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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99화 (1,756/2,000)

1999화. 혈진의 변화

*

빛을 번쩍이며 벽 앞에 나타난 사심이 양손을 민첩하게 움직여 수결을 맺었다.

파앗.

은빛에 둘러싸인 두 괴뢰가 다시 은색 구슬로 돌아가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자소와 곤옥은 나를 따라 액회를 쫓고, 이곳은 탁과 네게 맡기겠다. 금익효를 내줄 것이니 현성 버러지들을 전부 죽여 없애거라!”

사심이 고개를 돌려 탁과를 보고 냉혹하게 명령을 내렸다.

여전히 혈진 내 핏빛 고치 안에 앉아 있는 부견은 호흡마저 줄어들어 죽음이 머지않은 것 같았고, 다른 세 성주 중 진원은 죽고 신양은 진작 현성을 배신했다.

현성 무리 중에 남은 것은 한립을 제외하면 겨우 손도, 단통, 주자원, 주자청 네 명뿐이었다.

현성의 단통, 주자원, 주자청 오누이가 안색이 확 달라져 당장 달아나고 싶었으나 사심의 위엄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비술을 써서 겨우 약간의 기력을 회복한 손도가 이를 보고 어두운 얼굴로 일어섰다.

“자소…….”

한립은 작게 중얼거렸다.

“예, 성주님!”

탁과가 무표정하게 포권을 했고, 검은 치마를 입은 자소라는 여인과 험상궂게 생긴 거한 곤옥이 다른 괴성 사람들을 이끌고 왼쪽과 오른쪽에서 사심 뒤로 따라붙었다.

‘이름이 자소라고!’

사심이 몸을 돌리려다 기척을 느꼈는지 혈진 안의 한립을 쳐다보았다. 깜짝 놀란 한립은 최선을 다해 인사불성인 척을 했다.

인상을 찡그린 사심의 눈에 의심스러운 기색이 스쳤지만 액회가 사라진 쪽을 보고는 그냥 몸을 날렸다.

자소와 곤옥 등이 그녀를 따라 동굴을 나서 멀리 사라졌다.

탁과는 말없이 손짓해 무운, 대머리 사내 둘 그리고 신양과 헌원행까지 여섯 명이 손도 등 네 사람을 에워싸게 했다.

난색을 표한 네 사람은 방금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들과 등을 맞대고 섰다.

혈진 안의 한립은 탁과 등은 개의치 않고 오직 검은 치마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이를 갈았다.

금방 평정을 회복한 그는 혈진의 힘을 이용해 방대한 기혈의 힘을 미친 듯이 빨아들였다.

사심과 액회가 자리를 비웠으니 이제 신경 쓸 사람도 없었고, 아직 절반 정도 남은 기혈의 힘을 <천살진옥공>을 이용해 흡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의 몸에 어린 핏빛이 새로운 현규 자리를 찾아 밀려들었다.

펑, 펑…….

하얀 별빛이 반짝이며 현규가 하나둘씩 뚫리기 시작하고 읍혈대진이 더욱 빠르게 운용되어 희미하게 핏빛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혈진의 변화가 탁과 등의 주의를 끌었다.

괴성 사람들의 주의력이 분산되었을 때 펑, 펑 하고 괴성의 포위가 뚫렸다.

한쪽은 손도와 단통이었고 주자원, 주자청 오누이도 잔영을 남기며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려 했다.

탁과는 순간의 방심에 낮게 욕설을 퍼붓고는 대머리 사내 한 명과 손도 일행을 쫓으며 소리쳤다.

“무운, 너는 흑이와 다른 둘을 쫓는다! 신양, 헌원행은 혈진 속 두 사람을 처리한다.”

무운과 다른 대머리 사내가 대답을 하고 주자원 오누이를 따라갔다.

신양과 헌원행이 혈진으로 다가가 안쪽을 쳐다보는데, 그 순간 귓가에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들리고 끔찍한 두통이 밀려들었다.

혼백에 칼이 박힌 듯한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오기 전에 혈진 안에서 수정 사슬 몇 개가 희미하게 뻗어 나와 그들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신양과 헌원행은 그 즉시 멍한 눈으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고, 탁과 등은 멀리서 다른 이들을 쫓느라 여념이 없어 혈진 쪽 변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간 알고 지낸 정을 생각해서 죽이지는 않겠습니다만 귀찮게는 마세요.”

미간에 의식의 빛을 표표히 흩날린 한립이 홀로 중얼거렸다.

