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화. 맹진(猛進)
*
한립은 두루마리를 접고 일어나 수정 탑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며칠 동안 탑 안의 모든 경전을 살펴보았는데 지금 상황에 딱 맞는 유용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성원련혈술>의 수단들을 보조적으로 이용해 증상을 완화하는 게 최선 같았다.
이에 한립은 편전에서 중앙 대전으로 빠져나왔다.
해 도인은 여전히 성신진법들 사이에서 핏빛 수정빛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기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른 편전으로 이동했다.
팟.
그러자 바로 기운의 장벽 같은 것이 느껴지고 온몸이 따뜻해지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편전 안에는 각양각색의 주술문자들이 가득했고, 바닥과 지붕에는 성신도안들이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수많은 별빛이 은하수를 이루어 하얀빛이 물처럼 흐르는 모습이 꽤 아름다웠다.
“해 도인이 폐관 수련하던 곳답게 성신지력이 짙구나.”
한립은 감탄하며 중앙으로 걸어가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웅웅.
엉덩이를 대고 앉자마자 하얀 광채가 떠올라 그를 덮쳐왔다.
그는 눈을 감고 달달 외워둔 <성원련혈술> 공법을 되뇌면서 수련에 들어갔다.
* * *
어느덧 시간이 흘러 8년 후.
가부좌를 틀고 방석 위에 앉은 한립은 붉게 변한 피부에서 분홍색 증기를 뿜고 있었다.
편전 안이 뿌연 안개로 인해 온천처럼 변했는데도 그는 차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두 손으로 수결을 맺은 그는 주문을 외며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받쳐 누워있는 부처상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체내의 성신지력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려 갔다가 다시 흘러 올라가며 발작하던 진령혈맥을 점점 안정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피부의 붉은 기도 머리를 시작으로 목 아래로 내려가면서 차차 가시는 중이었다.
“됐어. 그간의 노력이 헛수고는 아니었구나…….”
한참 만에 몸을 일으킨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경전에 적힌 공법을 읽어보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성원련혈술>을 익혀 진령혈맥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게 되었다.
일어나서 기지개를 편 한립은 천장의 별들이 아름답게 반짝이며 하늘에 걸쳐 있는 옥으로 만든 허리띠처럼 은하수를 이루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달이 밝아 별은 그리 많지 않겠어.”
한립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기분이 썩 좋아 보였다.
이렇게 수정궁전은 혈호 아래 지어져 있지만, 외부의 밤하늘과 연결돼 있어 별빛이 쏟아지는 밤에는 이곳의 성진도안들도 밝은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별이 많이 보이는 밤일수록 수정궁전의 성진도안이 눈부신 빛을 머금고 성신지력도 짙어졌는데,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밤인지 성진도안들이 어두운 편이었다.
잠시 그러고 있던 한립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품에서 암녹색 작은 병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한데 천장에서 내려온 빛이 병으로 은은하게 흘러들었으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역시…….”
어차피 그냥 한 번 해본 거라 한립도 실망하지 않고 병을 거두고 편전을 나섰다.
* * *
한 달 후, 어느 날.
가부좌를 틀고 폐관 수련 중인 한립 앞에 몇 가지 물건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재질과 크기가 똑같은 네 가지 조각상들은 삼두육비의 마물을 형상화했는데 각자 표정과 동작에서 차이가 있었다.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은 두청양 것으로 혈진 속에서 수련을 마쳤고, 그 옆의 두 개는 얻은 지 얼마 안 된 액회의 것이었다.
마지막 조각상은 남은 선령력을 이용해 겨우 화지 공간에서 꺼냈다.
액회의 말에 따르면 조각상은 총 4개라고 했다.
