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화. 해 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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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대화를 나누기 편한 곳으로 자리를 옮깁시다.”
주위를 둘러본 해 도인이 눈을 번득이고 손을 저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힘이 둘러싸고 한립은 눈앞이 번쩍하면서 어느새 지하 궁전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수정관에 누워있던 또 다른 금색 ‘해 도인’이 깨어나 한쪽에 서 있었고 그 옆에 두 명의 인형 괴뢰가 더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전신이 새까맣고 다른 한 명은 전신이 새하얀 괴뢰들 역시 해 도인과 똑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중 검은 괴뢰는 잘근잘근 씹어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은 흉흉한 눈빛으로 해 도인을 쳐다보았고, 하얀 괴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흠칫 놀란 한립이 해 도인들을 쳐다보는데, 두 괴뢰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해 도인만 바라보았고, 금색 괴뢰만 잠시 이채를 띠고 그를 보다 시선을 돌렸다.
“흥, 도천대겁을 이겨내다니 운도 좋습니다! 허나 겨우 그걸로 기고만장해 마세요, 언젠가 당신을 죽이고 내가 그 자리를 대신 할 것이니!”
검은 괴뢰가 섬뜩하게 웃으며 경고했다.
“대도를 이룬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희를 부른 것은 분부가 있어서인지요?”
하얀 괴뢰는 표정 그대로 말하는 것도 부드럽고 따듯했다.
“세 분이 해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흑령 수사는 괴성으로 가서 사심에게 내가 출관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준비를 시키세요.”
해 도인이 검은 괴뢰에게 분부하자 상대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대답도 없이 휙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백령 수사는 수고스럽겠지만 대허 주변의 공간 금제를 거둬 괴성 사람들을 이곳으로 모아주셔야겠습니다.”
하얀 괴뢰는 알겠다고 답하고 바로 떠났다.
“내 때가 되면 적린공경의 본원의 힘을 이용해 외부로 통하는 공간통로를 만들어야겠으니, 금령 수사는 가서 준비를 좀 해주세요.”
이에 금색 괴뢰가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갔다. 한 명씩 사라지는 괴뢰들을 보며 한립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게 다 뭔지 궁금하시겠습니다.”
해 도인이 대전 한쪽의 의자로 가서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렇기는 합니다. 거의 사람과 비슷한 지능을 지닌 것 같은데 어떤 괴뢰인지요?”
“이미 짐작하신 바가 있을 텐데, 어디 한 번 들어볼까요?”
“해 수사는 못 속이겠습니다. 저 괴뢰들은 수사가 베어낸 삼시(三尸)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베어낸 삼시를 봉인해 둔 괴뢰들입니다.”
한립이 정답을 맞히자 해 도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라경 이상의 수사들은 삼시를 베어내는 것이 큰 골치라 들었습니다. 죽이면 본체에 문제가 생겨 죽일 수는 없고, 옆에 두자니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어, 천정 사람들은 그것들을 회계에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지요. 삼시를 괴뢰 속에 가두어 옆에 두고 이용하시다니 좋은 방법 같습니다.”
“삼시는 확실히 골치지요. 대부분 대라경 수사들이나 도조들은 삼시를 베어내 봉인하는데 저는 괴뢰 법칙을 익혔기에 그걸 활용해 옆에 두고 조종하는 겁니다.”
해 도인의 대답을 한립은 귀담아 들어두었다.
이런 대라경 이상의 경험담은 아무 데서나 들을 수 없는 귀한 정보였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까 말씀하신 부탁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급하지 않으니, 제 이야기부터 해드리겠습니다. 제 신분은 수사의 추측대로 야양왕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지금 성황인 석공어의 친아우이자 석파공의 숙부니까요.”
담담한 해 도인의 말에 깜짝 놀랐다.
“……마주의 아우께서 어쩌다 적린공경에 계셨던 겁니까? 액회와 사심 성주의 대화를 들으니 마주와는 적대관계인 것 같던데요?”
“구체적인 과정은 이제와 말해 소용없고, 오래전 둘이서 성황 자리를 놓고 다투다 최종적으로 제가 지고 그가 이겨 오랜 세월 힘들게 익히던 공간 법칙까지 빼앗겼습니다. 그래도 제가 참을성은 있었기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후에 석공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적린공경 안에 숨을 수 있었고요.”
해 도인은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평온했는데, 듣고 있던 한립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그가 간략하게 말했지만 당시 황권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상상이 되었고, ‘공간 법칙까지 빼앗겼다’는 대목에서 더욱 놀란 것이다.
