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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98화 (1,755/2,000)

1998화. 은원

*

은색 뇌전 덩어리가 사라지고 액회는 아직 버티고 있었지만, 전신을 밝히던 현규는 빛을 잃었고 뇌전 기둥을 직격으로 맞은 오른팔은 새카맣게 타들어가 재로 흩날렸다.

후우.

액회는 길게 내뱉는 숨에 하얀 연기를 함께 분출했다.

오른쪽 어깨를 털어 검은 재를 날려버린 그의 팔에는 하얀빛이 어리며 뼈와 살이 다시 생겨나고 있었다.

얼굴이 핏빛으로 물든 액회는 빨간 피부에 푸른 힘줄들이 뱀처럼 똬리를 틀어 보기 흉측했다.

“농주술!”

혈진 안의 한립이 혼잣말을 했다.

핏빛 기운이 급속도로 가신 액회는 금방 백지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해 비틀거리다 입에서 피를 뿜었다.

전신의 현규에서도 핏빛 실들이 빠져나와 어둑하게 변했다.

“성주님!”

주자원, 주자청 오누이가 날아들어 액회의 양팔을 붙들고 부축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들어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액 수사, 오랜만입니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새로운 인물 7명이 천장에서 뛰어내렸다. 그중 하얀 치마를 입고 맨 앞에 선 여인은 바로 괴성 성주 사심이었다.

검은색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그녀의 옆에 서고 탁과, 무운, 험악하게 생긴 거한 그리고 검은 갑옷을 입은 대머리 사내 둘이 뒤를 따랐다.

눈을 가늘게 뜬 액회는 사심 무리의 등장에 놀라는 기색 없이 주자원 오누이를 밀어내고 홀로 섰다.

손도 등도 괴성 사람들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듯했다.

혈진 안에서 한립은 까만 치마를 입은 여인을 보다 고통스러워하는 연기를 하며 뱃속의 녹색 병으로 빠르게 혈육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데 집중했다.

괴성 사람들은 대전 안 상황, 특히 거대 진법과 그 안의 한립을 응시했다.

까만 치마 여인도 혈진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한립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며 무어라 말하려다 미간에서 금색 문양이 떠오르자 눈빛이 풀리며 평온을 되찾았다.

찰나였지만 시종일관 그녀의 동태를 주시하던 한립은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움찔했다.

그때 신양과 헌원행이 사심 무리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단약을 먹은 것인지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도는 신양은 다시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듯했다.

“신 수사, 고생 많았습니다. 공이 큽니다!”

신이 난 탁과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운도 따라줬습니다. 사심 성주님의 계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게 주효했지요. 청양성 성주가 된 이후 환심을 사는 척하며 음뢰경(陰雷鏡)을 액회에게 받친 것이 통했습니다.”

신양도 미소를 지었다.

“헌원 수사도 현성에서 오랫동안 잠복하느라 고생 많았네. 돌아가면 큰 상이 있을 것이야.”

탁과는 헌원행을 향한 찬사도 잊지 않았다.

“성주님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것을요!”

헌원행이 공손히 답했다.

“아주 잘들 떠들어대는구나. 진작 괴성과 결탁해 있었어!”

액회가 신양과 헌원행 등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서늘하게 외쳤다.

“피차일반입니다, 액 성주. 당신이 먼저 이런 짓을 꾸몄기에 나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신양은 담담히 말했다.

“사심, 옛정을 생각해 충고하겠습니다. 성해를 얻는 일은 우리 둘 모두에게 이로울 겁니다. 나 없이 성릉(聖陵)에서 성해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정녕 모르고 있는 줄 아십니까? 당신을 대허로 부른 것은 바로 이곳에서 당신을 죽이기 위해섭니다.”

액회의 말에 사심이 차갑게 웃음 지었다.

“그런데 액회는 어쩌다 진법에서 나와 있는 거지? 지금쯤 읍혈대진 안에 있어야 할 것인데?”

상대가 말이 없자 사심은 혈진과 액회를 보며 물었다.

“변수가 생겼는데 대전 주위의 금제 때문에 연락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신양이 혈진 안의 한립을 힐끗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말에 액회는 심장이 철렁했다.

뇌전 기둥이 떨어질 때 아직 읍혈대진 속에 붙들려 있었으면 그 자리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려비우가 나타나 그를 혈진 바깥으로 끌어낸 것이 오히려 그를 살렸다.

“액회, 운 좋게 죽음은 면했다지만 중상을 입었겠지요? 죽을 준비나 하세요!”

