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화. 과거의 전쟁
*
액회와 사심이 맞붙고 다른 염룡위들이 진법을 펼치고 적린공경 사람들을 막는 사이 한립은 틈을 보다 검은 그림자로 변해 입구로 뛰어들었다.
전방의 염룡위 셋이 그를 발견하고 동시에 금색 검과 하얀 도 그리고 푸른 창을 내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발을 쿵, 굴러 공격이 닿기 전에 그들에게 다가가 소매 속에서 푸른 채찍을 꺼내 휘둘렀다.
오는 길에 죽은 염룡위의 몸에서 구한 무기였다.
휘릭!
기다란 푸른 채찍이 세 무기를 잠시 붙들어 둔 순간, 한립은 다시 한 번 쿵, 발을 굴러 핏빛으로 물든 몸으로 잔영을 남기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육신의 잠재력을 격발해서라도 천기전으로 들어가 진상을 파악하겠다고 결정을 내려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쪽에 다른 염룡위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사람이 나타났다.
흑자색 갑옷의 가슴에 금색 용머리가 새겨져 있는 게 지위가 높은 지휘관인 듯했다.
굵은 염룡위 사내의 팔이 붕! 원을 그리면서 검은빛을 내뿜어 한립이 만들어 놓은 잔영을 모두 덮쳤다.
잔영들이 검은빛에 걸려들어 느려졌다.
“내 앞을 그냥 통과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냉소를 흘린 염룡위는 오른손을 갈퀴처럼 굽혀 내려쳤다.
펑!
검은 권풍에 잔영이 전부 사라졌는데 한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위쪽이다!”
염룡위가 멈칫할 때 액회가 전음을 보내주었다.
한립이 그의 머리 위 몇 장 위에 떠서 핏빛으로 물든 몸으로 더욱 빠르게 쉭! 하고 사라졌다.
“오선이 저런 실력자였었나?”
사심도 이쪽을 보며 이상하게 생각하다 손을 저었다.
“저 멍청이가!”
그를 놓친 것을 본 액회는 대노해서 만룡검으로 멀리 달아나는 한립의 뒤통수를 뚫어놓으려 했으나 사심의 금색 매 모양 괴뢰가 먼저 날아들어 두 발로 검을 낚아챘다.
한립은 멈추지 않고 이제 뻥 뚫린 천기전 대문으로 달려 들어갔다.
액회가 열이 받아 사심을 돌아보자 그녀가 씩 웃고 있었다.
“저놈을 잡아 죽여라! 절대 성황 대인의 일을 그르치게 두어선 안 돼!”
액회는 사심을 신경 쓸 틈도 없이 소리를 높였다.
즉시 염룡위 네 명이 전장에서 벗어나 한립을 따라갔고, 우두머리 청년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 달려갔다.
사심은 연달아 열 손가락을 튕겨 만룡검을 막은 매 괴뢰의 눈에서 금빛을 뿜었다.
쿠쿵!
그러자 금빛이 돌담으로 스며들고 활짝 열려 있던 대전의 문이 닫혔다.
이에 염룡위 몇 명이 뛰어가던 기세 그대로 문에 충돌했지만 대전 문은 미동도 없었다.
“당신!”
“천기전은 이미 폐쇄됐습니다. 주인님이 직접 펼쳐두신 금제 때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을 거예요. 액회, 당신의 계획은 실패할 겁니다!”
살기가 가득 담긴 액회의 눈빛을 받고도 사심은 코웃음 쳤다.
* * *
등 뒤로 갑자기 문이 닫히자 한립은 움찔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천기전의 구조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똑같았고, 곳곳에 부서진 탁자와 의자 그리고 갑옷 괴뢰 잔해들이 보였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핏빛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무언가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핏빛 안개는 해를 끼치기는커녕 신체 능력을 무리해서 끌어 쓴 한립의 상태를 완화 시켜주었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그는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기에 빠른 속도로 이동해 검은 돌의자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대로야!’
돌의자를 발견하고 표정이 밝아진 한립은 그걸 잡고 힘껏 돌려 지하 통로로 들어갔다.
