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008화 (1,765/2,000)
  • 2008화.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

    별별 일을 다 겪은 한립의 이야기를 듣고 자령의 표정이 수시로 달라졌다.

    그러다 자신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적린공경에 들어왔다는 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요동쳤다.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운도 따라주고 실력도 있는 사람이었네요. 그래도 태을경에 이르기 위해 수많은 위기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겪었겠죠.”

    “어차피 지난 일인데 힘들었으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떠하냐. 그런 일들을 겪지 않았으면 이렇게 빨리 수행이 늘지 못했을 테니 전화위복이라 할 수도 있겠지.”

    자령이 길게 탄식하자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웃음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에요. 앞으로는 어쩔 생각인가요?”

    “해 수사가 회복할 때까지 호법을 서주기로 약속했으니 그 후에 적린공경을 나가 진선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혹시 해 수사란 분이 적린공경을 떠날 방법을 아는 건가요?”

    한립의 말에 자령이 깜짝 놀라 물었다.

    “하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령 수사! 몸을 회복하는 대로 적린공경의 근원의 힘을 이용해 려 수사 부부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해드리지요.”

    그때 해 도인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자령이 그 말을 듣고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자령, 아직 수행이 높지 않으니 나와 같이 진선계로 가자꾸나. 마원석만 충분하면 진선계에서도 똑같이 수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결심을 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 자령은 생각에 잠겨 답이 없었다.

    “한 형,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던 질문을 지금 할게요.”

    “해 보거라.”

    심각한 자령의 표정에 한립도 긴장했다.

    “당신의 마음속에 나와 남궁완 언니, 누가 더 중요한가요?”

    그를 직시하는 자령의 눈동자에 한립의 얼굴이 어렸다.

    “그런 질문을 왜 하는 것이냐? 너와 완이 모두 내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들이다.”

    한립은 멍하니 있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자령은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사내들은 전부 욕심이 끝이 없군요. 수행이 높아도 그 점은 마찬가지네요.”

    그 말을 끝으로 자령이 말이 없어지자 한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나도 평생 누군가에게 기대 살아가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나도 한 형처럼 나만의 길을 찾아내야죠. 게다가 당신의 수행이 높은 만큼 적도 강하잖아요. 내가 따라 다녀봐야 짐만 될 거예요. 마역에 남아서 수련하겠어요.”

    오래 고민하던 자령은 결정을 내렸다.

    “여전하구나.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럴 거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한 형보다 재능은 부족해도 괴뢰술이 제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일단 사심 성주님의 밑에서 괴뢰술을 배우고, 해 수사가 완전히 부활하면 저도 여기를 떠나 마역에서 수련하겠어요.”

    “마음을 정한 것이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이건 받아두거라.”

    한립은 첫 번째 조각상의 <천살진옥공> 공법과 자령에게 적합한 마족 공법 몇 가지가 담긴 옥간을 꺼내 건넸다.

    자령도 거절하지 않고 받아 옥간의 내용을 살피다 표정이 달라졌다.

    흑하수궁과 괴성을 거치면서 그녀도 어느 정도 안목이 생겨서 옥간의 공법이 세상에 나오면 수사들이 앞다투어 달려들 보물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괴성의 ‘괴뢰심’이 거의 대성한 것으로 알지만 의식의 힘을 늘리는 데는 ‘연신술’만한 공법이 없다. 익힐 수 있다면 괴뢰를 조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테지만 그 폐해도 적지 않으니 잘 읽어보고 선택하면 된다. 현규를 뚫어두는 것이 적린공경에서나 마역에서나 수련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니 <천살진옥공> 수련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그럴게요.”

    “나머지 두 공법은 마족 대라경 존재에게서 얻은 것이라 아직은 익힐 수 없겠지만 네 체질과 부합하니 남겨두고 보거라. 성신지력이 농염한 이곳에서 <천살진옥공>을 수련하면 더 좋겠지. 내가 옆에서 지도해줄 것이니 호법을 서는 동안 여기 남거라.”

