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97화 (1,754/2,000)
  • 1997화. 주객전도

    *

    “말도 안 돼, 혈진 안에서 읍혈성도의 도움이 없이는 무조건 제물이 되고 말텐데!”

    액회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아, 이것 말입니까?”

    한립이 웃으며 손끝으로 허공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자 그 발아래로 핏빛이 밀려들어 별빛 도안이 완성되었다.

    액회 등이 앉은 조각상의 것과 같아 보였다.

    펑!

    이때 아래쪽 핏빛 장막에서 충돌음이 들렸다.

    고개를 숙여 보니 단통이 성주를 구하려는 마음에 그처럼 읍혈결계를 건너려다 반탄력에 튕겨 오르고 있었다.

    심각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 사이로 주자청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핏빛 고치 속의 손도 등도 살길을 발견한 듯 앞다투어 고개를 쳐들고 한립을 올려다보았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린 신양은 허공의 한립과 그 위의 뚫린 천장 사이로 보이는 노란 하늘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말씀드린 대로 제가 직접 방문하였는데, 액 성주님께서는 손님 맞을 준비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립의 두 손이 부단히 수결을 바꿔가며 주문을 외웠다.

    쿠쿵!

    다섯 개의 조각상이 동시에 몸을 떨더니 갑자기 다른 모양의 주술문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혈지 아래 진득한 핏빛이 부견 등 핏빛 고치들을 차례로 지나 정화를 거친 다음 액회까지 지나 한립을 향해 치솟았다.

    흡!

    한립의 가벼운 호흡에 핏빛이 가느다란 실줄기들로 변해 그를 휘감고 새로운 거대 고치를 만들었다.

    이제 액회가 아닌 그야말로 현진 작용의 종점에 서 있었다.

    콸콸 쏟아져 들어오는 힘에 한립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 안의 경맥들이 칼로 난도질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몇 사람을 거쳐 정련된 힘이라 이렇게 거셀 줄 몰랐는데 겨우 현규 200개를 뚫은 그의 몸이 버티기에는 너무 강했다.

    “네가 어떻게 읍혈진법을 장악한 것이냐! 대체 정체가 무엇이야!”

    액회가 소리를 지르는 동안에도 한립은 눈을 부릅뜨고 포효했다.

    서둘러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미친 듯이 흘러들어오는 혈육의 기운을 아직 실체화되지 않은 현규 자리로 돌렸다.

    펑! 펑! 펑!

    수십 초 만에 연달아 새로운 현규 3개를 뚫은 한립의 속도는 액회보다 빨랐다.

    “저건…….”

    육화부인의 표정이 신중해지고 주자원 등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오라버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저 인족이 대허와 연관이 있었던 걸까요?”

    주자청이 웅얼거렸다.

    석천공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립이 어떻게 혈진을 장악해 그 안에서 액회와 맞서는지 알 수 없었다.

    “네가 누구든 내 일을 망치게 둘 것 같으냐!”

    얼굴이 싸늘해진 액회가 냉정을 되찾고 수결을 맺어 자신의 미간을 짝! 내리쳤다.

    미간에서 핏빛의 기괴한 주술문자가 떠올라 유실되던 혈육의 기운을 막았다.

    한립은 몸으로 흘러드는 기운이 약해진 것을 감지하고 액회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해진 물길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좋다, 어디 네 놈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진법 밖에서라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죽일 수 있는 녀석이 감히 위세를 부리는구나!”

    액회는 더는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미간에서 연달아 기괴한 주술문자를 불러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핏빛 기운을 도로 몸으로 되돌렸다.

    한립도 그를 상대하지 않고 두 손을 부단히 움직여 핏빛 고치 안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파앗.

    핏빛 고치 위쪽에 하얀빛이 솟아올라 고치 표면에 아홉 겹의 핏빛 연꽃 문양을 만들어냈다.

    한립은 그 위에 자리 잡고 앉아 강대한 흡입력으로 액회에게 돌아가려던 혈육의 기운을 다시 불러들였다.

    으아아!

    그는 점점 심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참다 결국 괴성을 터트렸고 핏빛 연꽃들이 불러 모은 기운이 칼날처럼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펑! 펑! 펑…….

