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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002화 (1,759/2,000)

2002화. 추격

*

한참을 말없이 제 자리에 서 있던 골천심은 바닥에 떨어진 백골 장창을 주워 한립이 떠난 방향으로 따라갔다.

무너진 건물 사이를 펄쩍펄쩍 뛰어 넘어가는 한립의 이동 속도는 굉장했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힌 그는 마음이 퍽 심란했다.

적린공경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데, 자령도 찾지 못하고 빠져나갈 방법도 찾지 못한 채 괴성과 현성의 갈등에 휘말리고 말았다.

게다가 대황자 석참풍과 3황자 석파공도 이 일에 끼어들어 있었다.

그는 석참풍보다는 석파공의 거동이 더 신경 쓰였다. 골천심을 심어둔 것만 봐도 적린공경에 한두 해 공을 들인 게 아니었다.

황권에 가장 근접한 두 황자가 불모지나 다름없는 적린공경에 관심을 두는 것은 분명 대허에 있다는 성해와 연관이 있을 터였다.

석천공이 먼저 적린공경에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 도인은 또 왜…….”

한립은 자조적으로 웃음을 흘렸다.

적린공경에 들어온 이래 그와 해 도인 사이의 연계가 나날이 약해지고 있었고, 해 도인 자체도 낯선 존재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해 도인이 주었던 옥간의 기록을 보면 그가 말하는 주인이 성해이거나 아니면 대허에 기거했던 누군가가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수백 리를 가다 보니 붕괴한 지 얼마 안 된 건물들이 나왔다.

드넓은 파급력으로 보아 액회와 사심이 추격전을 벌이면서 싸운 흔적인 듯했다.

* * *

보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추적을 이어가던 한립은 드디어 폐허 더미를 벗어나 극히 넓은 면적의 백석 광장에 도착했다.

네모난 광장의 모서리에는 뾰족한 지붕을 지닌 9층 탑 4개가 세워져 있고 그 가운데에 이전에 대허에서 보았던 어떤 건축물보다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에 유리 지붕을 얹은 거대 전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유리 궁전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유리기와를 얹은 지붕이나 거대 기둥들에서 세월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멀리서 정면의 궁전 대문을 바라본 한립은 화려하게 조각이 된 양문형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위로 금색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천기전…….”

한립은 석참풍이 이런 이름을 언급했던 것을 떠올리고 기운을 억누른 다음 궁전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깔린 벽돌에도 대량의 성신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궁전을 중심으로 수천 장 너비의 대형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문에 다다른 한립은 거무스름한 흔적을 보고 원래 펼쳐져 있던 금제가 부서진 것을 확인했다.

그는 급히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안쪽을 들여다보며 내부를 염탐했다.

대전 내부에는 돌 탁자와 의자들이 가루가 되어 나뒹굴고 있어 얼마 전에 격전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던 한립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번득 안으로 스며들었다.

텅 빈 대전에는 액회나 사심 무리는 보이지 않고 대형 골갑(骨甲) 괴뢰 잔해만 가득했다.

괴성이 조종하는 괴뢰가 아니라 이전에 대허 유적 다른 곳에서 보았던 것들과 비슷한 종류였다.

한립의 시선이 대전 안쪽 부서진 탁자 옆 검은 돌의자로 향했다.

그는 다른 기물들과 달리 온전한 모양을 한 의자로 다가가 한 바퀴 돌고는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양손으로 의자의 등받이 부분을 잡아 힘껏 한쪽으로 돌리자 달칵, 하는 기계음이 들리고 의자 아래에 숨겨져 있던 어두침침한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돌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수백 장을 가다 보니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안에서는 바람 소리와 함께 명확하지 않은 말소리가 전해졌다.

한립은 걸음을 늦추고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면서 우화비승공을 이용해 구멍 안쪽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매복은 없었고 허리춤까지 오는 괴상하게 생긴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전방을 살피니 수천 장에 이르는 거대한 핏빛 호수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혈호(血湖)에 자욱하게 드리운 핏빛 안개 속에서 빛이 반짝거렸다.

‘저건…….’

호수를 살펴보던 한립은 정중앙에 수정관이 떠있는 것을 보고 눈을 번득였다.

