 한립은 검은 옷을 입고 자세를 낮추며 담벼락에 진 그림자를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기운을 완벽하게 숨겨 육신의 힘만으로 이동하는데도 더없이 빨라 순찰 병사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궁전 담벼락에는 은밀하게 숨겨진 진법들이 많았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이동하면서도 그 어느 것도 촉발하지 않았다.

얼마 후, 섬세하게 지어진 궁전 바깥에 도착한 한립은 대전 문에 가기도 전에 퍼져 나온 짙은 약재 향을 맡고 콧등을 찡그렸다.

창문이 다 닫혀 있고 대전 지붕에는 안개가 잔뜩 몰려들어 있었다.

치직!

잠시 지켜보던 그가 손을 뻗어 금제를 향해 은빛 뇌전을 방출하자 숨겨진 주술문양들이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쉬쉭.

가볍게 문을 밀고 대전 안으로 들어간 그의 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리고, 숨어 있던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진작 알고 있던 것처럼 몸을 낮추어 기습을 피하고 별빛을 머금은 두 주먹을 가까이 다가온 적들에게 뻗었다.

퍽! 퍽!

어둠 속에서 두 인영이 날아올라 기둥에 부딪힌 뒤 축 늘어졌다.

사람을 해칠 생각이 없었기에 중요한 혈자리를 막아 잠시 마기 운용에 장애가 생기도록 하여 기절하게 해놓은 것뿐이다.

“죽이지 않는 것을 보면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온 분이시군요…….”

물보라 소리에 이어 탁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립이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니 실내에 마련된 우물 안에서 진득한 검은 물이 솟아 넉넉한 장포와 검은 삿갓으로 비대한 몸을 가린 사람으로 변했다.

“혹시 려 수사십니까?”

한립이 말이 없자 상대가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물속에서 걸어 나온 비대한 사내는 몸에서 화염을 일으켜 축축한 기운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당신이 대제사입니까?”

“고생스럽게 여기까지 찾아오셔 놓고 찾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단 말로 들립니다.”

“행적을 알 수 없는 분이고, 외부에 얼굴을 노출하는 경우도 거의 없으니 당연히 얼굴을 알 수는 없지요. 제가 올 줄 알고 일부러 경계를 느슨하게 해두셨나 봅니다.”

한립은 이상하다는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야양성 궁전 안에 살면서 태을경 초기 호위병을 둘이나 거느리고 있는데 경계를 느슨하게 했다니요? 허허, 제가 뭐라고 이보다 더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많지 않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당신이 대제사라면 제가 이곳에 온 목적도 아시겠지요?”

“천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만, 수사가 원하는 일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

대제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다라, 정말 그렇다면 당신의 목을 베어내고 진짜 대제사를 찾아야겠군요.”

한립은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직도 제가 대제사인 게 믿기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대제사라면 어찌 환자를 보지도 않고 구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겁니까?”

“천년 전에 점을 보았습니다. 점괘가 그러더군요. 그 일은 해서는 안 된다고.”

탁한 목소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그러니까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한다는 소립니까?”

“잘못된 길인 줄 알고도 그 길을 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동안 천년의 시간이 더 지났습니다. 괜찮으시면 다시 한번 점을 봐주시지요?”

한립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나오면 강요하지 않으시는 거겠지요?”

대제사가 옅게 웃으며 물었지만 한립은 가타부타 답을 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대제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곧 한 손을 들어 손끝으로 무언가를 셈하면서 손바닥에 꽃문양이 새겨진 동전 5개를 불러내 던졌다.

허공에 떠올라 동전을 받은 그는 앞면이 올라온 것과 뒷면이 올라온 것의 수가 2대3인 것을 보고 안색이 달라졌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운명이 이리 혼란스러울 수 있단 말입니까?

“대제사, 지금 하는 소리야말로 가서는 안 될 길을 가는 듯합니다.”

상대의 말에 한립의 목소리가 싸늘해졌고, 청죽봉운검 9자루가 떠올라 사방팔방에서 대제사를 위협했다.

그러나 대제사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표정이 또 달라졌다.