포위를 벗어난 손도와 단통은 액회가 뚫어놓은 동굴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쿵! 쿵! 하는 굉음이 들리고 하얀 늑대, 은색 표범 괴뢰가 하늘에서 떨어져 그들 앞을 막아섰다.

괴수들의 등에는 탁과와 대머리 사내가 타 있었다. 걸음을 멈춘 손도와 단통의 눈동자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두 분과 원한은 없지만 성주님의 지엄한 명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군요.”

담담히 말한 탁과가 열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여 손끝에서 수정실들을 반짝였다.

후오!

거대 늑대 괴뢰가 음산한 이빨을 드러내며 손도와 단통을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그 기세로 바람이 몰려와 몸이 휘청거렸다.

손도와 단통은 거대 늑대 괴뢰에게 삼켜지지 않기 위해 뒤쪽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나 거구의 늑대 괴뢰는 뜻밖에도 동작이 빨라 단통을 향해 앞발을 날렸다.

안색이 급변한 단통은 허공에서 굵은 오른팔을 들어 현규를 번득이면서 하얀 빛기둥을 응결해 늑대의 발톱을 막으려 했다.

우득!

오른팔이 강풍에 초목이 꺾이듯 부러진 단통은 붕,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지며 피를 뿜었다.

하얀 늑대 괴뢰는 뒤로 살짝 물러나 중심을 잡은 다음 바로 단통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입안에서 하얀빛이 반짝이고 수많은 하얀 바늘들이 쏘아져 나와 단통과 인근 몇 장 땅에 빼곡하게 박혔다.

바늘의 위력이 강해 바닥이 푹푹 꺼지고 있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충격과 바늘에 수많은 구멍이 뚫린 단통은 그 길로 황천길에 올랐다.

손도가 겁먹은 얼굴로 달아나려 몸을 돌렸는데, 머리 위에서 대머리 사내가 탄 은색 표범 괴뢰가 두 앞발을 휘둘렀다.

방금 늑대 괴뢰가 단통을 순식간에 죽이는 것을 목격한 손도는 감히 맞서지 못하고 두 다리의 현규들을 밝혀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훅!

이때, 귓가에 바람소리가 들리고 하얀 늑대 괴뢰가 손도를 향해 고개를 돌려 입에서 수많은 하얀 바늘들을 뿜어냈다.

낮게 기합을 넣은 손도는 손에서 검은빛을 번뜩이고 가느다란 뼈검을 꺼내 비처럼 쏟아지는 바늘들을 향해 내리쳤다.

까만 검에서 흘러나온 검은 광채가 살쾡이 형태의 괴수 허상으로 변해 입에서 훅! 바람을 뿜었다.

검은 돌풍이 바늘들을 휩쓸어 모든 바늘이 종적을 감춰버렸다.

파앗.

괴수 허상이 까만 검으로 돌아 들어가고 검의 빛도 어둑해졌지만 손도가 하얀 가루를 꺼내 검날에 파인 홈에 채워 넣자 빛이 돌아왔다.

“음?”

탁과는 놀란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 손가락을 쉼 없이 튕겼다.

네 발을 동시에 움직인 늑대 괴뢰가 하얀 그림자처럼 변해 손도 코앞에 나타나 표범 괴뢰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두 앞발을 휘둘렀다.

손도도 당황하지 않고 두 다리의 현규를 빛내 몸을 빼내려 했지만, 늑대 괴뢰는 뒷발로 바닥을 박차고 순식간에 그를 쫓아왔다.

몸을 옆으로 비튼 손도는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다.

쉬쉬쉬쉭!

연달아 두 번이나 공격에 실패한 늑대 괴뢰는 번개처럼 고개를 돌려 쩍 벌린 입안에서 이빨 잔영들을 뿜었는데, 그 속도가 직접 달려드는 것보다 더 빨랐다.

손도는 두 발을 교차해 기묘한 신법으로 그것마저 피해냈다.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백암성 성주인 그는 단통보다 수행이 높아 쉽게 당하지 않았다.

크오오!

미친 듯이 포효한 늑대 괴뢰는 달려들기, 물어뜯기, 앞발 공격을 번갈아가며 공격을 이어나갔다.

전신을 이용해 공격을 이어가는 것인데, 바늘 공격은 바늘이 다 떨어진 것인지 더는 하지 않았다.

표범 괴뢰에 탄 대머리 사내는 멀찍이 떨어져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탁과의 ‘고풍환랑(孤風幻狼)’이라는 괴뢰는 괴성에서도 극상품 괴뢰 중 하나로 부상을 당한 부속성 성주 하나를 처치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괜히 그가 나서봐야 오히려 걸리적거리기만 할 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빠른 속도로 공격하던 하얀 늑대는 돌연 앞발을 횡으로 갈랐다.