아래로 갈수록 협소해진 수정관은 투명한 표면에 무척 복잡한 진법 도안이 각인되어 있었다.

오각형을 이루는 별자리 도안을 중심으로 적어도 다섯 가지 진법 문양이 섞여 서로 절묘하게 맞물려 있었다.

수정 관 안에는 옥처럼 빛나는 유골이 누워있었는데, 머리에 뿔이 돋고 바깥쪽으로 송곳니가 길게 자란 유골은 뼈 위에 문양이 새겨진 비늘이 덮고 있어 마족의 유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의식세계에 미약하게 파문이 일고 해 도인의 기운이 느껴진 것 같았는데 정확한 위치를 잡아낼 수는 없었다.

그는 생각 끝에 눈을 감고 위치를 감응해보다 의아한 눈빛으로 눈을 떴다.

해 도인과 그의 의식연계가 위치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배신자, 아직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은 겁니까!”

혈호 건너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안력을 집중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니 괴성 무리가 사심을 중심으로 액회와 대치 중이었다.

육화부인은 액회의 뒤에 서 있었고, 석천공은 액회의 발밑에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사심, 당신이야말로 고집 그만 부리세요! 우리가 도대체 뭘 위해 그 오랜 세월을 버텨왔느냔 말입니다.”

액회가 반문하는데 사심은 말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적린공경 안에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보내며 괴성을 세워 현성과 수도 없이 충돌했으면서, 나와 손을 잡고 대허에 들어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괜히 옛일을 들춰 뭐 하자는 겁니까.”

“날 당신 같은 잇속만 챙길 줄 아는 파렴치한으로 보지 말아요!”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 한 번 만 더 손을 내밀겠습니다. 마군(魔君)의 시체가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똑같이 나눠서 각자 적린공경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곳을 빠져나가 마역이든 선계든 각자 원하는 곳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겁니다!”

액회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군…….’

그 말을 들은 한립은 절로 혈호 가운데 있는 수정관에 눈길이 갔다.

‘마족의 시체인 수정관 안의 유해가 ‘성해’이자 ‘마군’이라면?’

동시에 적린공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한 해 도인이 떠올랐다.

‘저 마군이 정말 해 도인의 옛 주인이란 말인가?’

“해 수사, 여기 계십니까?”

한립은 의식연계를 통해 연락을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내가 함께 대허에 들어오자고 한 목적이 그건 줄 압니까? 그렇게 믿었다면 한참 잘못 짚었습니다! 사실대로 말해주지요, 난 이미 주인님을 부활시킬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하하하, 부활! 아직도 그런 헛꿈을 꾸고 있었다니……. 마군은 합도(合道)에 실패해 죽은 지 오랩니다. 겨우 뼈만 남았는데 부활이라니, 그게 가능했으면 대허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조용했을 것 같습니까? 나도 차라리 마군이 살아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랬으면 여기에 갇혀 있을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무의미한 일로 힘 좀 그만 빼자 이 소립니다.”

“양심도 없는 인간! 당신이 배신해서 주인님이 합도를 하려는 순간 마주를 불러들여 방해하지 않았으면 주인님께서는 벌써 도조경에 이러셨을 거예요!”

사심이 분노해 소리쳤다.

“흥,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당시 마주가 간섭하지 않았어도 합도에는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액회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자질이 뛰어나던 분이 어찌 실패했을 거라 확신하는 겁니까! 주인님이 데려다 가르치지 않았으면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다 한 줌 더러운 흙으로 돌아갔을 사람이 말끝마다 마군, 마군! 이제는 주인님이라 부를 생각마저 들지 않는 모양이지요?”

“됐습니다, 마군이 나를 데려다 가르친 건 쓸 만한 일꾼이 필요해서 그랬던 거예요. 난 당신과 달리 영원히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난 현수의 길을 택하고 당신은 괴뢰술을 택한 것이 운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심, 당신은 마군의 꼭두각시에 불과해요. 그가 죽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꼭두각시 노릇을 하려는 겁니까.”

“뭐라고 변명하든 주인님의 유해를 가져다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는 건 사실 아닌가요? 반드시 주인님의 부활을 도와 배반자를 처단할 수 있게 할 겁니다.”

