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화. 실종
*
대전을 떠난 해 도인은 어느 은밀한 밀실로 들어섰다.
겨우 등불 하나가 밝혀져 있어 그 주위만 노란빛이 일렁이고 나머지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 등불 아래 누군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석 수사, 오랫동안 고생 많았네. 드디어 뜻을 이루었으니 축하를 해야겠군.”
몸을 돌린 검은 인영은 이목구비가 정확히 보이지 않아 실체를 갖춘 사람이 아닌 무언가의 투영 같아 보였다.
“전부 선배님 덕분입니다! 당시 젊은 욕심에 삼시 중 둘을 베어내고 마지막 하나까지 단번에 베어낼 수 있다는 망상을 한 탓에, 액회가 석공어를 끌어들이는 줄도 모르고 방심을 했습니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 선배님께서 혼백과 기억을 괴뢰에 봉인해 하계에서 괴뢰의 삶을 살며 철저히 괴뢰 법칙의 진의를 깨우치라 조언을 해주셔서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 도인은 흐릿한 인영을 향해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말 한마디 해준 걸 가지고 이만큼 해냈으면 스스로의 능력이라고 봐야겠지.”
“어찌 되었든, 선배님의 은혜는 결단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허울뿐인 말은 되었고, 이것만 확실히 해두어야겠네. 당시의 약속은 아직 유효한 것이겠지?”
“물론입니다. 석공어가 저를 이렇게 망쳐놨는데 제대로 되돌려 주지 않을 수 있나요.”
흐릿한 인영의 물음에 해 도인이 냉소했다.
“석공어는 마역을 오래 다스려서인지 세력도 커지고 그 뿌리가 깊어졌어. 적린공경의 세력만으로는 적수가 되지 못하고 이제 막 도조가 된 자네도 석공어의 상대가 되지 못하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세.”
희색을 드러낸 흐릿한 인영이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다시는 이전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지요, 선배님.”
“다행일세. 자, 한 가지 더 도와줄 일이 있네.”
“말씀하시지요.”
해 도인이 귀를 기울이고 흐릿한 인영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을 듣는 해 도인은 무의식중에 어딘가를 보며 안색이 달라졌다.
* * *
자리에 앉아 폐관 수련 중인 한립은 금빛을 물씬 머금고 있었다.
그가 적린공경에 들어온 지 천년이 넘는 세월 만에 자유롭게 선령력을 운용하고 있자니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웅!
금색 고리가 등 뒤로 떠올라 회전했다. 바로 진언보륜(眞言寶輪)이었다.
뒤이어 광음정병(光陰淨甁), 환진사루(幻辰沙漏), 단시류화(斷時流火), 동을신목(東乙神木) 등이 줄줄이 나타나 그를 중심으로 떠올랐다.
한립은 자신이 불러낸 것도 아닌데 스스로 떠오른 보물들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설마 또…….”
시간법칙의 수정실들이 보물들에서 뻗어 나와 금색 고리를 이루며 회전했고, 그의 몸속에서 법칙의 힘이 날아올라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보다 배는 커지고 눈부신 빛을 내뿜는 고리가 웅! 웅! 날카롭게 울어댔다.
쉭!
녹색빛이 그의 가슴 속에서 날아올라 장천병으로 변하고는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터트렸다.
쉭!
급격히 수축해 병 입구에 딱 맞는 크기로 변한 고리는 장천병에 쑥 끼워졌다.
양자의 접촉에 웅장한 시간법칙의 힘이 장천병에서 흘러나와 퍼지고, 병 자체가 커지면서 내부의 수많은 녹색 주술문자들이 뭉게구름을 이루고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이어서 녹색빛이 병 입구를 빠져나와 전방의 허공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콰르릉!
돌연 허공이 찢기며 수정빛이 응결해 장벽을 이루고 수많은 장면이 휙휙 지나갔다.
이어 수정장벽 위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 한립을 빨아들였다.
