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화. 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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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자색 곤봉을 쥔 석천공도 온몸의 상처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쌍방의 전력 차이가 너무 나서 세 사람이 힘을 합쳐도 소응 한 명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소응의 공격에 석천공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며 흑자색 곤봉을 휘둘렀다.
쉬쉬쉬쉭.
곤봉에서 흐릿하게 곤봉 허상들이 빠져나가 그물을 치고 소응을 막았지만 강력한 성신지력이 깃든 발톱이 곤봉 허상을 뚫고 석천공의 허리를 할퀴려 들었다.
이 공격에 당하면 석천공도 호 장로 꼴이 날 터였다!
급박한 상황에 한립이 나서려는데 방선이 벌써 달려들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린 소응은 석천공을 놔두고 뒤로 물러섰다.
방선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는 순간, 소응의 두 팔에서 현규들이 번쩍번쩍 빛나고 양손에서 찬란한 빛이 빠져나와 방선의 등을 갈랐다.
쾅!
등 뒤에서 눈부신 별빛이 폭발한 방선은 괴력에 등이 피떡이 된 채 튕겨 나갔다.
방선의 방대한 몸이 그대로 제단 주변의 울타리를 뚫고 새까만 심연으로 추락했다.
석천공이 서둘러 구해주려 했으나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이제 너만 남았구나.”
소응은 고개를 틀고 씩 웃어 보였다.
말이 끝나기 전에 양손의 발톱이 교차하면서 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석천공이 힐끗 어딘가를 보더니 흑자색 곤봉을 쥐고 태연히 입을 열었다.
“어디 덤벼 보던가.”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한 소응은 흐흐 웃음을 흘리고 바닥을 박차고 쇄도했다. 순식간에 석천공 앞에서 별빛을 머금은 발톱들이 교차했다.
석천공은 더없이 빠르게 곤봉을 둥그렇게 돌려 발톱들을 막는 동시에 소응의 몸을 뒤집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소응이 허공에서 발밑에 하얀빛을 내뿜고 방향을 틀어 냅다 그의 가슴을 걷어차 버렸다.
걷어차인 석천공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죽 미끄러지다 쓰러졌다.
그가 다시 일어서기도 전에 소응이 벌써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실력 차가 너무 났기에 석천공은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고 소응의 발톱에 가슴을 뚫려 못에 박힌 것처럼 땅에 꽂혔다.
“컥…….”
입에서 선혈을 뿜은 그가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소응은 차갑게 웃으며 다른 발톱마저 팔뚝에 꽂아 넣었다.
“성주께서 네 놈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으면 진작 죽였을 것이다.”
“하하,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지…….”
소응의 말에 뜻밖에도 석천공이 활짝 웃음 지었다.
허리에 반동을 주어 두 다리를 들어 올린 석천공은 전광석화처럼 두 다리로 소응의 목을 감고 힘을 주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에 석천공에게서 벗어나려던 소응의 안색이 달라졌다.
휙!
누군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날아들어 백골 곡도로 그의 목을 베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몸을 숨기고 기다리던 한립이었다.
소응은 석천공이 두 다리로 그를 죽어라 붙들고 있고 두 손은 석천공의 가슴과 팔에 꽂혀 있어 어떻게 대처할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소응의 장포 뒤쪽이 찢어지며 날카로운 칼 같은 뼈 날개가 펼쳐졌다.
수십 개의 현규를 밝힌 뼈 날개는 섬뜩한 하얀빛으로 한립을 가르려 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곡도를 거두며 뒤로 물러가 거리를 두었고, 뼈 날개가 지난 허공에는 자글자글하게 왜곡이 생겼다.
어깨를 턴 소응은 성신지력을 폭발적으로 일으켜 석천공의 두 다리를 풀어 버리고 짐승 발톱을 끼운 두 손을 뽑아낸 다음 석천공을 뻥, 차버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은 차가운 눈초리로 웃고 있는 소응을 힐끔 보고 석천공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입을 열었다.
“등 뒤의 날개도 성보인가 봅니다?”
소응은 대답 없이 두 날개를 펄럭여 고공으로 날아올랐다.
