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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06화 (1,763/2,000)
  • 2006화. 네 차례

    *

    미간을 좁힌 한립은 전신의 4백 개가 넘는 현규를 모두 밝힌 채 수정관 옆에 서서 주먹을 불끈 쥐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사상절살진 안에서 이번에는 밀집한 주먹 허상들이 가득 터져 나오고 핏빛 파랑을 이루었다.

    이번에는 구멍이 뚫린 천장이 철저하게 무너져 밤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립이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니 사상전괴들은 완전히 망가졌고 마구 떨어지는 바윗덩이 속에서 두 금갑 괴뢰가 자취를 감추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떨어진 바위 더미 속에 누군가가 깔려 있었는데, 검은 천이 벗겨져 경국지색의 미모가 드러났다.

    그 옥 같은 얼굴이 자령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눈을 번득인 한립이 그녀에게 다가가 바위를 치우고 안아 올렸다.

    정신을 잃은 자령은 복부에 돌멩이 같은 것이 박혀 비죽 튀어나와 있었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그걸 보는 한립은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과 분노를 느꼈다.

    그가 오랜 세월 알아 온 지기인 자령과 진작 서로를 알아봤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립은 그녀를 육화부인 곁으로 데려가 내려놓고 단약을 먹여주었다.

    “수고스럽겠지만 잠시만 돌봐주세요.”

    육화부인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옆의 골천심은 자령을 복잡한 심경으로 쳐다보았다.

    석천공도 육화부인이 금제를 완벽히 제거해 주기는 했지만 부상이 가볍지 않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한립은 한마디를 더 하고는 혈호를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전방의 깊은 구덩이 안에서 전신이 자홍색으로 변한 액회가 곤옥의 목을 비틀어 잡고 혈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단전에 구멍이 뚫리고 몸이 꺾인 곤옥은 죽은 지 오래였다.

    “네 녀석은 읍혈대진을 시작으로 번번이 내 일을 망쳤지. 사실 난 너처럼 규칙 자체를 바꿔 버리는 무법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저 유골을 부활시키지만 않았어도 너를 거둬 제자로 삼을 마음도 있었지.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니 안타깝구나.”

    액회는 곤옥의 시체를 툭 던져 버리고는 입을 열었다.

    “액 성주님의 마음에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냉소를 흘린 한립은 두려운 기색 없이 답했다.

    우화비승공을 극성으로 발동한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졌다.

    연혈술로 체내의 정혈을 태워 몇 배나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액회도 주먹을 뻗었다.

    쾅!

    액회의 주먹 끝에는 한립이 아니라 금색 방패를 든 금갑 괴뢰가 있었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기회를 노리던 괴뢰가 물결 모양으로 찌그러진 방패와 함께 날아갔다.

    동시에 난쟁이 괴뢰가 뒤에서 등장해 검으로 액회의 목을 그어 내려갔다.

    채채챙!

    액회를 보호한 핏빛 안개와 금색 검의 성신지력이 충돌하며 불똥이 튀었다.

    “이따위 공격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액회는 조소하며 방패를 쳐낸 주먹을 거둬서 뒤쪽으로 돌아섰다.

    주먹들이 연달아 허공을 가르고 괴뢰가 날아갔을 때, 한립이 허공답보를 해 나타났다.

    폭풍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움직이는 그는 천살진옥공을 발동해 4백 개의 현규를 밝히고 액회의 태양혈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주먹 끝에 성신지력이 뭉쳐 모골이 송연해 질만큼 강한 힘을 방출했다.

    줄곧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액회는 이런 식으로 공격당할지 몰랐는지 다른 방어막 없이 서둘러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공법을 발동했다.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새하얀 주먹 허상이 어깨로 떨어졌다.

    쿠앙!

    액회 발아래 지면에서 돌이 튀며 바닥이 가루가 되었고, 액회도 옆으로 쓰러졌다.

    쿠쿠쿠쿠쿵.

    한립은 틈을 주지 않고 쓰러진 그를 향해 주먹 허상을 폭우처럼 쏟아부었다.

    한립과 액회의 신영이 점점 더 깊은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쾅!

    한참 후, 굉음이 들리고 한립이 먼저 튀어나오고 전신이 자홍빛인 액회가 따라 나왔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액회는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수모를 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어쩐지 실력이 있다 했더니 천살진옥공을 익히고 있었구나! 그래서 몇 번째 조각상을 찾아낸 것이냐?”

    액회가 서늘한 얼굴로 물었다.

