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003화 (1,760/2,000)
  • 2003화. 심장

    *

    미간을 좁힌 한립은 ‘자소’라 부르는 흑의 여인이 바닥에 하얀 깃발 12개가 꽂힌 흑돌 원반을 놓아두고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을 보았다.

    괴뢰 12마리를 동시에 부리면서 진법까지 펼치게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는데 이번 공격을 주도하는 것은 사심이 아니라 바로 그녀였다!

    장창을 든 곤옥이 가까이 붙어 서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허접한 진법으로 나를 가두려는 겁니까?”

    실소한 액회가 전신의 현규에서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주먹으로 뼈 사슬 그물을 쳤다.

    쿠앙!

    주먹 끝에서 방대한 별빛이 터져 나오자 뼈 사슬에서 다시 한번 흡입력이 발생해 대부분 역량을 흡수해 버렸다.

    콰릉!

    동시에 은색 뇌전이 미친 듯이 액회에게 떨어져 마구 불똥이 튀었다.

    뇌전빛이 가시고 뼈 사슬은 손상이 되지 않았지만 열두 괴뢰의 몸에는 육안으로 알아보기 힘든 자잘한 상처들이 남았다.

    그리고 진법을 조종하던 ‘자소’가 맹렬히 몸을 떨며 그 부담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

    “이 진법으로 당신을 영원히 가둘 수는 없어도 잠시는 가능하겠죠.”

    그런 자소를 힐끗 본 사심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석참풍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그와 같이 혈호 연안에서 뛰어올라 중심부에 도착했다.

    타타탓.

    사심과 석참풍은 핏빛 호수 표면을 가볍게 디디면서 수정관 옆으로 갔다.

    유골을 보는 사심의 눈빛이 흔들렸다.

    “석 수사, 정혈을 부탁드립니다. 약속한 것은 꼭 지키지요.”

    그녀의 말에 석참풍이 고개를 끄덕이고 삼각뿔 골검으로 손바닥을 그어 작게 상처를 냈다.

    성신지력에 의해 손바닥에 금빛 광택이 나는 혈홍색 핏방울이 맺혔다.

    그걸 본 사심은 뼈를 조각해 만든 성란필을 꺼내 먹처럼 석참풍의 피를 찍어 일필휘지로 수정관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수정관을 가득 채운 새빨간 궤적들이 원래 새겨져 있던 오각형 별 도안과 맞물려 하나가 되었다.

    한립은 수정관이 붉은빛을 머금고 웅웅 진동해 혈호 전체에 파문이 이는 것을 보았다.

    핏빛 호숫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수정관을 향해 밀려들어 거대한 혈액 고치를 응결했다.

    쿠쿵.

    액회는 지금도 뼈 사슬로 이루어진 진법 안에서 빠져나오려 힘을 쓰고 있었다.

    뇌전으로 둘러싸인 금제 진법은 성신지력을 흡수하는 힘을 지녔지만 그의 공격을 막을 때마다 열두 괴뢰의 몸에 균열이 커지고 있었다.

    카착!

    자소 앞에 놓인 진법 원반의 하얀 깃발들이 전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고 검은 천으로 가려지지 않은 위쪽 얼굴은 핏기없이 질려 있었다.

    주의 깊게 그녀를 살피던 한립은 일순 긴장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가 갑자기 나타나면 액회와 사심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모르기에 오히려 일을 망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소가 자령일 거라고 짐작은 가지만 아직 확인한 것도 아니었다.

    그 순간 혈액 고치 속의 수정관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혈액 고치의 핏물이 솨아아, 흘러내려 전설 속의 성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이하게도 수정관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핏빛 수정 석판이 시체를 떠받치고 있었다.

    성해는 생각보다 너무 평범해서 특별한 파동이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한립은 그 아래 핏빛 돌판을 보고 이채를 띠었다.

    석판에 새겨진 현묘한 주술문자 중 그가 알아볼 수 있는 일부만으로도 그것들이 시체의 기혈의 힘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탐욕 어린 시선을 보낸 액회는 미친 듯이 진법에서 벗어나려 했고 잠시 회상에 잠겼던 사심은 양손으로 신속히 수결을 맺었다.

    주문을 외며 열 손가락을 꽃피우듯 움직인 그녀는 자신의 배에 손바닥을 올렸다.

    끼기긱!

    현란한 하얀빛이 퍼지고 부드러운 살로 이뤄진 것 같았던 그녀의 뱃속에서 기계음이 울리며 배가 갈라졌다.

    “자신의 몸을 괴뢰로 만들어 버리다니…….”

    육화부인이 놀라 중얼거렸다.

    한립이 보기에도 의외였다.

    갈라진 뱃속에서 핏빛이 빠져나왔는데, 사심과 액회를 제외한 모두가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핏빛 속에는 수정구슬에 봉인된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들어있었다.

