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화. 사수(死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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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대가 두 손을 움직여 타고 있던 은색 표범 괴뢰의 몸에서 동색의 문양을 일으켰다.
“빛의 장막이 너무 견고해서 괴뢰 두 마리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평정을 되찾은 탁과가 그를 말렸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제야 성주님께서 금익효 괴뢰를 남겨두고 가신 뜻을 이해했습니다. 괴뢰들이 금제를 깨지 못한다고 아무도 못 깨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탁과는 흑대에게 자신 있게 말하고는 바닥에 있는 거대 새 괴뢰를 돌아보려 했다.
그런데 귓가에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들리고 무형의 의식이 송곳처럼 머리를 찔러 들어왔다.
신음을 흘린 탁과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고, 그 순간 혈진 안에서 수정빛이 튀어나왔다.
흐릿한 수정 사슬 몇 개가 그의 머리로 스며들려 했다.
그때 탁과의 미간에서 거의 투명한 열댓 개의 수정실들이 흘러나와 수정 사슬들을 휘감았다.
수정사슬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공중에 붙들리고 말았지만, 수정실보다 굵고 힘이 좋아 여전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 찰나를 틈타 탁과가 하얀 늑대 괴뢰를 타고 달아났다.
“하하, 괴성 사람들과 싸워본 경험이 없는 듯합니다. 이 정도의 의식공격이 통할 거라 생각했다니 말입니다.”
흑대가 바로 냉소를 흘리는 탁과 뒤로 가서 섰다.
혈진 속의 한립은 수결을 맺은 채 미간의 수정빛을 반짝였다. 밝은 빛에 휩싸인 수정사슬이 수정 실에서 벗어나 돌아왔다.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은 혈진을 전력으로 발동해 계속해서 다음 현규를 공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현규가 2, 30개는 더 생겨났다.
별안간 금익효 괴뢰 위에 오른 탁과는 열 손가락을 꿈틀거리면서 손끝에 연결된 수정실을 괴뢰의 체내에 박아넣었다.
그러는 동안 흑대가 금익효 괴뢰 앞에 서서 혈진을 경계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표면에 밝은 금빛이 떠오른 금익효는 여전히 검은빛도 지니고 있었다.
주문을 외며 수결을 맺은 탁과는 금익효 표면의 금빛으로 검은빛을 감쌌지만 검은빛은 굉장히 천천히 흩어졌다.
탁과는 아쉬운 눈빛으로 손도의 것이었던 까만 뼈 검을 꺼내 허공을 갈랐다.
뼈 검에서 떠오른 살쾡이 괴수 허상은 이전보다 흐릿했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 싫다는 듯 나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코웃음을 흘린 탁과는 검을 쥔 손바닥에서 하얀빛을 일으켜 수정실 몇 줄기를 방출했다.
그제야 살쾡이 허상이 제대로 움직이며 금익효 표면의 검은 빛을 빨아들였다.
금빛을 밀어내고 살쾡이 허상이 빨아들이자 금익효가 원래 지니고 있던 검은 빛이 삽시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금익효는 상쾌하게 울부짖으며 두 날개를 펴 금색 환영처럼 대전 안을 날아다녔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잔영이 열댓 개는 남았다.
무운, 주자원 등이 금익효의 날갯짓에 돌풍을 피하기 위해 싸움을 멈추고 물러섰다.
주자원은 금빛 그림자를 보면서 일순 두려운 기색이 스쳤고, 주자청은 금익효보다는 탁과를 보며 눈동자에 복잡한 빛이 어렸다.
금색 환영은 더없이 빨랐지만 움직임 중간중간에 어색한 점이 보였다. 처음 금익효 괴뢰를 조종하다 보니 아직 적응이 덜 된 거 같았다.
“속도로는 제일이라는 금익효 괴뢰라 역시 다르구나!”
가슴이 뜨거워진 탁과는 금익효에 탄 채 혈진을 노려보며 열 손가락을 빠르게 튕겼다.
키악!
금익효가 날카롭게 울며 두 날개를 펼쳐 금색 잔영으로 변해 혈진으로 쇄도했다.
혈진 가까이에 이른 금익효는 날개를 접고 스스로 거대한 금색 송곳이 된 것처럼 핏빛 장막과 충돌했다.
핏빛 고치 안에서 인상을 찡그린 한립이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미간에서 수정빛과 함께 수정 보검이 튀어나와 매서운 기세를 내뿜었다.
다만 이미 의식 우리로 신양과 헌원행을 구금하고 있어 검의 위력이 전력을 다했을 때보다는 못했다.
그리고 의식 검의 목표는 금익효 괴뢰가 아니라 탁과였다.
수정빛이 번쩍한 것을 본 순간, 검 그림자가 탁과 앞에 나타났다.
강렬한 의식의 힘을 감지한 탁과는 안색이 달라져 괴뢰를 조종하던 것도 잊고 급히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나 의식의 검은 방향을 틀어 그의 두 손에 연결된 수정실들을 끊으려 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 그런 것도 생각지 못했을 줄 아셨습니까?”