여러 번 있었던 일이라 이제는 그도 편안한 표정으로 저항하지 않고 있었는데 단전의 금색 빛구슬이 훅, 꺼지면서 체내의 선령력이 얼어붙었다.
소용돌이의 흡입력이 줄어들고 끌려 들어가던 한립은 다시 바닥에 두 발이 붙었다.
대신 극심한 두통이 생긴 뒤 혼백이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 의식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황원의 너른 강 옆이었다. 공중에서 물방울들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또 여기로 왔군. 대체 여긴 어딜까?”
한립은 강으로 다가가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강을 따라 상류로 걸으면서 이곳을 탐험해볼 생각이었다.
이에 혼백 상태의 그는 하얀 구름처럼 바람을 따라 살살 이동하는 터라 그리 빨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도 가도 풍경은 거기서 거기였고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곳도 아니라 시간의 흐름은 모호했다.
어림짐작으로 7일이나 8일쯤 이동했지만 강은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는 점차 인내심이 바닥나 갔지만 참고 또 참으면서 이틀을 걸어가도 마찬가지였다.
“공간이 큰 것인지 아니면 환술 금제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더 가봐야 소용없겠어.”
걸음을 멈춘 한립이 대허로 방향을 틀고 걸어가려는데, 머리 위에서 노란빛이 반짝이더니 팔뚝 크기의 노란 구름에 콩알만 한 검은 눈 두 개가 나타나 그를 보고 있었다.
‘병령!’
노란 구름은 눈을 깜빡거리면서 그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 일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까?”
그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노란 구름이 수정빛으로 바뀌어 혼백 속으로 달려들었다.
피할 틈도 없이 노란 수정빛은 뜨거운 기류가 되어 혼백에 녹아들었고 깜짝 놀란 한립이 다른 질문을 하려 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경악한 한립이 꼼꼼하게 이상이 없는지 몸을 살폈지만 이상한 점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당장은 내막을 알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자 강을 흐르는 빛구슬로 시선을 돌렸다.
이는 빛구슬이 과거의 어느 시점을 나타내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당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런 장천병의 시공간 초월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이라 온전히 장악하면 그 이로움은 말로 다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저 강을 흐르는 빛구슬의 수가 너무 많고 아직 이렇다 할 규칙을 찾을 수도 없어 어디로 가게 될지는 운에 맡겨야 했다.
그리고 특정 시점으로 가는 게 가능했으면 해 도인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았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해 도인이 성해와 융합해 하루아침에 도조경에 이르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틈이 생겼다.
이전처럼 절대적으로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그의 이야기에서 허점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는 것 같았다.
촤아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강을 따라 흐르던 빛구슬들이 출렁이면서 열댓 개의 크고 작은 빛구슬이 튀어 올라 한립 옆에서 흐르지 않고 멈췄다.
호기심을 느낀 한립은 정지한 빛구슬이 대부분 화려한 궁전 같은 곳을 비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뭔가 눈에 익은데.”
한립은 빛구슬에 나타난 궁전이 천기전 인근의 건물들이며 엄청난 격전이 펼쳐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그중 가장 큰 빛구슬로 두 걸음 다가섰다.
슉!
이때 빛구슬이 강력한 힘을 발휘해 그의 혼백을 집어삼켰다.
* * *
눈을 뜬 한립은 자신이 금포 위에 검은 갑옷을 입은 청년의 몸에 깃들어 반쯤 무너진 궁전 안에 누워있다는 것과 복부 단전이 있는 자리에 칼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반투명한 금빛 고리가 머리 위에 떠서 천여 개의 시간도문을 반짝이고 있었다. 꽤 가까운 거리에서 굉음이 들리는 것이 격전이 벌어지는 중인 것 같았다.
한립은 금포 사내의 몸을 이용해 바로 일어나지 않고 의식으로 잔류기억과 소통했다.
금포 사내의 이름은 오선으로 적린공경에 갇힌 죄수였다가 석공해 그러니까 해 도인의 수하가 되어 호위를 맡게 된 자였다.