    새로운 현규 일고여덟 군데가 밝아졌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액회는 분노한 얼굴로 양 손바닥을 그어 피가 흐르는 상처를 아래쪽 별빛 진법에 가져다 대고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강력한 흡입력이 생겨나 한립 아래 핏빛 연꽃의 흡입력에 대항했다.

    “바깥에서는 그리 실력이 뛰어나시던 분이 여기서는 저만 못하십니다.”

    조소한 한립은 심호흡을 하고 수결의 모양을 또 바꾸었다.

    아홉 겹 핏빛 연꽃 위로 이상한 문양이 떠올라 흡입력이 삽시간에 몇 배로 강해졌다.

    펑!

    액회 아래 핏빛 진법이 터져버리고 더는 읍혈진법의 힘을 거스르지 못하고 축적된 기운이 한립을 향해 흘러 들어갔다.

    액회의 몸 곳곳에서 아직 흐릿하게 빛나던 현규가 생길 자리들이 빛을 잃었고, 진짜 현규 천여 개만 남았다.

    이제 액회도 손도 등 네 명의 성주처럼 한립을 위해 기운을 정제하는 진법의 구성요소가 되고 만 것이다.

    오래 고민하던 액회가 이를 악물고 수결을 맺은 양손으로 아래쪽 조각상을 부수려 했다.

    “급하게 어딜 가려 하십니까? 도움이 필요하니 조금 더 머무시지요!”

    한립이 얼른 다른 수결을 맺어 허공을 가리켰다.

    액회가 앉은 자리에서 핏빛이 일곱 이파리를 지닌 연꽃을 이루고 꽃봉오리를 다물었다.

    쿵!

    액회의 주먹이 연꽃으로 떨어져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모르는 조각상까지 진동했고, 그 여파로 핏빛 장막이 부들부들 떨어 진법 바깥에 있던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고공에 있던 한립은 급히 수결을 맺어 흔들리는 진법을 안정시켰으나, 그 사이 액회는 조각상 양 날개에서 튀어 나간 하얀빛이 만든 핏빛 장막 틈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결계의 틈이 채 아물기 전에 소매에서 백골 사슬을 뻗어 가까이 있던 손도와 신양까지 끌어내려 했다.

    저항할 힘이 없던 두 사람은 사슬에 어깨가 뚫려 핏빛 고치에서 강제로 끌려나가고 있었다.

    그걸 막으려던 한립은 다섯 사람을 거쳐 흐름이 안정되었던 핏빛이 부견과 진원을 통과해 그에게 직접 도달하는 것을 보았다.

    핏빛 안개가 아홉 겹 핏빛 연꽃을 통과하는 순간 한립은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사지를 가르며 파죽지세로 퍼져나가 아무리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해도 힘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읍혈결계가 닫히기 직전 끌려 나온 신양과 손도는 사정없이 바닥을 구르면서 나가떨어져 꼼짝하지 않았다.

    그걸 본 석천공 등은 굳은 얼굴로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이제 겨우 현규의 수가 300개를 넘은 네 녀석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더냐? 몸이 기운을 이기지 못해 폭발한 뒤에 내 다시 네 놈의 기운을 흡수할 것이야!”

    액회는 다른 이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한립을 주시했다.

    그러나 한립은 양쪽 귀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아 그의 말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전력으로 체내의 성신지력을 움직여 읍혈진법을 통제해 보려 했지만 몸이 얼마나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펑펑펑펑펑!

    가슴과 배에 십여 개의 현규가 뚫렸는데 이상하게도 허상에서 실체가 된 현규의 하얀 별빛 속에 붉은빛 한 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몸도 부풀어 올라 사지는 물론이고 머리도 터질 것처럼 동그랗게 변하는 중이었다.

    의식의 힘이 강하지 않았으면 벌써 고통에 정신을 놔버렸을 것이다.

    “원영 혹은 혼백이라도 장천병 속에 숨겨 둘 수는 없을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 한립은 묘한 생각을 떠올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석천공이 난색을 표하며 한립을 뚫어져라 응시했고, 육화부인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주자청은 그의 몸이 곧 폭발할 거라 여겼는지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틀었다.

