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화. 사적인 원한
*
“괴성의 괴뢰는 구슬 형태로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겁니까?”
“사심 성주님이 괴뢰술과 공간 비술을 결합해 발명하신 비술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한립의 또 다른 질문에 이미 <괴뢰심>까지 내놓은 흑대는 고민 없이 괴뢰를 거두는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
복잡한 술법이었지만 이미 괴뢰술을 익힌 한립은 몇 번 연습을 해보고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금익효 괴뢰를 향해 수정빛을 날릴 수 있었다.
표면이 금빛으로 반짝인 금익효의 거대한 몸집이 몇 호흡 만에 작은 구슬로 변해 그의 손에 떨어졌다.
“더 질문하실 것이 있습니까?”
한립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흑대도 안심했다.
“괴성이 대허에 들어온 진짜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심 성주님 말씀으로는 액회를 죽이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 하셨고, 다음 목표는 성해를 취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것만 제대로 대답해주시면 보내드리지요.”
“말씀하시지요.”
“사심 성주를 따라다니던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 그러니까 ‘자소’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언제 괴성 사람이 된 겁니까?”
“제가 괴성에서 신분이 낮은 편은 아니지만 자소 낭자는 줄곧 사심 성주님 곁에 머물렀고, 남녀가 유별한 탓에 거의 교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괴뢰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서 성주님의 신임을 받고 있지요. 제가 몇백 년간 폐관 수련을 하는 사이 괴성에 들어왔으니 아마 백 년 전쯤 괴성 사람이 된 게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흑대는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한립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제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
흑대는 기뻐하며 한립에게 포권을 하고 날 듯이 뛰어갔다. 머리가 부서진 표범 괴뢰 쪽은 쳐다볼 정신도 없었다.
그가 떠나자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탁과의 하얀 늑대 괴뢰까지 거두어서 혈지로 다가갔다.
읍혈대진이 망가지는 바람에 혈지 가까이에 있던 다섯 개의 조각상들은 부서졌지만 혈지 자체는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한립이 갑자기 움찔했다.
혈지 바닥의 핏빛 빛의 문이 종적을 감추었고, 부견이 그 아래 떨어져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눈을 빛낸 한립은 펄쩍 뛰어내려 그의 옆에 섰다.
몸이 성한 곳이 없고 오장육부까지 손상된 부견은 단전의 원영마저도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숨이 미약해진 그는 그냥 놔두기만 해도 곧 숨이 끊어질 것이다.
호감을 지닌 상대는 아니었고 마찰도 있었지만 그 꼴을 보니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렇다고 그를 구하기 위해 나설 이유도 없었고, 죽기 직전인 그를 살려낼 역천의 수단도 없었기에 시선을 돌려 빛의 문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텅 빈 허공은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처음부터 빛의 문 따위는 없었던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한립은 침음했다.
뒤쪽 전각에서 읍혈대진의 진법도를 찾아내기는 했지만 그런 게 여기 왜 있는지 핏빛 문과 기혈의 힘은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아는 바가 없었다.
액회는 아마 그보다는 내막을 알 터였다.
액회와 사심이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난 것을 보면 그 성해라는 것은 여기가 아니라 대허 더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자령을 찾아야 하고 적린공경을 빠져나갈 방법을 알아내야 하는 그는 여기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며 두 주먹을 쥐고 전신의 현규를 밝혀 보았다. 하얀빛이 어린 그의 몸에 475개의 현규가 빽빽하게 떠올랐다.
탁과가 방해하기는 했지만 읍혈대진이 터지기 전에 <천살진옥공> 앞부분 3성을 대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장천병에 읍혈대진이 끌어모은 힘을 저장해 두었으니 앞으로 시간이 날 때 계속해서 현규를 늘리면 그만이었다.
아직 액회나 사심의 적수는 못되었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현성과 괴성 사람들 중 그를 막을 만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빠른 속도가 강점인 신법을 위주로 수련한 그는 액회와 사심을 마주친다고 해도 도망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얀빛을 거둔 한립은 혈지 위쪽으로 올라가 여전히 멍하게 서 있는 신양과 헌원행을 향해 수정 사슬을 날렸다.