    “아뇨, 사심 성주님께 돌아가 괴뢰술에 대해 배워야 해요. 그간의 노력과 시간을 낭비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이 준 공법들은 알아서 잘 익힐게요. 잘 지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자령은 한립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걸 가져가거라. 내가 괴성 사람과 싸워 빼앗은 것이니 사심이 안다고 해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한립은 긴말하지 않고 금색 구슬을 꺼내서 주었다.

    “금익효! ……너무 많은 것을 받아 약소하지만 답례를 하고 싶어요.”

    구슬까지 받은 자령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반쪽짜리 녹색 옥패는 물처럼 맑았고, 누군가 쪼갠 것처럼 한쪽 면이 울퉁불퉁했다.

    옥패 중앙에 흐리하게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자령, 이건…….”

    옥패를 받은 한립이 고개를 들어 자령을 보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해요.”

    담담히 마지막 말을 한 자령은 홀로 바깥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선 한립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다 옥패를 보고 멈춰 섰다.

    지하 공간을 빠져나온 자령은 사심, 육화부인, 골천심 외에 탁과, 흑대, 흑이도 볼 수 있었다.

    “성주님.”

    자령이 사심 옆으로 가서 예를 올렸다.

    “어떻게 나온 것이야? 주인님은 괜찮으신 것이냐?”

    사심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아직 회복 중이세요. 려 수사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길입니다.”

    “괴성의 안전을 위해 의식을 봉인해 두었다지만 너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이해해 주렴.”

    사심은 자령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런 말 마세요. 저도 이해합니다.”

    “그래,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성주님을 계속 따르고 싶습니다.”

    자령의 의지는 굳건해 보였다.

    * * *

    지하동굴 안, 자령이 떠나고 혈호에 소용돌이가 치더니 수정관과 그 옆에 서 있던 한립까지 호수 아래로 빨아들였다.

    호수 아래에서 진법의 빛이 반짝인 뒤 한립과 해 도인은 꽤 넓은 면적의 수정 대전 안에서 나타났다.

    쿠쿵.

    사방을 둘러싼 붉은 수정 벽에는 수정관에 새겨져 있던 것과 비슷한 주술문양들이 가득했고, 해 도인이 누운 수정판은 허리까지 오는 제단에 꼭 맞아 들어가 결합했다.

    수정 대전 바닥의 원 3개가 결합한 무늬와 여러 가지 주술문자들도 거대한 성신진법을 이루고 있었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원형 무늬 중 하나에 액회 시체가 빨려들어 온 것을 보았다.

    “한 수사, 유골을 찾았다지만 제대로 부활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시간이 필요하니 그동안 호법을 서주세요.”

    수정판 위의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왜 사심이 아니라 접니까? 오랜 세월 충성스럽게 당신의 부활을 기원한 사람인데요.”

    “액회도 당시 충실한 심복이었고,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키기로 약속했었습니다. 허나 결국에는 마주와 결탁해 적린공경을 하루아침에 무너트렸지요. 이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수사 당신뿐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마주와는 대체 무슨 사이인 겁니까?”

    “그 일은……제가 완전히 회복하면 이야기해드리지요. 여기 낙성정궁(落星晶宮) 좌우에 각각 편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전에 현수 공법과 괴뢰술을 연구하던 곳이라 경전과 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고, 다른 곳은 수련을 하던 곳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살펴보세요.”

    해 도인이 이렇게 말하자 한립도 강요하지 않았다.

    낙수정궁 위쪽에도 원형의 진법이 형성되어 밝은 별빛으로 내부를 밝혔고, 지면의 진법이 호응해 성신지력이 짙어졌다.

    성신지력이 밀려들어 수정판이 놓인 제단을 중심으로 핏빛 결계가 생겨 해 도인의 몸이 가려졌다.

