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010화 (1,767/2,000)
  • 2010화. 도천대겁(道天大劫)

    *

    바닥에 주저앉은 한립은 오랜만에 진령혈맥이나 수련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는 품을 뒤져 자령이 준 반쪽짜리 옥패를 꺼내 찬찬히 살펴보았다.

    옥패에서 투사된 녹색 보광이 흐릿하게 어떤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별다른 점은 없어 보이는데, 자령은 이걸 왜 준 것일까? 허상이 약간 나를 닮기는 했는데…….”

    움푹 들어간 그의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이어 옥패에 걸린 줄을 잡고 휙 돌리니 공중의 허상들이 잔영을 남기며 녹색 원을 그렸다.

    그러자 원 속에서 입체적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걸 본 한립은 안색이 달라져 중얼거렸다.

    “이게 될지도…….”

    그는 다시 조각상 네 개를 모아놓고 살펴보았다.

    <천살진옥공>의 세 번째 조각상에서는 기혈의 힘으로 육식을 변화시키라고 했지만 그걸 진령혈맥으로 대신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예컨대 반쪽짜리 옥패의 허상도 언뜻 어떤 인물의 측면만 나타내는 것 같지만 회전을 시켰을 때는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진령혈맥 발작이 <천살진옥공>과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런 시도를 했다가 더욱 극심한 발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는 심사숙고 끝에 결국 시도 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바로 세 번째 조각상을 들고 미간에서 수정빛을 방출한 것이다.

    조각상의 동작들은 이미 숙지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조각상 등 뒤의 현문으로 적힌 내용에 집중해 기혈의 힘 부분을 진령혈맥으로 바꿀 방법을 고안했다.

    곧 조각상의 동작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그의 몸에서도 9백 개의 현규가 하나씩 빛을 밝혔고 동시에 몸속에서 진령혈맥을 발동했다.

    이때 뜨거운 느낌이 심장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했고 이는 진령혈맥이 발작을 일으킬 전조였다.

    이에 격동하는 몸과 달리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한립은 이전처럼 성원련혈술로 혈맥을 억누르지 않고 세 번째 조각상에 적혀 있는 경로대로 어깨와 등을 향해 진령혈맥을 이끌었다.

    “윽…….”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진령혈맥 때문에 어깨가 파열되는 것 같고 몸과 의식세계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져 참을성이 많은 그도 신음을 흘려야 했다.

    이상한 일은 그럼에도 정신은 맑다는 것이었다.

    이를 악문 한립은 <천살진옥공>을 수련하는데 집중했다.

    * * *

    그 후, 또 5백 년이 흘러갔다.

    수정궁전의 편전에서 핏빛이 층층이 쌓여 반짝이고, 그 안에서 거목 크기의 삼두육비 사내가 연꽃 모양 제단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6개의 팔로 각종 기괴한 동작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깨에 달린 3개의 머리는 하나같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중앙의 성난 눈을 한 금색 원숭이 머리, 좌측의 위엄이 넘치는 진룡 머리, 우측의 매의 부리에 깃털을 지닌 거대 새 머리가 달려 있었다.

    잠시 후 핏빛 광채 속에서 춤을 추던 괴인의 여섯 팔이 모여 십(十) 자 모양을 이루고, 기운이 빨려 들어가며 전라의 한립으로 변했다.

    이어 탁한 공기를 내뱉은 그는 눈을 뜨고 목을 풀며 웃음을 지었다.

    진령혈맥을 활용해 <천살진옥공>을 수련하고 난후, 현규의 수는 그대로였으나 몸에는 막대한 변화가 생겼다.

    혈맥 발작도 거의 절반은 해결되었고, 그 과정에서 엇비슷하게 마물화 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는 <천살진옥공> 세 번째 조각상의 공법을 펼치며 산악거원, 진룡, 유천곤붕 세 종류의 혈맥을 이용해 삼두육비의 형체를 갖추면서 동시에 세 가지 진령의 막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진령혈맥의 발작 위험도 사라져서 나머지 진령혈맥들도 이런 식으로 해결을 하면 될 듯싶었다.

    그의 짐작대로라면 천살진옥공 공법을 전부 익히면 네 가지 조각상처럼 각기 다른 삼두육비의 형상을 갖출 수 있을 터였다.

    쿠쿠쿠…….