몸을 꿈틀대며 움직인 신양과 헌원행은 난장판이 된 대전 안에 한립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표정이 달라졌다.
“려 수사, 그게……. 저는…….”
신양은 어색한 얼굴로 어떻게든 할 말을 찾으려 했다.
“괴성 사람들은 이미 떠났습니다. 그들을 쫓아가려면 가세요.”
한립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흐릿하게 연기처럼 벽에 뚫린 동굴로 사라졌다.
바깥으로 나선 한립은 주위를 둘러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허 비경 자체가 의식을 제한해서 수색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었는데, 사심 등이 떠난 지 꽤 시간이 흘러 남겨진 기운의 흔적도 희미했다.
어쩔 수 없이 대략적인 방향만 알아내고 그쪽으로 내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몸에 익숙하지 않은 힘이 가득해서 움직일 때마다 폭음이 들리기는 했지만 거의 나는 것처럼 쏘아져 나갈 수 있었다.
폐허가 된 건물과 무너진 담벼락들이 가득한 풍경을 지나며 한립은 속으로 ‘자소’라는 여인의 이름을 되뇌었다.
* * *
사흘 후.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한 정원에 들어선 한립은 인공산을 돌아 어느 회랑으로 들어섰다.
전방에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익숙한 여인의 기합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성신지력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정원을 나와서 십여 리를 더 전진한 그는 폐허들 뒤로 직경이 수만 장에 이르는 지하구덩이를 발견했다.
푸른 이끼가 낀 무너진 돌담 뒤에 숨은 그는 조심스럽게 전투 소리가 들려오는 구덩이 안을 살폈다.
하얀 뼈 갑옷을 입은 여인이 백골 채찍과 백골 장창을 들고 칼을 든 자갑(紫甲) 사내와 싸우고 있었다.
채찍 허상이 떨어질 때마다 폭음이 터지고 허공이 웅웅 울렸다.
‘골천심…….’
백의 여인은 골천심이고 그녀가 싸우는 상대는 대황자 석참풍이었다.
언제 보라색 갑옷으로 갈아입었는지 석참풍은 밝은 빛을 발하는 갑옷을 이용해 채찍 허상을 막으며 백골 칼을 들고 골천심에게 접근하는 중이었다.
이미 세 곳이나 찔려 핏자국이 번진 골천심의 배는 하얀 눈밭에 매화꽃이 떨어진 것처럼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확실히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패배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한립은 그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여인의 시체를 보았다. 그녀는 석참풍을 따라다녔던 여인으로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촤르릉!
골천심이 채찍으로 석참풍의 칼을 감고 채찍 끝으로 그의 얼굴을 찌르자, 뒤로 물러난 석참풍은 칼을 힘껏 잡아당겨 채찍을 팽팽하게 당겼다.
“가라!”
그의 외침과 함께 칼끝에서 대량의 별빛이 터져 나왔다.
퍼퍼퍼펑!
폭음이 가신 뒤 백골 채찍이 조각조각 깨져서 흩어졌고 골천심도 배의 상처가 터져 비틀거리며 물러나야 했다.
석참풍이 검을 들고 쫓아와 내리치자 창백한 얼굴의 골천심은 장창을 들어 올려 겨우 막으며 무릎으로 바닥을 찍었다.
입가에 피를 흘리며 후들후들 떠는 모습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석참풍은 챙, 하고 검으로 장창을 쳐낸 다음 그녀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누구의 지시로 날 습격한 것이냐?”
이제 끝임을 직감한 골천심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죽은 여인의 시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가 목숨을 바쳐 석참풍을 대신해 일격을 막지 않았다면 기습은 성공했을 것이다.
“죽이려면 죽일 것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습니까?”
“안 그래도 천기전(千機殿)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리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골천심의 말에 석참풍이 그녀의 목을 베어버리려는데, 파공음이 울리고 칼에서 불똥이 튀었다.
무언가 엄청난 힘으로 칼을 쳐내 석참풍마저 비틀거렸다.