사심은 분노를 억누르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말에 액회가 발밑에 쓰러져 있는 석천공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흘렸다.

“마족 황가의 혈맥도 없이 수정관을 어찌 열려고 그러십니까? 나와 거래하지 않으면 당신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을 거예요.”

“액 성주, 성족 황실이 손이 귀하다고 하나 그래도 황가의 혈육이 13 아우 하나는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더 정통이라 할 수 있고요.”

사심이 답하기 전, 삿갓을 쓴 키 큰 사람이 나타나 웃음을 터트렸다.

삿갓을 벗은 그는 짙은 보랏빛 눈에 하얀 장발을 늘어트리고 평범한 용모와는 달리 비범한 분위기를 풍겼다.

대황자 석참풍이었다.

액회가 그를 보고 안색이 달라져 이를 악물었다.

“거듭 충고를 했건만 이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죽기 살기로 사심 당신을 방해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두 발로 쿵, 바닥을 찍어 호수가 물결치게 만든 액회는 연기처럼 사라져 석참풍 뒤에서 나타났다.

그의 다섯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석참풍의 머리를 할퀴고 있었다.

눈을 빛낸 석참풍은 위기를 감지하고 피하려 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손톱이 머리를 파고들려는 찰나, 백골 장창이 옆에서 튀어나와 챙! 하고 액회의 손목을 쳤다.

석참풍이 곁눈질로 보니 곤옥이 눈을 부릅뜨고 별빛이 반짝이는 하얀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초승달처럼 궤적을 남기고 날아간 창은 겨우 액회의 손을 손가락 한 마디 만큼밖에 밀어내지 못해 석참풍의 얼굴에는 가느다랗게 핏자국이 생겼다.

석참풍은 허리를 굽혔다가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소매에서 삼각뿔 모양 골검을 뽑아 들고 액회의 배를 찔렀다.

손을 거두며 뼈 창을 튕겨낸 액회는 무릎을 들어 삼각뿔 골검을 막았다.

다리의 현규들이 빛을 일으켜 갑옷처럼 무릎을 보호했기에 골검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입니다.”

액회는 무릎을 들어 올린 다리를 쭉 뻗어 석참풍 면전에서 하얀빛을 터트렸다.

석참풍은 피하지 못할 걸 알고 삼각뿔 골검을 오히려 앞으로 뻗어 그 반탄력으로 백여 장을 물러났다.

그리고 그가 중심을 잡기도 전에 액회가 따라붙어 허리를 돌리면서 바다 위로 뛰어오르는 고래처럼 오른팔을 힘껏 뻗었다.

폭발력을 지닌 하얀 별빛이 주먹 끝에 모인 것을 본 석참풍은 안색이 달라져 거칠게 호흡했다.

주변 공간이 막대한 힘에 왜곡되어 피하기는커녕 숨을 쉬기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멀리서 그걸 본 한립은 깜짝 놀랐다.

‘액회는 중상을 입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저렇게 멀쩡해졌단 말인가!’

저런 공격을 정통으로 맞으면 그도 당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퍼퍼퍼펑!

폭음이 연달아 들리고 액회 주변에 12개의 금색 구슬들이 나타나 뼈 갑옷을 걸친 휘황찬란한 괴뢰로 변한 것이다.

슁슁슁슁!

끝에 갈고리가 달린 뼈 사슬을 쥔 열두 괴뢰들이 동시에 공격해 거미줄처럼 하얀빛이 교차했다.

액회는 석참풍을 치려던 주먹을 틀어 위쪽으로 내질렀고, 주먹 끝에서 터진 별빛이 하얀 뼈 사슬이 만든 사슬과 충돌했다.

뼈 사슬 그물에서 별빛들이 반짝거리더니 놀랍게도 성신지력을 토해내 작은 소용돌이들을 이루었다.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한 소용돌이는 액회가 주먹에서 뿜어낸 별빛을 그 안으로 깡그리 빨아들였다.

“이건…….”

그가 놀라 무어라 중얼거리기 전에 뼈 사슬 그물이 떨어졌다.

“진법을 펼쳐라.”

사심의 명에 열두 괴뢰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순식간에 진을 치고, 사슬 그물을 통해 흘러나온 은색 뇌전 구슬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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