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화. 부활
*
화아앗!
혈호 깊은 곳에서 핏물이 바글바글 끓더니 찬란한 금빛이 떠올랐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액회의 주먹이 더없이 느려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이 걸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대한 금색 고리가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나 방대한 시간 법칙의 힘으로 그를 속박하고 있었다.
등 뒤의 진언보륜경을 감지한 액회는 어떻게든 몸을 돌려 일격에 금빛 고리를 박살내려고 했지만 한립이 그럴 기회를 줄 리가 없었다.
콰릉!
한립의 몸속에서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청죽봉운검이 드디어 빠져나와 막 태어난 새처럼 지저귀며 액회를 찔렀다.
둘 사이의 거리가 워낙 가까웠던 터라 청죽봉운검 검 끝이 쑥 그의 배를 찌르고 들어갔다.
‘윽!’
액회는 강력한 육신의 힘으로 단전까지 뚫리는 것을 막고 있었는데, 핏물 속에서 빠져나온 한립이 마지막 남은 선령력과 육신의 힘으로 청죽봉운검 칼자루를 묵직하게 밀어 넣었다.
파치치치칙!
단전을 관통한 청죽봉운검이 대량의 뇌전을 뿜어냈다.
참혹한 비명을 지른 액회는 구멍이 뚫린 단전에서 검은 연기를 풀풀 날리며 쓰러졌다.
비틀비틀 간신히 몸을 가눈 한립은 액회의 단전에서 청죽봉운검을 뽑아 그의 머리를 수직으로 갈라버렸다.
몸의 기운이 텅 빈 느낌이 든 순간, 진언보륜과 청죽봉운검이 금빛을 반짝이고 스스로 체내로 돌아갔다.
피에 흠뻑 젖은 한립은 멀리 자령을 돌아보고 미소를 짓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액 성주……. 액회가 이렇게, 죽었다고?”
골천심이 믿기지 않는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육화부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긴장이 풀린 석천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앉아 기대듯 누웠다.
한립은 벌써 두 다리를 억지로 끌어와 가부좌를 틀고 운공하는 중이었다.
체내의 금색 단약이 사라지면 체내의 선령력 흐름이 완전히 정지할 테니 그 전에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충분히 단약을 삼킨 그는 품에서 검은 조각상을 꺼내 들었다.
조골진인의 것이었던 조각상이었다.
“려 수사, 괜찮은 겁니까? 액회까지 죽일 실력이 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시간이 지나 석천공도 기운을 내서 걸어왔다.
“괜찮습니다.”
한립은 손을 저어 보이고 자령에게 다가가 자세히 상태를 살피다 액회의 시체로 갔다.
이상하게도 액회는 품에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이럴 리가?’
적린공경 내에는 저물법기가 없어서 대부분 품이며 주머니에 단약, 무기, 잡동사니 등을 잔뜩 놓고 다녀야 했다.
시체를 훑던 그의 시선이 왼손의 백골 반지에서 멈추었다.
“안목이 좋군. 내가 성공수(星空獸)의 뼈를 토대로 성신금제와 공간 금제를 응용해 만들어준 저물반지일세. 성신지력을 쓰면 사용할 수 있지.”
육화부인이 옆에서 일러주었다.
그를 힐끔 본 한립은 성신지력을 주입해 의식으로 내부를 살폈다. 반지의 하얀빛이 그의 의식의 힘을 막으려다 성신지력에 자리를 내주었다.
내부공간은 작았지만 선령력을 사용할 수 없는 적린공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귀한 보물이었다.
그 안에는 단약, 무기, 요핵 그리고 여러 가지 서책 등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구석에서 익숙한 조각상 두 개를 발견한 한립은 기분이 좋았지만 남의 이목을 끌까 봐 꺼내 보지는 않았다.