사심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살기등등하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주먹 크기의 금색 구슬이 소매를 빠져나와 갈라지며 거대 새 괴뢰로 변했다.

금색 독수리의 모습을 본 따 만든 괴뢰의 두 날개는 금색 깃털마다 정교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굉장히 화려했다.

“금익효(金翼梟)!”

액회가 놀라 즉시 달려드는데 그 목표는 바로 사심이었다.

중상을 입었는데도 그의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라 번득하는 순간 사심 앞에 도달해 있었다.

언제 하얀 장검을 빼 들었는지 검 끝에서 휘황찬란한 검빛이 빠져나왔다.

이때, 흐릿하게 금빛 그림자가 검빛과 사심 사이에 나타났다.

챙!

하얀 검빛은 금색 날개에 막히고 말았다.

금익효의 다른 날개가 액회의 머리를 향해 칼날처럼 떨어졌는데, 그 속도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다.

동공을 수축한 액회는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하면서 다시 장검 한 자루를 더 꺼내 쌍검을 교차했다.

쿠쿠쿠.

검빛이 폭발해 금색 날개로 떨어졌고, 곧 흰색과 금색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허공이 덜덜 떨리고 지면이 갈라졌다.

액회와 사심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괴성 사람들은 물론이고 현성 사람들도 눈으로 쫓기에도 바빴다.

한립이 있는 곳까지 그 여파가 미처 혈진이 웅웅 떨리자 한립도 급히 술법을 펼쳐 진법을 안정시켰다.

하얀 검빛들이 부서져 나가는 대신 금색 날개의 공격도 누그러졌다.

얼굴이 다시 붉게 달아오른 액회는 죽은 피를 내뱉고 바닥을 박찼다.

슉!

검은 매가 고공으로 비상하는 것처럼 허공에 뚫린 구멍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액회가 거의 구멍을 빠져나가려는데 금색 잔영이 따라붙어 수많은 잔상을 만들어 구멍을 막았다.

그걸 본 액회도 전신에서 별빛을 방출하며 멈춰 섰다.

“금익효가 얼마나 빠른지 잊은 겁니까? 절대 살려 보낼 생각은 없으니 포기하세요.”

날개를 펼친 금익효 위에 사심이 서서 고운 손가락을 튕기는데 그녀의 손끝에 수정실이 언뜻언뜻 보였다.

쉬쉬쉬쉬쉭…….

그걸 본 금익효가 두 날개를 털어 깃털을 날려 보냈고, 깃털들이 꼬리를 길게 남기면서 유성우처럼 떨어졌다.

액회는 금색 깃털을 경계하는 얼굴로 양손에 든 장검을 춤추듯 움직여 무수히 많은 하얀 검빛들을 만들어냈다.

쌍방이 충돌하고 하얀 검빛들이 부서져 나갔지만, 금색 깃털들은 속도만 줄어든 채 여전히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휘웅!

이에 액회는 전신의 현규에서 별빛을 일으키며 회전해 하얀 별빛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인근 성신지력이 그를 향해 몰려들고 지붕 위로 별빛이 쏟아져 하얀 소용돌이를 점점 더 키우고 있었다.

소용돌이에 휩쓸린 금색 깃털들은 방향을 잃고 헤매다 위력이 크게 줄었다.

액회는 소용돌이 속에서 쌍검으로 호선을 그리며 공격해 오는 금색 깃털들을 마구 베어냈다.

피피피핑!

연달아 폭음이 들리고 모든 금색 깃털을 없앤 액회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푹 들어간 지면과 인근 벽에는 그가 쳐낸 금색 깃털 대부분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에 전각이 버티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멀리 물러나 있는 현성과 괴성 사람들은 그들의 엄청난 싸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성주의 싸움에 휘말렸다가는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 나갈 터였다.

진법 안에서 고통스러운 척 연기를 하던 한립의 안색도 수시로 달라졌다. 액회가 중상을 입고도 저런 힘을 발휘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사심 무리가 적절하게 나타나 주지 않았으면 그의 처지가 아주 난감해졌을 것이다.

구덩이에서 풀쩍 뛰어오른 액회는 한 움큼 피를 토하고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렸다.

그 순간, 금빛을 번득인 금익효가 액회 머리 위에 나타났다.

“사존의 원수를 갚겠다!”

사심이 얼음장 같은 눈빛을 하고는 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금익효가 두 날개를 펄럭여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금색 깃털들을 수도 없이 날려 보냈다.