<만규공적술>을 발동하고 익숙한 돌계단을 따라 동굴 입구에 다다르자 안에서 쾅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니 거대한 혈호에 파랑이 일고 그 가운데 수정관 대신 혈홍색의 네모난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9개의 거대한 혈홍색 옥석 기둥이 세워진 제단은 복잡한 문양에서 핏빛을 발하며 두꺼운 보호막을 만들어 내부와 외부를 차단했고, 그 안에서 해 도인이 눈부신 금빛에 휩싸여있었다.
그의 질끈 감은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는 게 엄청난 고통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에서 회백색 안개 같은 게 피어올라 위쪽에서 흐릿하게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갔다.
한편 혈호 주변의 공터에서는 세 사람이 격정적으로 싸우고 있었는데 검은색, 흰색, 보라색의 세 인영은 각각 해 도인의 두 참시(斬尸) 괴뢰인 흑령과 백령 그리고 보라색 갑옷을 입은 마주 석공어였다.
‘아냐, 저것도 괴뢰구나.’
석공어를 유심히 살펴본 한립은 그도 본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긴 적린공경은 대라경 이상의 사람이 들어올 수 없다고 했으니 석공어도 별다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의 싸움에 금제가 펼쳐진 지하동굴이 쩌렁쩌렁 울리기는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고, 혈호의 핏물이 크게 출렁였다.
석공어의 보라색 괴뢰는 실력이 뛰어나서 전신에 보라색 뇌전을 감고 순간이동을 하듯 움직이며 싸우고 있었다.
또한 해 도인의 참시 괴뢰도 실력이 상당했고, 금빛을 두르고 적린공경의 압력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마기와 법칙 공격을 썼다.
“석공어 수사, 그만하시죠. 괴뢰가 강한 것은 인정하겠으나 우리를 이기지는 못할 겁니다. 어차피 석 수사는 더이상 공간 법칙을 수련하지 않아 당신에게 위협이 되지도 않지 않습니까? 그간의 원한을 풀고 평화롭게 지내시죠. 성역의 진짜 적은 천정이 아닙니까.”
하얀 해 도인이 상대를 설득하려 했으나 콧방귀를 뀐 석공어가 흐릿하게 사라졌다.
안색이 달라진 하얀 해 도인 옆으로 몇 장을 피했을 때 뇌전이 깃든 주먹이 그가 서 있던 곳에 떨어졌다.
쿠앙!
바닥에 물항아리만 한 구멍이 파였다.
그때 석공어 머리 위로 검은 해 도인이 나타나 검을 내리쳤다. 검에서 흘러나온 빛이 까만 연꽃의 모습을 하고 석공어를 둘러쌌다.
허공을 종이처럼 가르는 검빛에도 석공어는 두려워하지 않고 주먹을 들어 보랏빛 뇌전을 방출했다.
쿠앙!
이어 주먹과 칼의 충돌에 공간이 울리고 공간균열 일고여덟 개가 나타났다. 석공어와 검은 해 도인은 동시에 뒤로 물러섰지만 곧바로 격돌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한립은 침음했다.
여기까지는 해 도인이 말해준 것과 일치했고, 훨씬 긴박감이 넘치는 상황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고리 허상의 도문이 많이 꺼져 있었다.
그만 돌아갈까 싶기도 했지만 후일 도조경에 이르는 해 도인의 과거를 알아둬서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에 그냥 있었다.
쿠릉!
마지막 굉음이 들리고 전투가 멈췄다.
“석공어 수사, 서로의 실력이 엇비슷해서 이렇게 싸우다가는 어느 세월이 끝이 날지 알 수 없습니다. 말했다시피 그냥 되돌아가시지요.”
하얀 해 도인이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석공어가 씩 미소를 지었고, 입구 뒤에 숨어 듣고 있던 한립은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석공어가 참시괴뢰들을 상대로 싸우며 시간을 끈 데는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참시괴뢰도 그걸 깨닫고 어두운 얼굴로 석공어에게 달려들었다.
크게 웃음을 터트린 석공어는 그들을 개의치 않고 주먹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다.
마른 문어 다리처럼 생긴 검은 주술문자들이 회색 해골의 체내에서 튀어나왔다.
해골이 떠난 석공어의 괴뢰 몸은 즉시 회색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올랐다.