물론 야양왕조의 비사에 관해서는 그도 깊게 파고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랬군요. 석공어는 어떻게든 수사를 살려두려 하지 않았겠습니다.”
“물론이지요. 석공어가 생긴 건 우아하고 대범하게 보여도 별 것 아닌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아 줘야 직성이 풀리고, 한 번 움직이면 그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성격이에요. 성역에 고대시대부터 존재하는 적린공경은 안으로 들어온 자의 수행을 억압하고 대라경 이상의 수사는 발을 들이지 못하는 특수공간이라 석공어가 여기까지는 들어오지 못해 간신히 목숨을 보전한 겁니다.”
“대라경 이상의 수사는 들어올 수 없다고요? 누군가 일부러 금제를 펼쳐둔 것입니까? 그 금제가 정말 석공어까지 막을 수 있었다고요?”
한립은 불가사의한 이야기에 미간을 좁혔다.
“적린공경은 아주 오래전 도조였던 분이 만든 공간입니다. 그 선배님이 이곳에 천지대도의 균형을 깨트릴 만큼 엄격한 규칙을 세워놓았기에 적린공경 안이 황폐해진 것이고요.”
“아, 그런 일도 가능했군요.”
“아직 수행이 높지 않으니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허나 한 수사의 재능이면 머지않아 더 높은 곳에 이를 것이니 조급해 마세요.”
“해 수사의 말씀대로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그런 규칙이 있는 적린공경에 수사는 어떻게 들어온 것입니까? 이곳에서 도조경에 이르기까지 하시고요.”
“석공어가 법칙을 뽑아간 탓에 수행이 태을경까지 떨어진 게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이곳에 온 뒤로 운 좋게 그 도조 선배님이 남기신 유물을 찾아 적린공경의 주인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기에 엄한 규칙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생겼기에 괴뢰가 되어 하계까지 이르게 되신 겁니까?”
“공간 법칙을 잃은 저는 또 다른 고계 법칙인 괴뢰 법칙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바로 그 도조 선배님이 수련하던 법칙이었죠. 다행히 적성이 맞기도 했고, 선배님께서 남겨주신 자료가 있어 대라경에 이르러 삼시 중 둘을 베어내고 대라경 최고봉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삼시 중 마지막 것을 베려 할 때 액회 그 배신자가 석공어를 불러들여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던 겁니다. 석공어에게 대패하고 육신이 죽음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의식을 봉인한 게 그 황금 게 괴뢰입니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괴뢰를 하계로 던져버렸고 그 후의 일은 수사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제가 도울 일은 그럼 무엇입니까?”
“도조경에 이르렀지만 석공어와 싸우면 열에 아홉은 질 겁니다. 복수를 하려면 다른 곳에서 도움을 구해야겠지요.”
해 도인은 한립을 응시했다.
“저와 손을 잡고 석공어와 싸우겠다는 말씀입니까?”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이 황당해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이렇게 높게 평가해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만, 저는 겨우 태을경 수사입니다. 어떻게 수사를 도울 수 있을지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해 도인을 본 한립은 실소했다.
“자신의 가능성을 그리 얕보지 마세요. 지금은 석공어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겠으나 수사의 운과 재능이면 저와 같은 자리에 설 날이 머지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그렇게 많은 현규를 뚫었으니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수행이 급격히 늘 테고요.”
한립은 그간 해 도인이 그가 육신의 수행을 높일 수 있게 도운 까닭이 여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해 도인이 벗이라 해도 그와의 약조는 이미 지켰으니 두 도조 간의 싸움에 휘말려 공연히 얻어터지는 일은 피해야 할 터였다.
“안심하세요. 지금 당장 여기에 남아 무엇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후 충분한 실력이 되면 도움을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대가 없이 석공어와의 싸움에 도움을 달라 할 생각도 없고요. 이건 나중을 위해 미리 드리는 이자라 해두겠습니다.”
고민하는 한립을 보고 해 도인이 옥병을 꺼내 건넸다.
옥병을 받아든 한립은 그 안에 하얀 빛덩이가 빙글빙글 돌며 생명력을 지닌 것처럼 조금씩 커지는 것을 보았다.
그 빛덩이 안에 하얀 단약이 들어있었는데 역시 팽창하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해 도인의 심장과 비슷한 기운에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제 본원 정기와 여러 귀한 재료들을 섞어 제련한 현진단(玄眞丹)이란 이름의 단약입니다. 몸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대라경에 이를 때 쓰기 충분한 ‘현진정기(玄眞精氣)’를 품고 있지요.”