일순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미 선령력이 고갈되어 조각상도 겨우 꺼낸 터라 화지 공간 내부를 살피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적린공경에서 금방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려서 죽루 2층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던 제혼이 어떤 상태일지 미지수였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3황자 석파공의 본모습을 꿰뚫어 보지 못한 탓에 당장 마역으로 돌아갈 방법이 사라져서 적린공경을 떠나려면 해 도인의 회복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황자들끼리 황권 다툼을 하는 마역의 혼란한 상황을 생각하면 더이상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팟.
이에 두 번째 조각상을 들어 올린 그는 심호흡을 하고 미간에서 수정빛을 내뿜어 흡수시켰다.
다른 것처럼 두 번째 조각상도 춤을 추는 것처럼 손과 발을 움직여 가며 등 뒤로 빼곡한 현규들을 반짝였다.
그 내용은 <천살진옥공>의 공법이었다.
* * *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를 대륙의 웅장한 성안.
거대한 대전 안에는 한 여인이 백옥 의자에 앉아 준수하게 생긴 사내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괴성 성주 사심이었고, 보고하고 있는 사내는 탁과였다.
“……5대 성과 일부 작은 성들에서 저항이 있기는 하지만 곧 진압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골천심의 공이 적지 않았습니다.”
탁과가 공손하게 말을 마쳤다.
“현지성 쪽은 진원을 따르던 장로와 수하들이 투항하여 괴성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했는데도 도륙을 했다던데?”
대충 묻는 듯한 사심의 어투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게……. 그것도 골천심의 소행입니다만 육화부인이 직접 성주님께 사정을 설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 사이에 원한이 있었던 것이겠지. 괜찮다, 알아서들 하게 두거라.”
“골천심이 일 처리는 확실하게 해두었습니다. 세력을 등에 업고 학살을 한 게 아니라, 현투장에서 일대일로 꼬박 7일 동안 81번의 시합을 해서 모두 죽였기에 현지성 민심이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주인님 문하로 들어오고 싶어 하니, 현지성 성주 자리를 주면 되겠구나. 다른 성들의 성주는 정해진 것이냐?”
“현성은 일단 육화부인이 관리하고 있고, 스스로 항복을 한 주자원 오누이가 돕고 있어 안정적입니다. 다른 성들은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기는 했지만 성주에 적합한 인원들은 대략 결정되었습니다.”
“현성은 괴성과 맞먹는 거대성이다. 음지와 양지에서 모두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야.”
“예, 성주님!”
“그렇게 처리하면 되겠고, 개척하라 이른 유적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총 21곳을 찾아냈고, 아직 87곳은 찾는 중입니다.”
“적린공경 전역에 흩어져 있고 일부는 위험한 지역에 있어 벌써 21곳을 찾은 것도 느리다 할 수 없으니 너무 조급해 말거라. 천년이 지나기 전에 전부 찾아내기만 하면 될 것이야.”
“예!”
“주인님께서 출관하시고 적린공경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일이니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 되었으면 물러가거라.”
당부를 마친 사심이 손을 저었다.
* * *
괴성의 서쪽 구역 안쪽에 있는 고요한 대저택.
건물의 지하 밀실 안에서 백발 사내가 벌거벗은 몸으로 팔각형의 혈지 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전신에 8개의 핏빛 수정 사슬이 묶여 혈지 주변의 핏빛 돌기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온통 핏빛으로 가득한 공간에 있는 사내는 바로 영준한 외모를 지닌 석천공이었다.
촤르릉.
사슬이 떨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 돌기둥들과 혈지가 흔들렸다.
그 안에 있는 석천공은 끓는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이를 뿌득뿌득 갈며 상상 이상의 고통을 견뎌내는 중이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원한 것으로 사심과 거래를 통해 얻은 기회였다.
“려 수사에게 한참 뒤처지는 기분보다야 이게 낫겠지…….”
이를 갈며 중얼거리는 그의 가슴에서 새로운 현규가 뚫리며 빛을 발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8백 년이 지나갔다.
쾅쾅! 쿠쾅쾅!