“수사, 혹시 려 가가 아니라 한 가 아닙니까?”

“스스로 무덤을 파십니다…….”

“하하, 우리 윤회전 동도끼리 그러지 마시지요.”

대제사가 탁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핏기라고는 없는 하얀 손을 쑥 내보였다.

그가 든 손바닥 크기의 원형 영패에는 ‘윤회령’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윤회전을 통해 내 소식을 들은 것입니까?”

한립은 의문이 가시지 않았기에 청죽봉운검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당신이 바라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제사의 말에 한립은 당장 손을 저어 은색 빛의 문을 열고 그 안의 작은 방을 보여주었다.

“이건……. 동천 보물!”

“맞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한립은 안으로 들어가 제혼을 안아올려 대전으로 돌아왔다.

촤아아.

대제사도 손을 저어 우물의 물줄기 속에서 백옥 침상을 불러내 준비를 해두었다.

백옥 침상에 눕혀 놓은 제혼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지도 않고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아 아름다운 시체처럼 보였다.

대제사는 천천히 다가와 삿갓을 벗고 놀랍게도 절색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잘생긴 소년의 얼굴을 드러냈다.

다만 핏기없이 창백한 피부가 미모를 깎아 먹고 있었다.

“일단 이분의 몸에 펼쳐둔 괴뢰금제부터 풀어주셔야겠습니다.”

대제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수결을 맺고 하얀 성신지력을 머리의 백회혈을 시작으로 불어 넣어 발끝까지 보냈다.

하얀빛이 지날 때마다 짐승의 송곳니처럼 굵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백골 바늘들이 밀려나와 한립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백골 바늘들이 모두 뽑힌 제혼은 몸을 말고 부들부들 떨었고, 이제껏 멈춰두었던 기운 유실이 계속되었다.

“이분은…….”

제혼의 기운을 감지한 대제사가 놀라 입을 벌렸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제혼은 사람이 아니라 보통 ‘형수’라 불리는 천지영수입니다.”

“그랬군요, 그랬어요……. 어쩐지.”

“왜 그러십니까?”

“형수는 진령에 속하지는 않지만 희귀하기로는 진령보다 더한 존재입니다. 체내에 지닌 본원법칙의 힘이 세간에서 3대 지존법칙이라 불리는 법칙 중 하나인 ‘윤회법칙’이니까요. 봉혼침(封魂針)으로 기운이 막혀 있을 때는 몰라도 지금도 본원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게 이분이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일 테고요.”

“대제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오래전 어떤 법칙의 힘에 영향을 받은 뒤부터 이렇게 되었습니다.”

한립은 단번에 문제를 파악한 대제사를 보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당시 윤회법칙의 힘에 영향을 받아 체내의 본원의 힘이 빠져나가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된 걸 겁니다. 동일한 윤회법칙의 힘을 단전에 불어넣어 주기만 하면 깨울 수 있겠어요.”

“그렇게 간단히 고칠 수 있단 말입니까?”

“윤회법칙을 수련하는 건 공간법칙보다도 어렵고, 시간법칙과 버금갈 겁니다. 윤회법칙의 힘을 통제해서 세밀한 작업을 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고요.”

“3대 지존법칙의 힘은 세상의 다른 법칙들을 압도하고 포괄해 수련하는데 필요한 자질과 조건이 엄격하기에, 익힐 수 있는 이가 극히 소수라는 점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혹시 대제사께서 수련하신 것이 바로 윤회법칙 아닌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대제사 직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가 천원복산(天元卜算)이라는 점술 덕이었습니다. 이 술법을 펼치는데 윤회법칙의 힘을 일부 빌려와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 예측하기는 하지만 윤회법칙을 제대로 장악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그랬군요. 그렇다면 대제사께서 제혼의 본원지력을 깨워주실 수 있겠군요?”

“맞습니다, 그저…….”