    “으하하, 그래 그렇게 터져 죽어라!”

    액회가 거침없이 웃음을 터트렸을 때, 모두의 예상과 달리 한립의 부풀어 오르던 몸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한립의 눈빛도 점점 맑아졌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뱃속의 암녹색 병이 밑 빠진 독처럼 체내를 휩쓸던 기운을 쓸어 담아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숨기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절대 오래 버틸 수 없을 텐데.”

    액회가 놀라 소리쳤고, 한립이 죽으면 달아날 수밖에 없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석천공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깜짝 놀랐다.

    “네 녀석, 뭘 숨기고 있는 것이냐?”

    육화부인도 참다못해 탄성을 터트렸다.

    번득 사라진 액회가 진원이 앉아 있는 조각상 뒤로 이동했다.

    “어디 나머지 둘이 사라지고도 버티는지 보자!”

    관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며 몸이 커진 액회는 한립처럼 핏빛 장막에 손을 쑥 집어넣고 조각상을 내리쳤다.

    푹!

    핏빛 장막이 움푹 들어가 손바닥이 조각상에 닿자 그는 그대로 결계를 뚫고 진원의 핏빛 고치로 손을 뻗었다.

    그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며 수결을 맺고 혈진의 핏빛 기운을 불러들여 선홍색 거대 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립은 그를 막으려다 흠칫 놀라며 고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액회도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고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구멍이 뻥 뚫린 천장 위로 노란 구름이 사라지고 찬란한 은색 광채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촤르르.

    은색 뇌전들이 거대한 물길이 되어 대전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중이었다.

    쿠콰콰쾅!

    뇌전 방울들이 응결해 굵직한 뇌전 기둥을 이루고 정확히 액회의 머리로 떨어졌다.

    그걸 본 한립은 진법을 통제하면서 표표히 날아올라 십여 장을 물러섰다.

    액회도 재빨리 힘없이 늘어져 있는 진원을 잡아채 떨어지는 뇌전 기둥을 향해 집어 던졌다.

    꽈광!

    폭음과 함께 진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당연히 원영은 탈출하지 못했다.

    대량의 은색 뇌전이 터져 나와 사람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렇게 아무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엎어져 있던 신양이 품에서 손바닥 크기의 검은 거울을 꺼내 자신의 피로 무언가를 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에 호응하듯 신양이 몸 위로 고리 형태의 하얀빛이 떠올랐다.

    흩어져가던 뇌전 빛이 다시 응결해 뇌전 기둥을 이루고 처음과 같은 위력으로 액회에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굳은 액회는 더는 한립을 신경 쓰지 못하고 발끝으로 땅을 박차며 물러섰다.

    그런데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던 뇌전 기둥이 방향을 틀어 그를 쫓았다! 액회가 인상을 찌푸리며 피하자 뇌전 기둥도 그를 따라갔다.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던 액회는 우연히 신양이 몸 아래 숨기고 있는 절반짜리 검은 거울을 보고 노기등등하게 품에서 나머지 거울 절반을 꺼내 들었다.

    “네 이놈! 백년전부터 나를 궁지에 몰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액회는 소리를 지르며 반쪽 거울을 신양 쪽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나 거울의 하얀빛이 호선을 그리며 액회의 몸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몸에 지녀 스며든 음양인뢰경(陰陽引雷鏡)의 기운을 그리 쉽게 떨칠 수 있을 줄 아느냐!”

    겨우 고개를 들어 돌아본 신양이 냉소했다.

    액회는 열불이 났지만 뇌전 기둥이 바짝 쫓고 있어 그에게 손을 쓸 시간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은 뇌전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액회가 저렇게 쫓겨 다니는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석천공은 그들 틈에서 작은 목소리로 ‘조금만 더 빨리, 더…….’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피해도 뇌전 기둥의 속도가 줄지 않자 액회는 결연한 얼굴로 앞쪽 돌다리 앞에서 멈춰 서서 전신의 현규에서 빛을 발했다.

    “와라!”

    파치치칙!

    그의 함성과 은색 뇌전이 폭발하는 소리가 맞물려 격렬한 파동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액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립도 놀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는데 노란 구름이 다시 몰려들어 더는 뇌전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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