엄청난 공격에도 액회는 포기하지 않고 검을 움직이며 방어했다.

콰쾅!

그 순간, 8개의 은색 구슬이 옆쪽에서 날아들어 액회의 머리 위에서 휘리릭 돌며 터졌다.

터진 구슬 안에서 은색 주술문자들이 벌 떼처럼 나타나 빠르게 은색 빛의 진법을 완성했고, 반경 수십 장을 빛으로 둘러싸고 액회를 보호했다.

대량의 은빛 안에서 액회가 사라지고 금색 깃털들이 쇄도했지만 빛의 진법은 번쩍거릴 뿐 사라지지는 않았다.

사심이 흠칫 놀라 은빛이 날아든 방향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손짓에 금익효가 몸 곳곳에서 강렬한 빛을 터트리며 다시 한번 깃털을 날렸다.

동시에 날카로운 한 쌍의 발톱이 은색 빛의 진법으로 떨어졌다.

촤악!

이번에는 은빛 진법도 버티지 못하고 그 안에서 액회와 육화부인이 도망쳐 나왔다. 그 사이 진법 안에 있던 액회는 무언가 손을 썼는지 안색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두 사람은 더는 천장 구멍을 노리지 않고 갈라진 벽 틈으로 몸을 날렸다.

“어딜 가려고 그러십니까?”

그 모습에 사심은 냉소하며 열 손가락을 튕겼고 금익효는 금빛 잔영으로 변해 그들을 쫓았다.

엄청난 속도에 날카로운 발톱이 그들의 머리통을 잡아채기 직전이었다.

그때 육화부인이 뒤쪽으로 소매를 펄럭였다.

휙!

새까만 빛이 소매에서 빠져나가 금익효를 향해 날아들었다.

미세한 가루 알갱이로 이루어진 검은 빛에서 기이한 파동이 전해졌다.

“태음원자극광(太陰元磁極光)!”

사심이 놀라 양손으로 허공을 잡아채 맹렬히 왼쪽으로 끌었다.

이에 금익효가 왼쪽으로 이동해 까만빛을 피하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배에 맞고 말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까만빛이 터져 금익효를 붙들고 주위로 퍼져나갔다.

더없이 민첩하던 금익효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마치 내부 기관에 무언가 낀 것처럼 끼익 끼익 소리를 냈다.

육화부인과 액회는 살짝 방향을 바꾸어 그런 금익효 옆으로 비켜 지나갔고, 금익효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져 쾅! 하고 흙먼지를 풀풀 날렸다.

사심도 제때 피하지 못해 함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육화부인과 액회는 멈추지 않고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대전 구석을 지나며 액회가 느닷없이 손을 뻗어 흐릿한 무언가를 잡아챘는데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고 외마디 비명이 들리다 그쳤다.

혈진 속 한립이 액회가 손으로 끌고 가는 인영을 발견하고 눈썹을 꿈틀했다.

석천공이 몸을 숨기고 있다가 붙들린 것이다.

희미하게 핏기가 보이는 몸은 눈을 감고는 있었지만 그저 기절을 시킨 것뿐인지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한립은 안도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판에 석천공은 붙잡아서 무엇을 하려고?’

액회는 갈라진 벽으로 내달려 흰 별빛이 어린 주먹을 날렸다.

콰쾅!

대전 전체가 흔들리고 외부로 통하는 구멍이 뚫렸다.

바로 그때 바닥의 구덩이 안에서 사심이 날아올랐다.

“어딜!”

액회가 달아나려 하자 그녀는 마음이 급했는지 양손으로 은색 구슬을 집어 던졌다.

카착! 착!

은색 구슬이 갈라져 두 마리의 은색 거대 새로 변하더니 두 날개를 펴고 액회와 육화부인에게 달려들었다.

은색 거대 새 괴뢰들은 동시에 날카로운 은빛들을 빼곡하게 날렸다.

사심의 동작은 빨랐지만 액회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은색 거대 새들이 도달하기 전에 육화부인과 같이 동굴을 빠져나가 종적을 감출 수 있었다.

파파파팟!

은색 빛들이 벽을 뚫고 미세한 구멍을 빼곡하게 남겼다.

은색 거대 새는 금익효 괴뢰와 닮았지만 위력은 그만하지 못했던 것이다.

쾅! 쾅!

은색 거대 새 두 마리가 벽에 부딪혀 벽에 난 동굴을 넓혔지만 여전히 그들이 지나갈 만큼 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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