조용히 반지를 끼고 자신이 지닌 조각상과 단약들도 안에 넣어둔 한립은 액회의 시체를 거의 말라가는 혈호 속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 액회를 처리한 한립은 수정관 쪽을 보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제야 사심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그녀가 깨어나자 곁의 자령도 미간을 좁히면서 눈을 떴다.
“액회!”
사심은 핏물에 둥실 뜬 액회의 시체를 보고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사심 성주님, 안심하셔도 됩니다. 액회는 려 수사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육화부인이 웃으며 설명했다.
사심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한립에게 무어라 말하려는데 엄숙한 목소리가 수정관 쪽에서 들려왔다.
“액회가 죽었으니 다들 그만 물러가 봐도 좋다. 려 수사는 남으시지요.”
해 도인의 목소리였다.
혈호의 핏물을 거의 빨아들인 시체는 이제 나신의 중년 사내로 변해있었다. 백발에 각진 얼굴을 가진 중년인은 위엄 있는 인상을 주었다.
“저 얼굴은…….”
한립은 수정관 안의 사내가 해 도인과 닮은 것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주, 주인님! 깨어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사심이 뛸 듯이 기뻐하며 수정관을 향해 엎드려 절을 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 려 수사가 남아 나를 보호해 줄 것이야.”
“예? 려 수사는 저희를 도와 액회 그놈을 죽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남입니다. 제가 직접 주인님을 지키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려 수와 나는 한두 해 함께 한 사이가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 그리고 네게는 따로 중요하게 맡길 일이 있다…….”
해 도인은 나머지 말은 전음으로 전했다.
“존명! 려 수사, 이곳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심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령을 데리고 지하 공간을 빠져나가려 했다.
“잠시만요. 사심 성주님, 자령은 제 벗입니다. 혼백의 금제를 풀어 자유를 찾게 해주시지요.”
상황을 지켜보던 한립이 사심을 불러 세웠고, 자령이 그 말을 듣고 움찔했다.
“그걸 잊고 있었습니다. 자령이 처음 괴성에 왔을 때 현성의 첩자가 아닐까 우려해 기억을 봉인해 두었습니다. 바로 봉인을 풀지요.”
사심은 한립에게 미안한 기색을 보이더니 수결을 맺은 손을 뻗어 자령의 미간에 두 손가락을 대고 주문을 외웠다.
파앗.
미간의 금색 문양이 흐릿하게 변하자 자령은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왜 이러는 겁니까?”
한립이 번득 옆에 나타나 부축해 세우며 물었다.
“놀라지 마세요. 잠시 기절한 것이니 곧 깨어날 겁니다.”
미소를 지은 사심은 수정관을 향해 예를 올리고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육화부인과 골천심도 그녀를 따라갔고, 석천공도 해 도인 쪽을 보다 한립이 딱히 말이 없자 바깥으로 향했다.
혈호가 있는 공간을 빠져나온 사심은 바로 떠나지 않고 통로 입구에 앉아 하얀 별빛을 드리우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육화부인이 그 옆에 서서 망설이다 이를 악물고 골천심을 대동해 예를 취했다.
“육화가 사심 성주님을 뵙습니다. 여기는 제 딸 아니 천심입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요?”
사심이 그 소리를 듣고 천천히 눈을 떴다.
“덕이 높으신 사심 성주님께서 수정관 안의 높은 분의 도움을 받아 적린공경을 통일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압니다. 제가 눈이 어두워 액회와 같은 악적을 성주로 모셨으나 잘못을 깨닫고 투항하고자 하니 부디 거둬주시기를 청합니다.”
육화부인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도 부족하지만 괴성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부디 저희를 거둬주십시오.”
골천심도 허리를 숙였다.
“하하, 골천심 수사는 몰라도 육화 수사는 액회를 위해 수많은 성보를 만들어 괴성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괴성으로 받아들이더라도 괴성 사람들의 분노를 피하기 어려울 텐데요?”
사심은 웃고는 있었지만 시선이 서늘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괴성 분들의 노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현성 주위의 병력 배치와 방어 금제의 약점을 사심 성주님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현성의 방어막은 대부분이 액회와 제가 함께 구상한 것이니까요.”
