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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14화 (1,771/2,000)

2014화. 침입, 야양성

*

똑똑.

시간이 지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주변 물건을 정리하고 방문을 열었다.

하얀 해 도인 괴뢰가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사심이 도착했습니다. 해 수사가 공간통로를 열 준비를 마쳤으니 가시지요.”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까?”

의식이 본체를 떠났다가 방금 깨어났는데?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지요.”

하얀 해 도인이 웃으며 물러나려는데 한립이 그를 불러 세웠다.

“성함이 백령이라고요?”

“석공해 수사가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백령 수사, 오래전 해 수사가 처음 삼시를 베려 했을 때 석공해가 기습했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예, 액회가 석공어를 불러드렸었지요. 그때의 실패로 석공해 수사가 머나먼 길을 돌아와야 했습니다.”

백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해 수사가 기습을 당할 때 백령 수사도 그곳에 계셨겠습니다. 그때 어떻게 위기를 넘겼는지 아십니까? 제3자의 개입이 있었다든가…….”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물으며 상대의 안색을 살폈다.

“위기랄 것도 없었습니다. 석공어의 실력이 강하다고는 하나 적린공경 내의 제약 때문에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니까요. 석공해 수사가 삼시를 베어내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뿐이라 원하던 것을 얻자 스스로 물러났지요. 제3자라면……. 저희가 있던 곳은 고립된 곳이어서 누구도 쉽게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해 다른 세력은 참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석공어가 성역을 지배하고 있는데 다들 우리를 공격하지는 못해도 도울 리 있었겠습니까.”

백령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군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한립은 하얀 해 도인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뒤늦게 미간을 좁혔다.

백령의 태도로 보아 해 도인에게 물어도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시의 진상은 스스로 천천히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대전으로 가자 해 도인 말고도 스무명 정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자령, 사심, 육화부인, 석천공, 탁과, 헌원행 등이 있었고 심지어 주자원과 주자청 오누이도 보였다.

대전 한쪽에 마련된 하얀 제단에 원형 진법이 금색과 하얀색 빛을 뿜으며 공간 파동을 발산했다.

“한 수사, 오셨습니까?”

해 도인이 직접 일어나 그를 맞이하자 사심 등도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자령은 사심의 뒤에서 그의 기운이 또 한층 깊어진 것에 눈을 반짝였다.

“모두를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다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걸요. 이게 외부로 통하는 전송진입니다. 혹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으셨다면 지금 하셔야 할 겁니다.”

해 도인은 힐끗 자령을 보며 이렇게 말하고 손가락을 까딱해 한립의 단전에 금빛을 던져 넣어 선령력을 흐름을 회복시켜 주었다.

해 도인이 진법 쪽으로 비켜주자 사심이 따라붙어 전송에 관한 일을 상의했다.

멍하니 있던 한립이 성큼성큼 자령에게 다가가 방음벽을 치고 무어라 말하려는데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려 말을 막았다.

“배웅하러 왔을 뿐이에요. 딴생각 말아요.”

그녀는 빙긋 웃고 있었다.

“여기 남아있을 생각인 것이냐?”

“그간 당신이 전수해준 <천살진옥공>을 수련하며 실력이 상당히 늘었어요. 성신지력이 풍부한 적린공경 안은 이런 연체공법을 익히기에 가장 좋은 곳이고요. 여기서 실력을 키워 마역으로 나갈 생각이에요.”

“그것도 좋겠지. 지금의 마역도 안전한 곳은 아니니……. 적린공경 안에서 잘 지내거라.”

한립은 마지막 말을 하기 전 절색의 여인을 지긋이 응시하다 평온히 말했다.

“<연신술> 수련도 시작했어요.”

“그럴 줄 알았다.”

“저도 의식의 힘은 한 형 못지않게 재능이 있잖아요. <연신술> 같은 공법을 놓칠 수 없죠.”

“수련에 관해서는 스스로 결정하면 되겠으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바로 내게 연락을 줘야 한다.”

“알겠어요.”

한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자령에게 성공계 안의 특수한 물건들을 꺼내 챙기고 다른 물건들을 집어넣어 그녀의 왼손에 끼워주었다.

“생긴 것은 별로다만 적린공경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저물반지라 쓸만할 것이다. 여기 남기로 했다니 주고 가마.”

“너무 귀한 물건이라 받을 수 없어요.”

자령이 놀라 손가락을 빼려 했다.

“어차피 난 여길 떠날 것인데 이걸 지니고 있어 봐야 무얼 하겠느냐.”

“그렇긴 하네요. 깜빡 잊을 뻔했어요.”

“안에 <천살진옥공> 후반부 공법과 윤회전 가면도 넣어 두었으니 나와 연락하는 용도로 쓰면 된다. 다른 것들도 필요한 때가 있을 것이야. ……내가 곁에 없을 때 혼자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애쓰지 말고 해 수사에게 부탁하고.”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무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이번엔 석천공이 다가왔다.

“적린공경에 들어오기 전부터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 감사한 마음을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자령 수사와 마찬가지로 수사와 작별해야 할 것 같아 나왔습니다. 한동안 적린공경 안에 머물 생각이라서요.”

“석 수사도 떠나지 않는단 말입니까?”

의외의 말에 한립이 코끝을 긁적였다.

“셋째 형님도 믿을 수 없는데, 세력이 변변치 않은 제가 야양왕조로 돌아가 봐야 굴욕이나 당하며 살겠지요. 차라리 이곳에 남으려 합니다. 수사와의 친분 덕에 여기 생활이 훨씬 나을 것 같아요.”