칼 측면을 보니 붉게 녹은 돌멩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 호두알 크기의 돌멩이 서너 개를 한 손에 쥐고 던졌다 받았다 하며 한가롭게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네 놈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석참풍이 놀라 소리를 높였다.
“려 수사…….”
골천심도 여러 감정이 섞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황자 전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입가를 쓱 끌어올린 한립이 말을 걸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던 석참풍은 뭔가 다른 사람을 만난 듯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려 수사……. 나와 이 여인의 사적인 은원에 끼어들려는 겁니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제가 마침 골 수사와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대황자께서 자리를 좀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이든 순서가 있는 법! 내 볼일이 끝나면 그러시던가요.”
피식 웃음 지은 석참풍은 팔목을 틀어 재빨리 골천심의 목을 베려 했다.
눈을 번득인 한립의 손바닥에서 찬란한 하얀빛이 일고 평범하던 돌멩이들이 손아귀의 마찰에 새빨갛게 변해 쾅! 하고 날아갔다.
네 개의 새빨간 호선이 순식간에 석참풍 앞까지 이어져 두 개는 칼로 나머지 두 개는 각각 그의 단전과 심장을 노렸다.
석참풍이 재빨리 칼을 들어 올려 막아 원래 칼을 노리던 돌멩이 두 개는 허공을 가르고, 나머지는 두 개만 쩌정, 하고 칼날에 맞았다.
하얀 뼈 검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석참풍의 가슴을 치는 바람에 그가 뒤로 백 장을 밀려 나가 바닥에 두 줄기의 고랑이 생겼다.
몸을 가눈 석참풍은 도신에 남은 돌멩이의 흔적에 인상을 찌푸렸다.
“대허에서 기연을 얻기라도 하신 모양입니다. 참으로 부럽습니다! 에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다니 제가 체면을 살려드려야겠어요.”
멈칫하던 석참풍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교롭게도 백골 칼이 챙, 하는 소리를 남기고 부러져 버렸다.
“산은 높고 강이 깊어도 만날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그는 원래 그러려던 것처럼 태연하게 칼자루를 던져 버리고, 겉멋이 가득한 인사말을 남기고 펄쩍 뛰어올라 사라졌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립은 골천심에게 다가갔다.
그를 바라보는 골천심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저랑 같이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손에 쥔 것은 그만 넣어 두시지요?”
한립은 슬쩍 그녀의 손을 보고 말했다.
그 말에 손아귀에 힘을 푼 골천심은 숨겨둔 하얀 옥패를 다시 소매 속에 넣어두고 힘겹게 일어섰다.
“석 수사 때문에 서로 얼굴을 붉힌 사이인데 어째서 절 구해준 거죠?”
“육화부인께서 흑겁충을 없애주신 은혜를 이렇게 갚은 것으로 하지요.”
한립은 그녀가 부상은 심해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무사하신가요?”
“무사합니다. 액회를 데리고 떠나셨으니 성해가 있는 곳으로 갔을 겁니다.”
한립의 말에 골천심은 적잖이 마음이 놓인 듯했다.
“대체 정체가 뭡니까?”
“솔직히 벌써 눈치챘을 텐데요? 맞아요, 전 3황자께서 적린공경에 심어둔 첩자입니다. 그분의 비호가 없었다면 저도 어머니처럼 두청양의 손에 죽었을 테고요. 그분 덕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어머니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니 대황자와 13황자를 죽이라는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어요.”
망설이던 골천심이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그걸 이제야 알아채다니 제가 눈이 삐었었나 봅니다.”
한립은 3황자 석파공을 직접 만나고도 이상한 점을 알아채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나 골천심은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해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그런 이유가 없었다면 정말 당신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어요.”
“대황자는 마음대로 죽이세요. 필요하다면 도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후에 석천공에게 무슨 짓을 하려 든다면 내 손에 죽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한립의 경고에 골천심이 생각이 많은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정도 기다렸으면 석참풍도 멀리 갔을 겁니다. 알아서 잘 처신하세요.”
그는 이 말만 남긴 채 펄쩍 뛰어올라 먼 곳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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