    그와 겨루며 한립도 상대가 천살진옥공을 익혔고 그보다 수행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액 성주님이야말로 몇 번째 조각상을 가지고 계십니까?”

    슥! 입가의 피를 닦아낸 한립이 반문했다.

    “마군이 일부러 네 조각상을 흩어놓았었지. 내게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있으니 너한테는 첫 번째 아니면 네 번째 조각상이 있겠구나.”

    “그런가요? 서로 교환해서 공법을 익히면 참 좋겠습니다.”

    액회가 탐욕을 드러내자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하하. 이 와중에도 농을 하는 것인가?”

    팍!

    액회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면을 뚫고 금빛 인영이 튀어나와 액회의 겨드랑이에 두 팔을 끼고 꽉 감싸 안았다.

    그와 동시에 검을 든 괴뢰도 바닥에서 솟아올라 액회의 심장을 노렸다.

    “이 배신자, 그만 죽어라!”

    멀리서 사심의 한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고, 두 금갑 괴뢰들이 주술문자들을 반짝거리다 폭발했다.

    콰콰콰쾅…….

    밤이 내려앉은 어둑한 하늘에 새로운 태양이 뜬 것처럼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났고, 이미 예상했던 한립은 폭발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시간이 꽤 흘러 폭음이 가시자 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에서 거대한 검은 구멍이 생겨난 것이 보였다.

    구덩이 깊은 곳에는 액회가 누워 다 찢어진 의복 사이로 새까맣게 탄 피부를 드러냈다.

    미간의 붉은 표식도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키킥.”

    그런데 액회가 섬뜩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푸른 연기로 사라졌다.

    다음 순간 폭음과 함께 사심이 붕, 고공으로 떠올랐다.

    따라붙은 액회에 의해 수백 번 주먹질을 당한 사심은 거의 넝마가 되어 추락했다.

    “속도도 빨라지고 힘도 더 강해졌어…….”

    한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제 네 차례다!”

    바닥에 내려선 액회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마저 변해 듣는 이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

    다음 순간, 한립은 발끝으로 땅을 박차 뒤로 피했고, 눈에 핏발이 선 액회는 그 앞에 나타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천살진옥공을 전력으로 운용한 한립은 방심할 수 없어 체내의 혈맥의 힘까지 격발했다.

    현규를 밝힌 두 팔의 근육들이 불끈 솟아올라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그때 한립은 두 팔에 진령혈맥의 힘, 천살진옥공과는 다른 특수한 힘이 흘러드는 것을 감지했다.

    쿵!

    그가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무시무시한 괴력이 두 팔에 전해졌다.

    온몸의 뼈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충격에 한립은 전신에서 일시에 뼈가 부러지는 통증을 느끼고 죽, 밀려나 백장에 이르는 고랑을 남기며 벽에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무너져 내린 바위들에 그의 모습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바위에 깔린 한립은 두 팔이 저릿하기는 했지만 부러지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그 시각, 연혈술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액회는 속전속결을 하기 위해 곧바로 달려와 바위 더미 위로 미친 듯이 주먹질을 했다.

    안 그래도 무너진 암벽은 가루가 되었는데, 그 안에서 쾅, 하고 금색 털이 가득한 산악거원이 튀어나와 거대한 주먹으로 액회를 내리쳤다.

    쾅!

    놀란 액회가 기습에 밀려나고 한립의 거구도 바닥으로 쓰러졌다.

    산악거원은 은빛 뇌전을 방출하며 뇌붕으로 변해 두 날개를 펴고 지면을 따라 쏘아져 나갔다.

    “어딜 도망가려고!”

    동공을 수축한 액회가 소리쳤다.

    파칙!

    액회도 검은 뇌전처럼 변해 붕새로 변한 한립의 앞을 막아서고 손을 뻗어 목을 틀어쥐려 했다.

    상대의 손이 다가오는 순간, 공중에서 우뚝 멈춘 한립은 훽 방향을 틀어 속도를 배로 높이고 혈호 쪽으로 날아갔다.

    은색 뇌전빛이 사라지고 혈호 수면에 이른 붕새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주 광대처럼 재롱을 부리는구나!”

    액회가 비웃으며 그를 죽이려 드는데, 한립이 웬일인지 달아나지 않고 덤벼들었다.

    천살진옥공을 운용하면서 진령혈맥 중 산악거원과 현무 혈맥을 동시에 격발해 두툼하게 불어난 두 팔에는 강철 가시 같은 금색 털이 돋고 등에는 푸른 거북 등딱지가 생겨났다.