“성의를 보이시니, 안 된다고만 할 수는 없겠군요……. 좋다, 오늘부로 너희도 우리 괴성의 사람이다.”
“감사합니다, 성주님!”
사심의 허락이 떨어지자 육화부인과 골천심이 다시 예를 올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석천공이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사심에게 다가섰다.
“사심 성주님, 상의할 것이 있는데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해보세요.”
“저 그게……. 따로 드릴 말씀이라.”
석천공의 말에 사심의 눈에서 칼날 같은 빛이 번득였다.
미소를 머금은 석천공은 그저 그런 그녀의 시선을 받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매서운 눈길을 거둔 사심은 결국 일어나서 그와 같이 자리를 옮겼다.
* * *
지하 공간 안.
한립은 자령을 안아 평평한 바닥에 눕히고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에게 치유용 단약을 먹이고 반 시진이 지났을 때 자령이 눈을 떴다.
“깨어났느냐?”
그녀를 바라보는 한립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신을 차린 그녀도 아름다운 눈으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당신인가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싼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친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며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재회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립은 자령을 보면서 그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난성해에서 우연히 만나 허천전, 음명의 땅에서 고난을 함께했고, 추마곡과 대진을 거치며 오랜 시간동안 깊은 정을 나눈 여인이었다.
수많은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그의 머리와 가슴에 남아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세월이 흘렀으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상계로 올라오면 오래지 않아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요…….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더더욱 몰랐고요.”
한참 동안 추억에 잠겨 있던 자령이 평정을 회복하고 입을 열었다.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예기치 못한 사정 때문에 마역에 오지 않았으면 언제 너를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구나.”
한립도 회상에서 벗어나 웃음 지었다.
“아! 적린공경에 들어와 사심 성주에 의해 괴성에 들어간 건 기억이 나요. 그런데 여긴 어디죠?”
“적린공경 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비경인 ‘대허’다. 아마 사심이 특수한 수단으로 혼백을 봉인해 그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어리둥절한 자령에게 한립은 그간 있었던 일과 괴성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사심 성주도 악의는 없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무사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무조건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최소한의 경계는 해야 한다. 사심에 대해 우리 둘 다 잘 알지 못하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야.”
“알겠어요.”
“그보다 비승하기 전 하계의 상황은 어떠했느냐? 네가 이렇게 빨리 상계에 이른 것도…….”
“완이 언니에 관해 묻고 싶은 거면서, 뭘 그렇게 빙빙 돌려 물어요? 그냥 물어보세요.”
눈을 흘기는 자령을 보고 한립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남궁완에 관해 물으려던 것이 맞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겁을 하기 전, 청원궁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고 완이 언니도 수행이 순조롭게 늘어 대승경에 이르러 있었어요. 그 밖에 여러 방면에서 준비를 해왔으니 비승에 성공하는 건 시간문제였죠. ……전 이런저런 기연이 겹쳐서 언니 보다 먼저 뇌겁을 이겨낸 것뿐이고요.”
자령의 말에 한립은 내심 안도했다.
“그런데 당신은 선역으로 비승했던 것 아닌가요? 어쩌다 마역에…….”
“비승해 진선계의 북한선역에 도착은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마역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역에서 지낸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선역과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아요. 어쩌다 야양왕조 황자와 동행하게 된 건지 궁금해요.”
“말하자면 긴데, 북한선역에 이른 나는 강적의 공격에 중상을 입고 기억을 잃은 채 영환계에 떨어졌다. 어렵사리 수행을 회복해 진선계로 돌아왔지. 그렇게 흑화수궁으로 가서 너를 찾았는데, 적린공경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서 적린공경에 들어온 것이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서 너를 찾아냈으니 천만다행이다.”
한립은 그간 자신이 겪었던 일을 차분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장천병 같이 아무 데서나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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