그러자 회색 불길 속에서 어렴풋이 검은 주술문자가 응결해 사람 얼굴 모양을 만들어냈는데 독이 오를 대로 오른 흉악한 표정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무언가 서늘한 법칙 파동이 그 안에서 흘러나와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적린공경은 모든 기운을 배척해서 법칙의 힘도 예외는 아니라서 어둡고 서늘한 법칙 파동도 약화된 채 지하 공간에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석공어 뒤쪽에 비교적 가까이 있던 한립도 법칙 파동에 영향을 받아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괴이한 무형의 역량이 의식세계로 스며들어 그의 혼백을 뒤흔들었다.
정순하던 의식에 먼지가 낀 듯 혼탁해져서 의식 소인이 초조하게 비명을 질렀다.
모든 증상이 심마(心魔)가 도래할 거라 외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법칙인 거지?’
오장육부가 뒤집히고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한립은 화들짝 놀라 연신술을 펼쳤다.
참시괴뢰들도 법칙의 힘에 둘러싸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저주법칙(咀呪法則)!”
안색이 급변한 두 참시괴뢰는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해 도인을 향해 다가갔다.
검은빛을 터트린 그들은 강렬한 법칙 파동으로 해 도인과 핏빛 보호막 전체를 지키려 했으나 저주 법칙이 먼저 핏빛 보호막을 뚫고 들어 와 해 도인을 방해했다.
푸악!
도조경에 이르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해 도인은 저주 법칙의 기습에 피를 토했고, 주변 빛이 어그러지면서 붕괴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 저주 법칙이다! 적린공경 안에서는 마기를 쓸 수 없어 저념악골(詛念惡骨)을 준비했지. 석공해, 난 분명히 말했었다. 네가 날 이기지 못하면 무슨 법칙을 수련하든 간에 평생 너를 짓밟아 주겠다고!”
광소를 터트린 석공어가 정혈을 내뱉어 회색 해골에 흡수시켰다. 회색 화염이 더욱 맹렬하게 불타고 안쪽의 흉흉한 얼굴이 더욱 선명해졌다.
‘안 돼!’
그걸 본 한립이 놀라 석공어에게 들킬 것도 감수하고 계단 위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몇 걸음 가기도 전에 저주의 힘이 밀려들어 그의 혼백을 공격했다.
‘윽!’
의식세계에 화약이 터진 것처럼 충격이 밀려들어 한립은 풀썩 쓰러져 계단에서 굴러 내려온 끝에 지하동굴 입구로 나와 버렸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그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몸만 덜덜 떨었다.
이때 석공어가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뒤를 돌아보려는데, 그의 앞에 검은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검은 장포를 입고 검은 안개로 얼굴을 가린 사람은 커다란 손으로 회색 해골을 낚아채 힘껏 쥐었다.
뿌득!
회색 해골이 가루가 되고 그 안에서 회색 화염이 흘러나와 더욱 강렬한 법칙 파동을 냈다.
검은 인영도 그럴 줄 몰랐던지 얼굴을 가린 안개가 그 위력에 흩어져 얼굴 반쪽이 드러나자 급히 안개를 보충해 가렸다.
바닥에서 몸부림치던 한립은 우연히 각도가 맞아 그의 얼굴 반쪽을 보고는 몸부림을 멈췄다.
입을 쩍 벌린 그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았다.
다음 순간, 회색 기류와 함께 더욱 강렬한 저주 법칙이 의식세계로 침투해왔다.
쨍!
거울처럼 쪼개진 의식세계 때문에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면서 암흑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차차 의식을 회복한 한립은 눈을 뜨고 핏빛 문양이 반짝이는 익숙한 편전 지붕을 보았다.
본체로 돌아온 것이다.
끔찍하던 혼백의 고통도 훨씬 견딜 만했다.
시공간 초월의 기억이 떠오른 한립은 등골이 오싹해져서 바닥에 엎드려 숨을 헐떡였다.
한참 후에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검은 인영의 반쪽 얼굴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평범한 용모에 까무잡잡한 피부는 누가 봐도 그였다. 닮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자신의 얼굴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마음속에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해 도인이 삼시를 베어낼 때면 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우연히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그 시대에 있었던 걸까?’
하지만 직감이 절대 이 모든 게 우연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