눈을 반짝인 탁과가 비웃으며 열 손가락을 움직여 반짝이는 수정실들을 안개 형태로 만들어버렸다.
의식의 검은 멈추지 않고 안개처럼 변한 수정빛을 갈랐다.
촤락!
허공에서 수정빛 알갱이들이 터지며 흩날렸고, 빛이 어둑해진 의식의 검은 바로 혈진 쪽으로 돌아갔다.
“뭐라!”
멍해진 탁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통제를 잃은 금익효는 갈 길을 잃어 날카로운 부리 대신 배로 핏빛 장막과 부딪쳤다.
펑!
핏빛 장막이 움푹 들어가며 금익효가 튕겨 나가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얼른 정신을 차린 탁과가 두 손을 요란하게 움직여 새로운 수정실들을 뿜어 금익효를 조종하지 않았으면 괴뢰와 함께 천장에 호되게 부딪히고 말았을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탁과는 금익효 괴뢰를 조종해 아래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직접 육탄전을 벌이지 않고 멀리서 두 날개를 펄럭여 깃털을 날리는 수법이었다.
쉬쉬쉬쉭!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남기면서 금색 깃털들이 핏빛 장막으로 떨어졌다.
핏빛 고치 안 한립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혈진 안에서 그가 쓸 수 있는 수단은 제한적이라 탁과와 금익효가 진법 가까이 있을 때는 몰라도 원거리에서 공격하면 방법이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수결을 맺어 핏빛 장막 위에 수많은 문양을 만들어냈다.
콰르릉!
핏빛 문양 덕에 배로 두꺼워진 결계가 금빛 깃털들의 돌격에 얇아졌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흑대도 은색 표범 괴뢰를 움직여 멀리서 공격을 쏟아부었다.
결계는 점점 얇아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퐁, 하고 터져버렸고 허공을 뒤덮은 금색 깃털들은 손쉽게 안으로 들어갔다.
쿠콰콰쾅..
강력한 깃털들은 혈진을 이룬 진법 문양들을 두부처럼 갈라 망가트렸다.
연달아 펑, 펑, 거리던 소리가 멈추고 갇혀 있던 뿌연 핏빛 안개가 주위로 퍼져나갔다.
멀리 떨어져 있던 흑대는 핏빛 파랑에 휘말리지 않게 괴뢰를 물렸고, 탁과도 급히 양손을 움직여 금익효와 같이 피하려 했다.
금익효가 핏빛 파랑 속에서 중심을 잡기 전 누군가 하얀빛으로 몸을 감싸고 번개처럼 튀어나와 주먹으로 탁과의 머리를 내리쳤다.
주먹에서 넘쳐흐르는 기운은 허공에 하얀 흔적을 남겼고 콰릉콰릉 뇌전 소리가 들려왔다.
‘헉!’
안색이 급변한 탁과는 금익효 조종을 포기하고 괴뢰의 등을 박차고 급속도로 물러났다.
동시에 그의 두 발에서 뻗어 나온 하얀빛이 속도를 증폭해주어 겨우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코웃음을 친 하얀 인영이 대신 금익효의 등을 한 달로 내리찍었다.
쿠앙!
거대 새 괴뢰는 운석이라도 된 것처럼 수직으로 떨어져 지면과 충돌했다. 그리고 하얀 인영은 그 반동으로 쉭! 사라져 다음 순간 탁과 앞에 나타났다.
이해할 수 없는 빠른 속도에 탁과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늦지 않게 반격을 시도했다.
그의 등뼈를 타고 여덟 곳에서 검은 다리가 자라나 웬만한 사람의 키보다 두 배는 길었다.
휘휘휙!
등뼈에서 자라난 여덟 개의 거미 다리들은 바람처럼 하얀 인영을 찔러 들어갔다.
거미 다리들도 빨랐으나 하얀 인영의 속도가 더 빨라 왼팔과 오른팔을 굽혔다 폈다 하는 동안 여덟 개의 다리가 전부 뚝뚝 끊어졌다.
그가 부러진 다리를 모아 반대로 꺾어 탁과의 가슴을 향해 찌르자 탁과가 튕겨 나가다 휙, 몸을 돌려 소매 속에서 하얀 밧줄을 뻗어 천장의 구멍으로 날려보냈다.
한 손으로 밧줄의 끝을 잡은 그는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달아나는 데도 거침이 없었고 마지막 공격으로 다친 것 같지도 않았다.
“호오.”
탄성을 내뱉은 하얀 인영은 그를 쫓지 않고 아래쪽으로 몸을 돌렸다.
핏빛 파랑이 약해진 대전에서 흑대가 당황한 얼굴로 은색 표범 괴뢰를 움직여 벽에 뚫린 구멍을 향해 달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표범 머리 위로 누군가 귀신처럼 나타났다.