한립도 피하지 않고 곡도를 위에서 아래로 그어 대적했다.
소응의 두 발톱이 백골 곡도와 닿는 순간 발톱이 도신을 감싸 끌어당기면서 등 뒤의 뼈 날개가 한립을 찔러 들어왔다.
한립은 근거리에서 날아드는 뼈 날개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소응에게 더 다가서며 곡도를 놓아 버렸다.
이어서 대력금강결을 운용한 그는 하얀빛이 맴도는 주먹으로 소응의 가슴을 강타했다.
갑작스러운 접근과 공격까지 속도가 너무 빨라 날아들기 시작한 뼈 날개보다 먼저 그의 주먹이 소응의 가슴에 닿았다.
소응은 마치 심장이 박동을 멈춘 것 같은 충격에 헉, 숨을 들이마시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나가떨어지는 순간에도 두 뼈 날개가 한립의 등을 스쳐 등뼈가 드러날 만큼 깊은 상처가 벌어졌다.
그러나 한립은 등에 난 상처는 신경 쓰지 않고 우화비승공을 발동해 소응을 따라붙었다.
그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한립이 쫓아와 다시 주먹으로 가슴을 강타했다.
소응은 재빨리 두 팔을 교차해 그의 주먹을 막았지만, 제단 변두리로 쿵! 떨어지며 제단 전체를 뒤흔들고 말았다.
이에 액회가 고개를 들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인족이 어떻게 저런 힘을?’
왈칵 피를 토한 소응은 한립이 또 쫓아와 공격할까 두려워 서둘러 뼈 날개로 몸을 감쌌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소응은 주위를 살펴보다 피범벅이 된 자신의 가슴에 나뭇잎 모양 옥패가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한립이 최대한 멀리 떨어져 실실 웃음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등골이 서늘해진 소응이 옥패를 뽑아 던지려 했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피에 물든 옥패가 잎맥을 따라 갈라지면서 눈부신 빛을 내뿜고 폭발한 것이다.
하얀 태양이 제단에 떠올랐다.
작열하는 하얀빛 속에서 사방팔방으로 폭풍과 같은 기세가 휩쓸고 지나갔고 제단 반쪽이 떨어져 절벽 아래로 흘러내렸다.
읍혈대진의 결계도 그 여파에 휘말려 극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표정이 달라진 액회가 연신 수결을 맺어 혈진에서 뽑아낸 힘을 방출해 진법이 폭공계부의 무시무시한 위력에서 버티도록 했다.
파동이 지나가고 제단의 절반이 허물어졌는데도 혈진은 버티고 있었다.
그때 대전의 천장이 뚫려 하늘에 몰려든 대량의 노란 구름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단통을 쳐낸 주자원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번득 움직여 헌원행과 싸우는 주자청의 손목을 잡고 육화부인 옆으로 이동했다.
헌원행도 그들을 쫓지 않고 한립과 석천공이 있는 쪽으로 합류했다.
그들은 폭공계부 때문에 절반이 허물어진 제단과 지금쯤 재가 되어 사라졌을 소응을 생각하며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육화부인도 옥패가 어떤 물건인지 알아보고는 한립을 보는 눈빛이 이전보다 복잡해져 있었다.
검은 연기가 걷히고 피부의 문양이 빛을 잃어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단통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사강독을 통현비에 주입해 적에게 흘려보내는 방법은 적과 그 자신을 모두 상하게 하는 수법이었다.
주자원이 그가 더는 제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몰아붙이는 중이었기에 갑작스레 한립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한립 무리로 가지 않고 양쪽과 거리를 유지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주자청도 부상이 적지 않았지만 심각한 상처는 아니라서 오라비 옆에 붙어 놀란 눈으로 한립을 훑는 중이었다.
“오라버니 안목은 진짜 알아줘야 하네요. 진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어요.”
평소 음산한 소 장로에게 별로 호감이 없던 그녀는 한립이 적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고 감탄했다.
주자원은 한립의 실력이 강할수록 그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눈빛이 가라앉았다.
“하하, 실력을 잘도 숨기고 있었구나!”
맑은 웃음소리가 혈진 안에서 들려왔다.