석천공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좋겠습니다. 그럼 자령 수사를 부탁합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 도인이 마주와 적대관계여서 그가 정말 원해서 남는 것인지 아니면 협박이라도 당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사실 벗인 석천공보다는 결맹 관계인 해 도인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서 일부러 묻지 않았다.

“괴성 실세인 자령 수사를 제가요? 하하, 제가 자령 수사 덕을 보고 살아야 할 판입니다.”

“무슨 말씀을요. 한 형의 벗이시면 제게도 벗이나 마찬가진데요. 게다가 제가 적린공경을 나설 때가 되면 야양왕조 13황자이신 석 수사의 덕을 봐야 할 테고요.”

자령이 듣고 있다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맡겨만 주세요!”

석천공이 자신의 가슴을 탁탁 쳤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립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자령이 적린공경 안에서든, 마역에서든 의지할 곳이 생겼다는 게 다행이었다.

“나는 가보마. 몸 잘 챙기거라.”

“항상 건강하세요.”

한립은 입술을 달싹여 자령과 전음을 주고받았다.

“한 수사, 자령 수사의 이야기를 들으니 적린공경을 빠져나가는 대로 선역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요. 도움을 드리기로 해놓고 여태껏 무엇하나 약조한 바를 이루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석천공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저를 도와 자령을 찾아준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하지요.”

한립의 말에 석천공도 안색이 나아졌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성역으로 가는 것이냐?”

주변을 둘러본 한립은 자령에게 전음을 보냈다.

“네, 해 수사가 무슨 계획이 있는 듯해요.”

그들 세 사람이 한담을 나누는 동안 준비를 마친 해 도인이 한립을 불렀다.

한립은 사심 등과 같이 전송진법에 오르고 해 도인은 바깥에서 주문을 외다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전송진에서 발산된 눈부신 금빛과 하얀빛이 위쪽에 나타난 공간 소용돌이와 만나 새까만 통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전송진에 있던 이들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한립은 고개를 들어 자령과 시선을 마주쳤다.

쉭!

공간통로와 함께 모두가 사라지고 자령은 멍한 눈으로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 * *

무성하게 나무와 풀이 자라난 마역의 어느 숲.

휘황찬란한 빛이 하얀 빛구슬로 뭉쳐지더니 그 안에서 검은 공간통로가 나타나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한 명씩 토해냈다.

한립은 묵직하던 압력 대신 천지영기가 느껴지자 기뻐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의식을 퍼트려 위치를 파악했다.

“한 수사, 저는 주인님의 명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지요.”

사심이 먼저 그에게 공수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수하들을 이끌고 급히 날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을 반짝이던 한립도 바로 방향을 잡아 사라졌다.

* * *

야양성(夜陽城) 중간을 가로지르는 대로 옆으로 난 작은 골목.

어둡고 좁은 곳이라 지나는 사람이 없었고, 담벼락에는 이끼가 끼어서 언제 보수를 했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 위를 해가 넘어가며 주황색 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팟.

그때 담벼락 뒤에서 공간파동이 일고 푸른 장포를 입은 한립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윤회전 가면을 써 이마에 작은 뿔이 난 마족 청년으로 변신하고는 여유롭게 골목을 빠져나와 걷기 시작했다.

얼마 후, 잎이 무성한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몇 사람이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목청 좋은 흑의 사내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려왔다.

“그게 뭔 소립니까? 내 보기에 3황자께서 일은 잘하십니다. 예전에는 마가구만 넘어가려고 해도 각종 신분 검사에 골치가 아팠는데 대황자께서 정한 빡빡한 규정들이 사라지고는 상인이든 수행을 쌓은 이들이든 편하게 오가지 않습니까.”

“그건 또 그렇게 말할 일은 아닙니다. 대황자께서 계실 때는 낙가구, 마가구는 물론 우리 흑천구까지 치안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이제는 닷새가 멀다 하고 거리에서 싸움이 벌어지거나 패싸움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또 다른 마른 노인이 그의 말에 반박했다.

“음, 두 황자님들이 손을 잡고 함께 관리하시면 제일 좋겠어요.”

아직 어린 마족 소년이 노인의 품에서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모여 있던 이들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렸다.

“저 선배님들, 저는 타지에서 온 사람인데 여기는 어느 구역인지요?”

한립은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초행인 것처럼 물었다.

“야양성은 처음인가 봅니다. 여기는 흑천구 가장 남단입니다. 어딜 가려고 그럽니까?”

중년 사내가 힐끔 그를 보고 물었다.

“마가구에 집안 어른 한 분이 사셔서 그리로 가는 길인데 아직도 흑천구일 줄은 몰랐습니다. 야양성은 정말 크네요.”

“허허, 처음 오면 다들 그렇지요. 아직 해가 있을 때 서둘러 시장으로 가 마차를 빌리세요. 걸어 다니다가는 언제 마가구에 도착할 지도 모릅니다.”

마른 노인이 웃음을 띠고 말했다.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궁금한 것이 생겼는데, 성주께서 야양성을 다스리시는 게 아닙니까?”

“이런, 어느 시골에서 왔기에 그걸 아직도 모른단 말입니까? 5백 년 전에 폐관수련에 들어가셔서 요즘 정무는 전부 3황자께서 보고 계십니다.”

중년 사내가 놀란 얼굴을 하더니 그를 아래위로 훑으면서 실소했다.

“그랬군요. 대황자께서는요?”

“실종되신 지 벌써 천년입니다. 폐관수련 중이란 이야기도 있고 바깥세상을 유람한다거나 성주께 연금을 당했다는 듯 기상천외한 소문들이 무성하지만 누구도 뭐가 진실인지는 모르지요.”

한립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마른 노인이 웃음 지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립은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네고는 성의 대로를 따라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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