    한립은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

    강렬한 생명의 기운이 심장에서 전해졌다.

    심장을 뽑아내자 사심의 복부는 꽃잎처럼 겹겹이 닫혀 원래대로 매끈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기운이 약해져 힘이 쭉 빠진 얼굴이 되었다.

    “으하하! 남의 심장을 지키려고 자신의 몸속에서 배양하다니, 지금까지 수행이 늘기는커녕 도리어 퇴보한 까닭이 이거였습니까?”

    액회가 그걸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를 등진 사심은 단약을 꺼내 삼키고 두 손으로 수정구슬을 조심스럽게 잡아 봉인된 심장을 꺼내려 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윽!”

    하얀 삼각뿔 골검이 사심의 심장을 관통해 가슴을 뚫고 나온 것이다.

    이에 삼각뿔 골검 가운데 파인 고랑에서 심장의 피가 콸콸 흘러내려 그녀의 몸을 적혔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사 성주…….”

    사심 바로 뒤에서 석참풍이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지곤 들고 있던 삼각뿔 골검을 돌려 으득, 하고 무언가를 으깼다.

    울컥 피를 토한 사심은 허리를 비틀어 손바닥으로 석참풍의 머리를 날려버리려 했으나, 석참풍이 먼저 전신의 현규를 밝혀 피한 뒤 백골 단검으로 그녀의 배를 찔렀다.

    동시에 재빨리 사심의 손에서 수정구슬을 낚아챈 석참풍은 미친 듯이 물러나 현성 무리와 거리를 벌렸다.

    사람들이 변고에 적응하기 전 혈호 연안에서 폭음이 울렸다.

    쿵!

    대량의 은색 뇌전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 위쪽의 지붕과 사면의 벽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재빨리 고개를 숙인 한립 위로 잘려나간 하얀 갈고리가 그가 숨어 있던 바위를 가르고 지나갔다.

    액회가 진법을 부수고 열두 괴뢰마저 산산조각을 낸 것이다.

    12개의 하얀 깃발들이 파삭파삭 터져 깃발들이 꽂혀 있던 원반마저 깨지고 자소는 충격을 받아 피를 뿜으며 뒤로 쓰러졌다.

    진법에서 벗어난 액회는 아직도 가슴에 골검이 박혀 있는 사심과 석참풍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하하, 대황자께서 원하시던 바를 얻으셨으니 축하를 드려야 마땅하겠습니다.”

    “허허, 모든 게 액 성주님 덕분입니다.”

    석참풍도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답했다.

    “당신들, 진작부터 한 통속이었군.”

    심장에 박힌 삼각뿔 골검을 뽑아낸 사심이 험악한 얼굴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이런, 실례였나요? 대황자와 제 연기가 볼만하셨습니까? 원래 고육계만큼 잘 통하는 게 없어서요.”

    액회가 조롱하는 소리에 사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 액회가 석참풍을 공격할 때 바로 나서지 않은 것도 이런 일이 있을까 경계해서였는데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속도 말았다.

    품에서 손가락 크기의 검은 병을 꺼내 기울인 사심은 그 안에서 떨어지는 금색 가루를 모아 가슴의 상처에 댔다.

    금색 가루들이 스스로 피에 녹아들어 상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없으면 주인님도 부활시킬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나와 함께 성해를 나눕시다.”

    액회는 처음으로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자소, 무슨 수를 써서든 심장을 빼앗아 와라.”

    사심은 답하는 대신 갈라진 손바닥 틈으로 큼지막한 금색 구슬을 불러냈다.

    “끝까지 방해하겠다면 나도 봐주지 않겠습니다!”

    펄쩍 뛰어오른 액회가 성해가 있는 호수 중앙으로 향했다.

    금색 구슬은 노기등등한 눈을 지닌 거목 크기의 금강역사로 변했는데 쇠를 부어 만든 것 같은 몸에는 쇠 실로 만든 가사(袈裟)를 걸치고 등 뒤로 8개의 팔이 자라나 있었다.

    피식 웃음 지은 액회가 천여 개의 현규를 밝히고 달려들어 맞붙었다.

    그의 주먹에서 쏟아진 주먹 허상들은 금강역사의 8개의 팔과 충돌해 쇠붙이가 충돌하는 탱탱! 거리는 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듯 울려 퍼졌다.

    한편, 다시 몸을 일으켜 앉은 자소는 이상하게 생긴 괴뢰 두 마리를 꺼내 바닥에 두었다.

    하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등에 금색 깃털 날개 4장이 달린 괴뢰였고, 다른 하나는 호랑이 몸에 소녀의 머리가 달린 괴뢰였다.

    그녀의 조종을 받은 두 괴뢰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석참풍을 향해 쇄도했다.