    휴식을 취하고 그가 일어나려는데 수정궁전이 극심하게 흔들리며, 폐관 중이던 공간 안의 벽들의 문양에서 빛을 뿜어냈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번뜩 사라져 문을 나섰다.

    “……!”

    해 도인이 있는 대전 입구에 다다르자 해 도인이 수정관에서 떠올라 하얀 장막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는 전신에 빼곡한 현규들이 별빛을 방출해 만들어낸 장막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액회를 훨씬 넘어섰고, 1800개는 되는 것 같았다!

    “이 기운은……. 해 수사의 실력이 도조 급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공중에 뜬 해 도인의 강대한 기운에 한립은 대전 안으로 발을 들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엇……. 저건?”

    허공에 떠오른 중년인 말고 수정관 안에 해 도인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황금색 몸을 하고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해 도인이 두 명? 아니 저건 사람이 아니야.’

    관 속에 누워있는 것은 금색 괴뢰였고, 한립의 민감한 감각으로 그 안에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공중의 해 도인이 천천히 눈을 뜨자 서늘한 위엄이 서린 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금빛은 빠르게 퍼져 해 도인과 대전 전체, 심지어 대전 밖에 선 한립까지 감싸 안았다.

    그렇게 금빛에 둘러싸인 순간, 공간을 억누르던 엄청난 중압감이 사라지고 체내의 선령력 운용이 원활해지자 한립이 희색을 드러냈다.

    그는 당장 선령력을 운용해 화지 공간의 금제를 풀고 의식을 주입해 제혼의 상태를 점검했고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에 안도했다.

    그리고 금빛에 휩싸인 해 도인은 흐릿하게 변하다 번쩍,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는 천기전 위쪽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금빛이 어찌나 강한지 금색 태양이 떠있는 것 같아서 바깥에서 궁전을 지키던 흑대와 흑이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금빛이 퍼져 주변 공간의 악력을 밀어내고 그들의 마기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어 주었다.

    적린공경에 들어온 지 오래인 그들은 마기가 거의 유실되어 10분의 1밖에 남지 않았기에 그리 강렬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지하 대전 안은 해 도인이 사라지자 금빛도 따라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도 적린공경 어디서나 한립을 억누르던 기이한 압력이 사라져서 단전의 선령력 흐름이 느릿해지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굳지는 않았다.

    정신을 집중한 그는 의식으로 해 도인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간신히 둔술을 사용해 지하 대전을 빠져나와 금빛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때 편안하게 양팔을 늘어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해 도인의 눈에서 기대감과 흥분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여긴 한립도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때 맑던 하늘에 느닷없이 먹구름이 몰려들고 누런 구름이 잿빛으로 변해 중압감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립은 만장 산맥이 떨어지는 충격에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천지대겁의 기운!”

    대겁이 도래하기 전 느껴지는 기운은 이전에 그가 겪었던 어떤 뇌겁보다 강해서 그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면에 서 있던 흑대, 흑이도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너희는 버틸 수 없을 테니 멀리 떨어져 있거라.”

    해 도인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흑대, 흑이가 곧바로 날아올라 먼 곳으로 달아났고, 한립은 해 도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벌써 금색 뇌전을 번득이며 사라져서 수백 리 밖에서 그가 있는 곳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게다가 해 도인의 금빛이 여기까지 이르지 못해 그때부터는 급히 내달려 다시 수백 리를 더 벗어났다.

    이제 천리 가까이 떨어진 셈이었는데 여전히 하늘은 어둑했고 새까만 공간에 섬뜩한 살기만이 가득했다.

    놀란 한립이 더 속도를 높이려는데 하늘에서 돌연 쉬쉬쉭, 하는 소리가 들리고 먹구름이 급속도로 회전하며 거대하기 짝이 없는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와르릉! 콰콰콰쾅!

    그 안에서 줄줄이 새까만 뇌전들이 나타나 질주하는 말들처럼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소용돌이 중심에는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새까만 구멍이 생겨 무시무시한 힘을 방출해 공간을 왜곡시켰다.

    이에 한립은 도무지 피할 수 없어 강력한 압력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았고, 9백 개의 현규를 모두 밝혔는데도 강대한 힘 앞에선 무력감을 느끼며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놓기 직전 거대한 소용돌이 중심에 회색 구름이 나타나 해 도인을 둘러싸는 것을 보았는데 온 세상을 파괴할 것 같은 훼멸의 힘이 감지되었다.