“아닙니다, 액 성주님! 제 재주야 애들 장난에 불과하지요. 어디 액 성주님만 하겠습니까.”
한립도 함께 웃음 지으면서 신양이 앉은 조각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네 명의 성주들이 거의 버티지 못할 지경이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과 달리 액회는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러 빛을 반짝이는 현규가 천여 개에 달했다.
“솜씨도 있고, 말도 시원시원하게 하는군. 하하, 마음에 들어! 소 장로를 죽인 죄는 묻지 않을 테니 지금이라도 내 손을 잡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리 아량이 넓으신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한립은 상대가 회유하든 말든 손가락으로 핏빛 장막을 쿡쿡 찔러보고 있었다.
“대업을 방해하는 저 두 놈을 죽여 없애 충심을 증명하면 자네와 석공 수사는 현성의 장로로 받아주겠네. 물론 현성에 머물기 싫다면 청양, 현지, 백암, 통여 아무 성이나 골라 성주를 해도 좋고.”
액회가 진지하게 제안을 했다.
“려 수사, 이제 와 저딴 미친 소리를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신 성주님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보십시오!”
헌원행이 다급히 소리쳤고, 단통은 그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한립은 느긋하게 그들을 돌아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석 수사까지 받아주신다고 하시니 고맙기는 한데, 저희는 원래 적린공경 사람이 아니라서요. 장로나 성주 자리를 맡아 무엇을 하겠습니까.”
“오, 그런가? 아쉽게 되었군. 그렇다면 혈진이 운용을 마치는 대로 내 직접 상대를 해줌세.”
“에이, 액 성주님처럼 바쁘신 분을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있나요. 제가 직접 혈진 안으로 방문을 드리지요.”
표정 변화가 없는 액회를 향해 한립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들어오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도 좋네만, 그럴 능력이 될까 모르겠군.”
“그럴 능력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시면 됩니다.”
담담하게 한담을 마친 한립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난해한 주문을 외며 현규를 밝힌 팔로 눈앞의 조각상을 내리쳤다.
이상하게도 새하얀 빛이 어린 손이 핏빛 장막을 뚫고 직접 조각상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액회가 무슨 말을 하려다 이럴 줄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펑!
한립의 손이 신양 아래 조각상에 닿자 핏빛 장막이 더욱 밝은 빛을 뿜어내며 그를 밀어냈다.
지켜보던 액회가 미간을 펴고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여러 번 빛을 장막을 깨려고 시도했던 석천공 등은 한립의 실패가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고 흐릿하게 신형을 움직여 손도의 조각상으로 가서 똑같이 주문을 외며 팔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조각상에 닿자 무형의 힘이 그를 밀어냈다.
다음은 진원 아래 조각상이었다.
“겨우 현규 200여 개를 뚫은 인족 현수가 읍혈결계를 맨손으로 파괴하겠다? 그런 식으로 수백 수천 번을 쳐도 불가능할 것이네.”
액회는 같잖다는 듯 고개를 젓고 눈을 감은 채 읍혈대진의 혈육의 기운을 빨아들이는데 전력을 다했다.
신양 등 부속 성주들은 체내를 통과하는 힘이 커질수록 고통스럽게 울부짖었었으나 체력이 되지 않아 그 소리마저 점점 줄어들었다.
한립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부견 아래 조각상까지 골고루 한 번씩 쳐본 다음 액회 아래 조각상으로 가서 똑같이 팔을 휘둘렀다.
250개의 현규를 밝힌 손바닥에 태양처럼 빛이 밀려들었고 조각상과 손이 닿는 순간 이전과는 달리 은밀하게 주술문자가 반짝였다.
웅!
핏빛 장막이 바람이 이는 호수처럼 물결쳤다.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뜬 액회는 한립이 핏빛 장막을 무슨 맹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나오는 불가사의한 장면을 목격했다.
“어떻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미소를 머금은 한립은 펄쩍 뛰어올라 핏빛 장막의 꼭대기에서 다섯 개의 조각상을 내려다보며 허공에 멈춰 섰다.
“읍혈대진이란 것이 대단한 진법이기는 합니다! 충만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으려니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한립은 깊게 진법 내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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