“흑대 수사,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그를 둘러싼 하얀빛이 빙글빙글 돌며 공중에서 물처럼 파도치자 느닷없이 표범 괴뢰의 머리에 쩍! 하고 금이 갔다.
표범 괴뢰의 등에서 뛰어내려 계속 달아나려던 흑대는 어떻게 해도 상대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현명하시군요. 감히 달아나려 했다면 이 꼴이 났을 겁니다.”
하얀 인영이 발끝으로 표범 괴뢰의 머리를 톡 찼다.
콰직!
날카로운 괴력이 발끝에서 폭발해 표범 괴뢰의 머리를 뚫어버렸다.
“……!”
거구의 표범 괴뢰가 동시에 쿵, 쓰러지자 흑대가 몸을 떨면서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얌전히 섰다.
쾅!
멀리서 들려온 굉음에 무운과 흑이가 이쪽 상황을 보다가 놀라 주자원과 주자청을 버리고 갈라진 벽을 뚫고 달아나고 있었다.
하얀 인영은 그들도 쫓지 않았다.
겁먹은 주자청이 막 몸을 돌려 달아나려는데 주자원이 그녀의 팔을 잡고 전음을 주고받은 다음 하얀 인영에게 다가갔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려 수사.”
부상이 심했지만 주자원은 평소처럼 바른 자세로 서서 공수를 했다. 주자청도 오라비를 따라 예를 올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하얀빛이 흩어지고 드디어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성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떠난 겁니다. 제게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한립은 감정을 담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
주자원 오누이에게 악감정은 없었지만 이제 액회가 적이 되었으니 그와 같은 편인 그들과 친분을 나눌 이유가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저희 오누이는 수사에게 빚을 진 셈입니다. 후에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주자원은 이렇게 말하고 당당히 또 다른 벽에 난 동굴로 걸어 나갔다. 주자청은 한립을 힐끗 보고 무어라 말을 붙이고 싶은 눈치였으나 결국에는 아무 말 없이 주자원을 따라갔다.
“려 수사, 저를 남겨두신 까닭이 무엇인지요?”
주자청 오누이마저 그곳을 떠나자 흑대는 한립의 안색을 살피며 불안함을 드러냈다.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냥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남겨둔 것이니까요. 대답만 잘해주시면 해치지 않을 것이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한립은 이렇게 말하고 먼저 몸을 돌렸다. 그 말에 안심한 흑대가 그를 따라갔다.
금익효 옆에 이른 한립은 반짝이는 눈으로 괴뢰를 한참을 살폈다.
“괴성의 괴뢰술은 의식의 힘을 응결해 괴뢰를 조종하는 방식이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흑대가 고분고분 답했다.
“괴뢰를 조종할 만큼 의식의 힘을 기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괴성 사람이면 누구나 괴뢰술에 능합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강력한 의식 비술을 익히고 있겠지요. 그 비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사심 성주님께서 괴뢰심(傀儡心)이라는 비술을 전수해 주셔서 익히고 있습니다.”
“내게 그 비술을 알려주세요.”
괴성과 현성이 전면전에 들어갔고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 때문에 그냥 이곳을 떠날 수도, 언제 괴성 사람들과 싸우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적에 대해 상세히 알아두는 것만큼 싸움에서 도움이 되는 일은 없었다.
이 말에 흑대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너무 과한 요구를 한 것입니까?”
어투는 차분했지만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아, 아닙니다! 공법은 여기 있으니 직접 살펴보시지요.”
흑대는 이 제안을 거절하면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옥간을 꺼내 건넸다.
얼굴을 푼 한립은 옥간을 받아 의식을 주입했고, 그 안에는 연신술과 비교해도 많이 빠지지 않는 의식 단련 비술이 총 5성에 거쳐 적혀 있었다.
<괴뢰심> 외에 의식을 실체화시키는 의식화형, 괴뢰를 조종하는 괴뢰술도 눈여겨볼 만했다.
안 그래도 괴뢰술에 관심이 많던 한립은 유심히 내용을 살피고 옥간을 거두었다.
휘휘…….
그의 양손에서 굵직한 수정실들이 뻗어 나가 금익효 체내로 들어가자 거대 새 괴뢰가 금빛을 확 밝히면서 떠올랐다.
그 모습에 흑대는 가슴이 철렁했다.
괴뢰술은 그 원리가 심오한 탓에 의식의 힘이 강해도 충분히 숙련되기까지 백 년 이상의 고된 수련이 필요했는데, 한립은 바로 금익효 등 위에 올라 대전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의 조종을 받는 금익효는 방향을 이리저리 자유롭게 틀며 탁과가 조종할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사심 성주님의 조종과 비슷할 정도야!’
한립은 오래 날지 않고 금익효를 멈춘 다음 아래로 뛰어내렸다.
방대한 의식의 힘으로 괴뢰술에 빨리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괴뢰를 조종해 싸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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