    * * *

    마역 야양성 안의 새까만 대전 안.

    우웅.

    마주가 내뿜는 은은한 은빛이 구를 이루고 주변에 파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흠?”

    돌연 눈을 뜬 그는 은빛을 거두고 어딘가를 응시했다.

    “적린공경 방향! 설마…….”

    눈빛이 서늘해진 마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낙형공부.

    3황자 석파공이 대전 바깥에 서서 멀리 하늘 끝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 * *

    어둑한 허공에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이렇게 빨리? 허허, 또 한바탕 소란스러워지겠구만.”

    검은 인영은 웃음을 터트리다 흐릿하게 사라졌다.

    * * *

    가위에 눌린 한립은 꿈속에서 엄청나게 추운 얼음 호수에 가라앉아 주위에서 몰려드는 작은 물고기 떼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가운 기운이 가시고 온기가 돌며 몸이 편안해졌다.

    정신을 차린 한립은 자신이 땅바닥에 누워있고, 하늘이 보라색으로 변해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을 풍기는 것을 알아차렸다.

    급히 천기전 방향을 보니 전신이 새까맣게 탄 해 도인이 벼락에 맞은 고목처럼 쩍쩍 갈라진 몸으로 아직도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상서로운 보라색 구름이 내려앉아 그를 감싸고 상처들을 치유하니 허공의 모든 보랏빛이 수축하듯 몰려들었다.

    또한 해 도인 스스로도 굵직한 수정빛을 일으켜 수많은 보랏빛 빛줄기들과 하나가 되어갔다.

    쿠쿵.

    상서로운 보랏빛은 유심히 보면 방대한 법칙 파동을 머금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정실들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해 도인은 보랏빛이 가시고 연보라색 장포에 가죽 신발을 신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하늘을 뒤덮고 있던 천기현상도 삽시간에 사라져서 무시무시한 위압감도 바람에 씻겨나갔다.

    한편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한립은 여전히 머리가 띵 하고 온몸이 무거웠다.

    겨우 백여 리 밖에 도망치지 못한 흑대, 흑이는 중상을 입고 아직도 대자로 뻗어 기절해 있었지만 해 도인이 제때 귀띔을 해준 덕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해 도인은 한립이 있는 곳을 쓱 쳐다보더니 갑자기 사라져서 그 옆에 나타났다.

    “해 수사…….”

    “도천대겁(道天大劫)이 이렇게 멀리까지 영향을 미칠 줄 모르고 미리 언질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를 보고 놀라는 한립을 향해 해 도인이 손을 저었다.

    그러자 따듯한 기운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한립은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뿐해졌다.

    멀리 흑대와 흑이도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게 아직 깨어나지는 못해도 부상이 회복되고 있는 듯했다.

    “도천대겁. 이미 도조경에 이르신 겁니까!”

    한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 도인을 훑었다.

    “오랜 세월의 고된 수련과 수많은 기복 그리고 몸까지 잃고 세상을 떠돈 끝에 오늘에서야 간신히 대도를 이루었습니다.”

    해 도인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로 축하드립니다.”

    “제가 오늘날 이런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한 수사의 도움이 컸습니다. 감사합니다.”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의 축하에 해 도인이 짧게 공수를 해보였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도조의 자리에 오르신 분인데 그냥 한립이라고 편하게 불러주시지요.”

    “한 수사, 서로 한두 해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그런 사사로운 것에 구애받지 않는 분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래는 석 씨이나 그냥 해 수사라 불러주세요. 그렇게 불러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석 가라고 하셨습니까?”

    “맞습니다. 제 본명은 석공해로, 일부러 속이려던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기억하지 못했고 적린공경에 들어와서는 여러 가지 일이 겹쳐 말할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석공해……. 혹시 야양왕조와 관련이 있으신지요?”

    “…….”

    한립의 물음에 해 도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말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면 묻지 않은 셈 치겠습니다.”

    “허허, 아닙니다. 말하기 어렵다기보다는 성역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워서 말입니다. 저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수사에게는 당연히 무슨 사정이 있던 것인지 알려드려야지요. 게다가 중요하게 부탁할 일도 있으니 말입니다.”

    “부탁할 일이요? 무슨 일인지 편하게 말씀해 보시지요.”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