해 도인의 설명에 한립은 크게 기뻐했다.
현진정기라면 대라경에 이를 때 관건이 되는 기운이라고 여러 서책에서 누차 언급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라경에 이를 때는 수행이 충분히 쌓여 선규 360개를 뚫고 의식 변이를 해서 평범한 혼백을 대라진혼(大羅眞魂)으로 바꾸어야 했는데, 그 의식 변이에 필요한 것이 현진정기였다.
또한 현진정기는 구천강풍이 부는 무척 위험한 지역에서만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흘러야 소량이 생겨나는 아주 진귀한 것이라 그야말로 신물(神物)이라 할 수 있었다.
1황자 석참풍이 적린공경에 들어왔던 것도 현진정기를 얻어 대라경에 이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잘 받겠습니다. 마침 제게 꼭 필요하던 물건입니다.”
그가 사양하지 않고 옥병을 받아 챙기자 해 도인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귀한 보물을 받고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겠지요. 후에 충분한 실력을 갖추면 돌아와서 해 수사의 편에 서겠습니다.”
한립은 진지하게 약속했다.
“미리 감사 인사를 하겠습니다. 겨우 현진단 한 알로 한 수사의 도움을 받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으니 제게 도움을 구할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안 그래도 해 수사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제혼 말입니다. 해 수사께서 한 번 진맥을 해주실 수 있을 지요?”
천여 년 전에 해 도인에게 전수받은 봉인 비술을 펼쳐둬서 그는 제혼의 몸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럽시다.”
고개를 끄덕인 해 도인이 손가락을 까닥해 금빛을 한립의 몸속으로 흡수시켰다.
금색 빛구슬이 단전에서 회전하기 시작한 한립은 공간압력에서 벗어나 선령력을 운용해 화지 공간을 열 수 있었다.
빛의 문을 통해 함께 누각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2층으로 향했다.
침상에 누운 제혼 위로 검은 문양들이 봉인술식을 이루고 봉인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해 도인은 그 옆으로 가서 미간을 좁혔고, 그걸 본 한립은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 후 제혼의 이마에 닿은 해 도인의 손끝에서 검은 수정빛이 흘러나오자 몸을 부르르 떤 제혼이 마치 깨어날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그걸 보고 한립이 얼굴을 폈는데 제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움직임이 없어졌다.
미미하게 표정이 변한 해 도인이 손가락을 거두고 손을 활짝 펴서 손바닥을 그녀의 이마에 댔다.
이번에도 제혼은 몸을 바르르 떨다 잠잠해졌다.
“어떻습니까?”
“아주 특이한 경우입니다. 모종의 강력한 법칙에 부상을 입었는지 원기가 부단히 흩어지고 있어 일단 안정은 시켜두었지만 치료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도조경인 수사도 불가능하다면 누가 제혼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희망이 사라진 한립은 얼굴이 굳어졌다.
아직 마족의 대제사에게 가보지 않았지만 그가 해 도인보다 수행이 높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미리 포기할 것 없습니다. 도조라고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인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익힌 괴뢰 법칙은 괴뢰 조종술에 집중되어 있어 사람을 고치는 일에는 능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천 가지 만 가지 법칙이 있고 그 현묘한 이치는 누구도 전부 알아낼 수 없다는 데, 제혼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단 말입니까? 혹시 누구를…….”
“석천공이 제사전의 대제사에 대해 말했던 것으로 압니다. 혼백에 관련한 법칙을 익힌 자이고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라면 가능하겠지요.”
“조언 감사합니다.”
한립은 해 도인의 말에 얼굴색이 나아져 포권을 했다.
대황자가 죽어서 대제사의 힘을 빌리는 일이 더 복잡해질지 모르지만 야양왕조와 충돌하는 일이 있더라도 제혼은 살려야 했다.
“해 수사, 공간통로는 언제쯤 되겠습니까?”
“도조경에 이르렀어도 외부로 공간통로를 연결하려면 약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공간통로는 수사만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니 다른 일도 처리해야 하고요. 넉넉잡아 반년 후면 되겠습니다.”
한립은 해 도인의 말에 이견을 표하지 않고 함께 화지 공간을 나섰다.
그러고는 해 도인은 공간통로 일로 준비를 한다며 떠났고, 한립도 폐관 수련을 하던 편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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