손도는 옆으로 비키려 했으나 앞발이 날아드는 각도가 애매했고 속도도 너무 빨라 당장 어디로 비켜서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괴성을 지른 그는 까만 검으로 허공을 내리쳐 다시 한번 살쾡이 괴수 허상을 불러냈다.

살쾡이 허상은 늑대의 하얀 앞발을 물고 맹렬히 숨을 들이마셨다.

하얀빛이 반짝인 뒤 늑대 괴뢰의 앞발이 녹아내린 것처럼 사라졌고 살쾡이 허상도 까만 검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러나 살쾡이 허상의 등장을 예상했다는 듯 늑대 괴뢰가 허리를 틀면서 다른 앞발로 손도의 가슴을 촥! 긁어버렸다.

피가 튀고 가슴에 깊은 상처가 생긴 손도는 선혈을 토하면서 땅으로 떨어졌다.

그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단창이 나타나 그의 단전이 있는 아랫배를 뚫고 바닥에 박혔다.

손도는 몇 번 꿈틀거리다 결국에는 축 늘어졌다.

“탁 전주님, 괴뢰술이 더 느신 것 같습니다! 괴성 안에서도 성주님을 제외하고는 따를 자가 없겠어요.”

대머리 사내가 표범 괴뢰를 타고 다가왔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흑대 형. 괴뢰술이라면 무운 전주, 곤옥 전주도 뛰어나고 새로 들어온 자소 낭자도 재능이 뛰어나 성주님의 칭찬이 끊이지 않는 것을요. 자소 낭자에게는 성주님께서 직접 괴뢰술을 전수하시기도 했고요.”

탁과가 담담히 웃음 짓고, 늑대 괴뢰 위에서 뛰어내려 손도 아랫배에 꽂힌 단창을 회수했다.

그의 시선이 옆에 떨어진 까만 뼈검에 닿자 그것을 들어다 살피고는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흑대는 탁과가 손도의 뼈검을 취하고 손도의 품을 뒤져 이런저런 물건을 꺼내 다시 늑대 괴뢰에 오르는 동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탁과가 손도를 죽였으니 전리품도 그가 챙기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무운 일행과 신양 일행을 돌아보았다.

무운과 흑이는 주자원, 주자청과 격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주 씨 오누이는 딱히 부상을 입지도 않았고 실력도 강해서 그들이 전력을 다하는데도 아직 승부가 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무운 쪽이 승기를 잡아 결국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신양과 헌원행은 혈진 옆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인상을 굳힌 탁과가 하얀 늑대 괴뢰를 타고 그들에게로 향했다.

“신양 수사, 가만히 서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이런, 뭔가 이상합니다…….”

따라오던 흑대가 입을 열었고, 그 말에 탁과는 신양과 헌원행의 풀린 눈을 발견하고는 표표히 괴뢰에서 내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탁과가 툭툭 치는데도 신양과 헌원행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의식이 구금된 것 같습니다.”

흑대가 그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고는 말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아무도 손을 쓸 만한 이가 없는데 혈진 탓일까요?”

탁과는 중얼거리면서 혈진 속의 한립과 부견을 보았다.

핏빛 고치가 더욱 두꺼워져 두 사람의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없었고 굉음만 연달아 들려왔다.

“어찌 되었든 간에 더이상 혈진이 운용되게 둘 수는 없습니다!”

눈빛이 차가워진 탁과가 늑대 괴뢰 등 위로 뛰어올라 열 손가락을 움직였다.

몸 곳곳에서 하얀빛을 방출한 거대 늑대 괴뢰가 그의 술법에 하나 남은 앞발을 들고 뛰어올랐다.

촤악!

발톱 다섯 개가 초승달 모양의 흰빛을 이루고 허공을 갈랐다.

멀리서 격전을 벌이던 무운, 주아원 등이 혈진의 이동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섯 줄기의 하얀 빛이 혈진 장막을 가르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결계에서 수많은 핏빛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장막을 두껍게 만들었다.

쿠릉!

붉은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기운의 폭발에 크고 작은 암석들이 사방 벽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대전의 흔들림이 멈추고 핏빛 장막은 전혀 손상된 구석이 없어 보였다.

탁과가 눈을 부릅떴다.

“신양, 헌원행이 이리된 것은 혈진 안의 두 명 짓인 듯합니다. 탁 전주님, 제가 도울 테니 어서 금제를 파훼하시죠!”

옆에서 흑대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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