대제사가 말을 하는 도중에 한립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냐하면 백옥 침상에 누운 제혼이 힘이 탁, 풀려 더이상 몸을 말지도 못하고 늘어지더니 하얀빛의 실들이 버들잎처럼 흩날리며 빠져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빨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본원의 힘이 다하면 혼백도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떠돌 수밖에 없으니까요. 봉혼침 108개를 절묘하게 사용해 혼백을 몸에 붙들어 두기는 했지만 어쨌든 괴뢰 조종술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쓴 것이라 몸에 무리가 갔을 겁니다. 봉혼침을 제거하면 당연히 기운이 유실되는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요…….”

대제사의 말을 들으면서 한립은 연신술을 발동해 자신의 미간에서 수정실을 뿜어 제혼의 미간으로 쏘아 보냈다.

수정실이 번득 사라지고서야 하얀 기운들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제사, 제혼을 구해주십시오.”

한립은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치료하는 동안에는 절대 멈출 수가 없습니다. 저를 대신해 호법을 서주세요.”

“절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테니 안심하고 치료해 주십시오.”

대제사는 한립의 말을 듣고 백옥 침상 머리맡으로 가서 두 손을 쫙 펼치고 천지에 절을 하듯 엄숙하게 제혼의 머리에 얹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응결해 매화 꽃잎으로 변하더니 제혼의 이마 위로 나풀나풀 떨어졌다.

동시에 대제사의 손에 균열이 가면서 바람 한 점 없는 대전 안에서 소매가 스스로 펄럭여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낯선 법칙의 기운을 방출했다.

흐릿한 붉은 광채로 뒤덮인 대제사를 지켜보던 한립은 바람에 소매가 날려 드러난 피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준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던 비대한 몸은 살이 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푸른 멍과 갈색 고름들이 가득한 곪은 상처들이 부풀어 올라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 상처가 흉터가 된 것도 있었고, 머리통만한 혹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진득한 액체를 내뿜기도 했다.

이곳에 가득한 약재 향은 그의 몸에서 풍기던 것이었다.

“보기 힘드시면 바깥에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적어도 한 시진은 걸릴 테니까요.”

대제사의 전음이 머리에 울렸다.

“괜찮습니다.”

간결하게 답한 한립은 잠시 말이 없다가 십여 초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가봐야겠습니다.”

“가보세요. 절대 누구도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될 겁니다.”

“제혼을 부탁드립니다.”

포권을 하고 번득 사라진 한립이 대전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어둑한 밤하늘에서 눈부신 둔광들이 떨어졌다.

백발을 정갈하게 틀어 올린 잘생긴 사내는 석천공의 셋째 형님, 석파공이었다.

그 뒤로는 두 명의 마족 사내가 따라왔는데, 한 명은 철탑 같은 몸에 얼굴 절반을 금속 가면으로 가렸고 다른 하나는 마른 체구에 푸른 장포를 입은 백발이 성성한 인상좋아 보이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뒷짐을 쥐고 인자하게 웃고 있는 꼴이 마을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서생 같아 보였다.

한립은 의식을 퍼트려 주변에 궁궐을 순찰하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이들 셋뿐인 것을 확인했다.

그중 가장 수행이 낮은 철탑 사내가 태을 중기, 석파공이 그보다는 기운이 안정된 태을 중기 그리고 서생 노인이 태을 후기였다.

“허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석파공이 포권을 하며 웃음 지었다.

“석 수사의 따뜻한 보살핌 덕에 적린공경에서 죽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한립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려 수사께서 돌아오신 것을 보면 제 아우도 돌아왔겠군요?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석천공은 당신을 진짜 가족으로 생각했습니다. 황위를 놓고 당신과 다툴 마음도 없었고요. 왜 불필요한 일을 벌이신 겁니까?”

“현명한 분이니 ‘싸우고 싶지 않다고 해도 이미 싸우고 있다’는 뜻을 알아들으실 겁니다. 황위라는 게 그렇습니다. 그게 아우의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제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요.”

석파공도 이 말을 하면서는 약간 눈빛이 가라앉았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당신들 형제가 무얼 하든 제가 관심 가질 일은 아니지요. 오늘 저를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는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적린공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제가 심어 놓은 사람들이 전부 연락이 끊겨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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