    그 안에서 촤르륵!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한립은 핏물 속에서 강대한 힘이 중년인의 육신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액회 시체가 폭발해 그 피와 살이 끈적하게 진법으로 흘러 들어갔다.

    순간 심장이 심하게 쿵쿵! 거린 한립은 성신지력을 운용해 변화를 억누르고 오른쪽 편전으로 걸어갔다.

    그는 수정문을 지나 편전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는 체내의 피가 끓어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신의 모공에서 분홍색 김을 뿜어냈다.

    산악거원, 뇌붕, 진룡을 포함한 진령혈맥의 힘이 체내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성신지력으로 다스리려 했지만 진령혈맥들은 보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더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제 몸 곳곳의 관절에서 퍽퍽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흠칫 놀란 한립은 액회와 싸울 때도 천살진옥공을 운용하자 진령혈맥의 힘이 더욱 왕성해졌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혀 공법 운용을 멈추고 의식으로 성신지력을 온몸에 퍼트려 보호했다.

    두 시진이 지나서야 눈을 뜬 한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갑자기 진령혈맥이 발작할 줄이야. 앞으로 성가셔 지겠구나.”

    고비를 넘긴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종 경전이 빼곡하게 꽂힌 백옥 책장 8개가 중앙을 중심으로 바큇살 모양으로 세워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 팔각형에 9층으로 이루어진 비슷한 크기의 수정 탑이 보였다.

    백옥으로 된 책장들을 지나 탑으로 다가간 한립은 8층으로 이루어진 수정 탑에 수많은 옥간과 종이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1층이 가장 넓어서 자연히 서책의 수량이 많았고, 옥간과 두루마리 형식의 물건들이 백여 개는 되었다.

    위로 갈수록 놓은 서책의 수가 줄어들다 마지막 층에는 딱 8권의 옥간 밖에 없었다.

    해 도인이 둘러보라고 했기에 한립은 기탄없이 그중 하나를 들어 미간에 가져다 대었다.

    잠시 후, 옥간을 뗀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것은 <백련성괴(百煉成傀)>라는 괴뢰제련 공법으로 괴뢰 재료를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의 세 가지 방면으로 나누어 재료가 어디에서 나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괴뢰에 영향을 미쳐 각기 다른 속성의 괴뢰를 만들 때 유의해야 할 점들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립은 지금 괴뢰술보다는 진령혈맥의 발작에 효과가 있을 만한 현수 공법에 관심이 많았기에 <백련성괴>를 내려놓고 다른 옥간을 들어 올렸다.

    * * *

    7일이 흘렀지만 한립은 여전히 편전 벽에 기대앉아 <성원련혈술(星元煉血術)>이라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읽고 있었다.

    이 공법은 육신을 단련하는 평범한 현수 수련법이나 아니면 근맥과 골격을 변화시키는 방법과 달리 성신지력을 이용해 혈액을 정련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성원련혈술>을 수련하면 혈액 속에 대량의 성신지력을 녹일 수 있어 적과 싸울 때,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이용해 의외의 일격을 날릴 수도 있었다.

    그 밖에 혈액에 함유된 성신지력의 양이 많아질수록 정혈을 태워 잠재력을 끌어내는 비술을 사용할 때의 효과가 증폭되었다.

    다만 성신지력을 혈액에 주입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해서 수련이 어렵고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혈액은 몸 전체, 특히 심장이나 단전을 순환하기에 그 안의 성신지력을 통제하지 못하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루마리의 내용을 보면서 한립은 감탄을 했지만 <성원련혈술>을 수련할 생각은 없었다. 왜냐 하면 특수한 혈맥을 지닌 사람들이 수련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혈맥의 힘이 복잡한데 거기다 성신지력까지 융합하면 펄펄 끓는 기름에 물을 붓는 셈이었다.

    그러나 공법의 내용 중 각종 혈액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이나 성신지력 폭동을 진압하는 방법 등은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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