대허 혈호 아래 수정궁전 안에서는 여전히 성신진법이 운용 중이었고, 그 옆의 편전 안에서 콰르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온몸에 금색 털이 자라고 등에는 뇌전 날개, 두 팔에는 푸른 거북 껍데기가 생긴 괴물이 벽을 치며 난동을 부리고 있던 탓이다.
매번 수정벽의 주술문자들이 요란한 빛을 뿜어 괴물의 묵직한 공격을 막지 않았으면 수정궁전이 폐허가 될 뻔했다.
그렇게 괴물은 세 시진이나 난동을 피우다 멈추었고, 은색 깃털 날개에 이어 푸른 거북 껍데기가 몸속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금색 털들도 보이지 않았다.
변신이 풀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한립이었다.
그는 눈이 움푹 들어가고 평소보다 더 마른 상태였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집고 헐떡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땀을 줄줄 흘리는 그의 몸에서 김이 빠져나와 주변을 자욱하게 만들었다.
겨우 벽에 기대앉은 그는 몸속에서 미친 듯이 폭주하는 진령혈맥을 내리눌렀다.
“진령혈맥은 성신지력이 아니라 성원련혈술로 억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구나. 이게 몇 번째인지. 조만간 몸 안의 정혈이 전부 연소 되어 말라버리는 것은 아닐지!”
인상을 찡그린 한립이 탄식했다.
그동안 편전의 서책들을 적어도 열 번씩은 읽어보았는데, 현수 공법에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고 오히려 괴뢰술에서 한 가지 방법을 알아냈다.
문제는 그 방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강력한 괴뢰를 만들어 진령혈맥을 주입하고,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의 피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여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으로, 이 방법을 쓰면 수행이 크게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또 진령혈맥을 주입한 괴뢰는 짧은 시간 동안은 강력한 전력이 되겠으나 괴뢰가 체내의 정혈을 다 소모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동안 해 도인은 수차례 깨어났고, 기회를 보아 약간의 선령력을 빌려 화지 공간의 제혼을 살폈다.
다행히 자양난옥이 소진되었는데도 제혼의 상태는 악화되지 않았고, 해 도인이 알려준 괴뢰 비술로 잠시 제혼을 봉인해 두고 후일을 기약할 수 있었다.
그 밖에 해 도인에게 진령혈맥 발작에 대해서도 자문을 구했다.
그에게 <천살진옥공>을 익히라고 한 것은 해 도인이었는데, 이 공법을 수련하고 나서 이런 문제가 생겼으니 말이다.
이에 해 도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아마 진령혈맥을 완전히 연화시킨 뒤 대량의 혈맥의 힘이 흘러나와 발작을 일으킨 것 같다’는 답을 주었다.
그러고는 해결방법을 일러주기 전에 출관 후에 이야기하자는 말을 남기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천살진옥공>을 계속 수련해서 신체의 능력을 강화하는 한편, 진령혈맥이 발작하면 이 공법을 발동하지 않고 성신지력만으로 제압하는 식으로 버텼다.
그렇게 천살진옥공 수련에 박차를 가한 그는 2번째 조각상까지 익혀서 현규의 수가 9백 개가 넘어 예전의 액회의 수준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와 같이 한립은 절묘한 <천살진옥공> 공법, 대량의 기혈의 힘을 담아둔 장천병 그리고 수련에 최적화된 수정궁전과 만나 이렇게 빠른 속도로 수행에 맹진할 수 있었다.
이런 독보적인 환경에서조차 세 번째 조각상의 수련은 쭉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수련 방법에 변화가 생겨서 완전히 이전과는 다른 공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신지력으로 현규를 뚫을 때 기혈의 힘으로 지지하면서 몸을 마화할 때처럼 삼두육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야 했다.
이 방법은 대량의 기혈의 힘이 필요했고, 기혈의 힘이 충만한 편인 한립도 그런 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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