    석참풍은 경계를 하고 있었는지 금색 구슬을 꺼내 던졌다.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구슬이 금빛을 터트려 금색 우리를 만들어 그를 보호했다.

    날개 달린 괴뢰는 그 앞에 날아들어 네 장의 날개에서 하얀 깃털들을 칼날처럼 쏘아 보냈고, 짐승 괴뢰도 질주해 와 소녀 모양의 머리가 입을 벌려 은색 뇌전을 쏟아냈다.

    금색 우리를 하얀빛과 은빛이 덮으면서 한참 동안 콰쾅! 거리던 소리가 조용해졌다.

    한립은 빛이 가시고도 금색 우리가 부서지지 않자 눈썹을 끌어올렸다. 당연히 그 안의 석참풍도 무사했다.

    그는 새로운 수정구슬을 꺼내 손에 아직 남은 핏물로 표면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자신이 나서야 할지 망설였다.

    수정구슬 안의 심장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서 읍혈대진보다 더한 보물이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그는 사심이 말한 ‘마군’의 부활에 큰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해 도인과 관 속의 유골이 무슨 연관이 있는 듯하여 석참풍이 보물을 차지하게 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나선다고 해도 액회와 사심이 합심해 그를 공격하면 달아나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었다.

    고민하던 한립은 언뜻 바닥에 엎어져 있던 석천공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

    “석 형, 괜찮으십니까?”

    조용히 전음을 보내자 석천공의 어깨가 또 한 번 들썩여 그 옆에 선 육화부인의 시선을 끌었다.

    육화부인은 힐끔 그를 보다 아무 내색 없이 조용히 눈길을 돌렸다.

    “려 형, 전 괜찮습니다. 한 가지만, 부탁을 드려도 될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저들이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아뇨, 그건 나중이고, 일단 석참풍이 든……. 석참풍이 든 심장을 빼앗아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심장을 삼키게 두어서는 안 돼요, 안 그랬다가는…… 후환이 끝도 없을 겁니다.”

    석천공은 부상이 심해서인지 아니면 금제의 영향 때문인지 띄엄띄엄 전음을 보내왔다.

    “대체 저 심장이 무엇이기에 석참풍이 갖은 고생을 하며 얻으려 하는 겁니까?”

    “구체적인 효능은, 저도 모릅니다. 석참풍이 아주 중시하고, 심지어……. 심지어 그가 대라경에 이를 수 있게 도와줄, 귀한 보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만 압니다. 석참풍이 일단 저걸 삼켜 흡수하면……. 우린 영원히 성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석천공의 말에서 조급함이 느껴진 한립은 또 다른 질문을 하려다 안색이 달라졌다.

    금색 우리 안에서 농염하기 짝이 없는 기혈의 기운과 생명력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참풍이 수정구슬의 금제를 열어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을 꺼내 들고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안 돼…….”

    사심은 분노했지만 그가 심장을 되찾으러 뛰어가면 액회가 유골을 건드릴까봐 고민하느라 잠시 괴뢰의 조종이 느슨해졌다.

    쾅, 소리와 함께 액회가 금강괴뢰 뒤에서 허공을 가르며 두 주먹을 미친 듯이 뻗어댔다.

    사심도 보통내기가 아니라 금강괴뢰도 번개처럼 고개를 돌려 8개의 팔을 움직였지만, 등 쪽에 수백 번의 타격을 당한 괴뢰가 터지며 두 조각이 났다.

    미간을 찌푸린 자소는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괴뢰에게 금색 우리에 공격을 쏟아붓게 했지만 우리가 깨지기 전에 상황이 끝날 것 같았다.

    “본 황자가 열반을 하면, 너희 같은 버러지들은 끝이다…….”

    석참풍이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심장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쾅!

    그때 흐릿한 인영이 혈호 해안에서 뛰어올라 높게 인 핏빛 파도 사이로 통로를 만들며 달려들었다.

    석참풍이 무언가를 하기 전 그를 지키던 금색 우리가 터져나갔고, 자소가 통제하던 괴뢰들마저 돌풍에 날아갔다.

    한립은 작열하는 대량의 은빛 뇌전을 건너 갈고리처럼 만든 손으로 석참풍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푸욱.

    하얀 별빛을 머금은 손이 석참풍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다량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석참풍은 괴력에 날아올라 천장에 머리를 찧을 정도였다.

    쿠쿵!

    지하 공간 천장이 깨져 수많은 돌조각이 떨어져 바닥에 박히고 마지막으로 석참풍이 떨어졌다.

    출렁이는 혈호의 핏물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피범벅인 가슴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텅 빈 두 손을 보고 절규했다.

    “안 돼!”

    호수 중앙의 수정관 옆에 선 한립의 손에서 심장이 뛰고 있었고, 그걸 본 모두가 깜짝 놀랐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