    쿠앙!

    액회와 충돌한 한립은 팔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고, 액회도 한 걸음 물러났다.

    천살진옥공과 진령혈맥을 동시에 운용하는 수법은 임기응변으로 쓴 것치고는 효과가 좋았다.

    얼굴이 굳은 액회는 성큼 다가와 한립의 면전에서 검은 수정빛을 일으켜 주먹을 뻗었다.

    주변 허공을 떨리게 한 강력한 주먹은 그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스스슷!

    한립은 현무 혈맥의 힘을 이용해 팔로 공격을 막으려다 나가떨어져 호수 표면을 스쳐 자령 옆까지 굴러갔다.

    액회가 그를 쫓지 않고 다급히 혈호 중앙으로 향했다.

    그는 수정관에 누워있는 시체를 보며 분노와 원망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까지 만감이 교차한 얼굴이었다.

    우웅!

    그가 손가락을 칼날처럼 세워 심장에 수직으로 찔러 넣으려는데, 수정관의 복잡한 문양을 타고 핏빛이 일어나 손끝을 밀어냈다.

    동시에 혈호 연안에서 쾅, 하고 한립이 폭발적으로 튀어 올라 달려오고 있었다.

    천살진옥공을 극성으로 발동한 그는 4백 개의 현규를 밝게 빛내고, 등 뒤로 거원, 뇌붕, 진룡, 천봉, 현무 등 가지각색의 진령 허상들을 불러내 하나씩 체내로 흡수했다.

    육화부인이 그걸 보고 감탄했고, 골천심이나 다른 이들도 놀란 눈치였다.

    한립의 변화를 본 액회도 손을 거두고 먼저 성해가 있는 수정관에서 멀찍이 물러난 다음 달려들었다.

    체내에 숨겨둔 마족 혈맥의 힘을 격발한 액회는 머리 위로 하얗고 뾰족한 뿔이 돋고 등 뼈를 따라 가시들이 불룩불룩 올라왔다.

    겉모습이 변하자 기운도 흉악해져서 주변의 핏빛 안개도 짙어졌다.

    쿠앙!

    두 사람의 충돌에 하얀 별빛과 핏빛 태양이 부딪친 것처럼 폭발이 일어나 각각의 기운이 서로를 태우며 위쪽으로 솟구쳤다.

    쿠쿠쿠…….

    고공에 공간이 갈라져 나타난 공간균열들이 서로 교차하다 사라진 후 쿵, 하고 액회가 호수 연안에 떨어져 다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 그래도 남은 힘이 얼마 없는 데다 진령혈맥과 천살진옥공을 운용한 한립은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기운을 다스린 액회가 다시 뛰어들어 그를 내리치자 한립은 줄이 끊긴 연처럼 혈호로 떨어졌다.

    그 위로 주먹 허상이 계속 떨어져 혈호가 출렁거리는데, 한립의 모습은 시종일관 보이지 않았다.

    “려 형…….”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석천공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골천심은 차마 못 보겠는지 고개를 돌리고 육화부인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자령조차 무의식중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 * *

    그때 혈호 깊은 곳에 가라앉은 한립은 온몸의 뼈가 모조리 부러져 태산처럼 떨어지는 주먹들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게다가 강력한 힘이 그의 육신만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의식세계까지 뒤흔들어 정신이 흐릿해졌다.

    진극막은 부서진 지 오래였고, 마지막 남은 성신지력에 기대 버티고는 있지만 언제 모두 유실될지 알 수 없었다.

    그제야 액회와 그의 실력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 얼마나 무모한 싸움을 시작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려 수사…….”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해 도인과 비슷한 목소리에 한립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려 수사, 힘을 좀 빌려 씁시다. 저항하지 마세요.”

    그 말이 끝나자 핏빛 수정관의 시체가 번쩍 눈을 뜨더니 두 손으로 기괴한 수결을 맺어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한 줄기 황금빛이 손바닥에서 흘러내려 금색 단약으로 뭉쳐져 퐁, 하고 혈호 속으로 떨어졌다.

    “막아야 해!”

    액회가 불길한 느낌에 어떻게든 단약을 잡으려 했는데, 단약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손길을 피해 한립의 미간으로 스며들었다.

    “저건!”

    “선령력입니다! 선령력이 느껴졌어요…….”

    육화부인과 석천공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고, 골천심은 의문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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