해 도인은 삼시 중 마지막 시(尸)를 베어내기 위해 폐관 수련 중이라 적린공경의 경비는 어느 때보다 삼엄했는데 오늘 느닷없이 대량의 적군들이 몰려와 천기전을 포위했다.
오선의 기억을 읽어낸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강가에서 해 도인의 과거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자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어느 시점으로 시공간 초월을 하는지 선택할 수 있게 된 걸까?’
이것이 병령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생각할수록 그런 것 같았다.
잠시 후 몸을 일으킨 그는 무너진 대전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편 하늘 위에서는 괴뢰들과 비행능력을 지닌 자들이 얽혀 싸우고 있었는데, 한쪽은 오선처럼 검은 갑옷을 걸쳤고 반대편은 흑자색 갑옷을 걸쳤다.
흑자색 갑옷은 한립도 익숙한 야양왕조의 것이었다.
야양왕조 쪽 사람들은 체구가 무척 크고 흑청색 피부에 이를 드러낸 용 문양 같은 게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수는 많지 않았지만 실력이 대단해서 힘과 속도에서 적을 압도했다.
“염룡위(魘龍衛)들이군, 석공어가 습격한 게 맞았어.”
전에 한가로울 때 석천공과 야양왕조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염룡위는 극강의 연체사들로 이루어진 군대로 오직 마주의 명만을 들었다.
오늘 직접 보니 염룡위의 실력이 남다르기는 했다.
개개인이 현규 150개 이상은 뚫은 현수 공법의 고수였다.
한립은 전투를 지켜보다 시선을 더 먼 곳으로 돌렸다.
4개의 9층 첨탑이 백옥 광장 네 모서리에 서 있고, 그 중앙에 위풍당당하게 유리 궁전인 천기전이 세워져 있었다.
천기전으로 갈수록 전투는 더욱 격렬해 졌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갑옷을 끌어 내려 배의 상처를 감추고 <만규공적술>을 운용해 천기전 쪽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만규공적술>을 발동한 그를 알아차리는 이가 없었는데, 천기전에 가까워지니 몇몇이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때 흑자색 대검을 든 염룡위가 몸에서 기포 터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달려들어 그의 머리를 쪼개려 들었다.
한데 겨우 백여 개의 현규를 뚫은 오선은 염룡위보다 실력이 못했지만 한립이 조종하고 있어 판단력과 안목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에 좌우로 몸을 흔들어 9개의 그림자를 만든 한립은 염룡위의 대검을 피하면서 스치듯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그를 쫓으려던 염룡위는 다른 적린공경 사람들에게 발이 묶여 추격을 포기해야 했다.
이미 행적이 노출된 한립은 발재간을 부리며 몸에 남은 힘을 끌어내 전장을 마구 누비면서 천기전 쪽으로 달려갔다.
천기전 근방에서는 쌍방이 더욱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염룡위 쪽이 대문을 막고 싸우는 형세였다.
“저건…….”
폐허가 된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기고 대전 문을 보던 한립은 적린공경 쪽의 우두머리인 사심이 다섯 마리 괴뢰들을 조종해 푸른 갑옷을 입은 한 사람과 싸우는 것을 보았다.
액회였다.
전신의 현규 6, 7백 곳을 밝힌 그는 만룡검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외모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지만 분위기가 지금보다 가볍고 교활해 보이는 구석이 덜했다.
“액회! 석공어와 결탁해 주인님을 배반하다니, 죽어 마땅하다!”
“때를 아는 자가 영웅이라 했습니다. 어차피 석공해는 오늘 죽어요! 사심, 내 공을 나눠줄 것이니 지금이라도 성황의 편에 서세요. 당신의 실력이면 성황이 중용할 겁니다. 이런 황폐한 땅에서 사는 것보다 백 배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고요.”
“헛소리!”
실실 웃는 액회를 향해 사심이 조종하는 다섯 괴뢰가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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