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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95화 (1,752/2,000)
  • 1995화. 준비를 마치다

    *

    한쪽으로 물러선 석천공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한립이 가기 전에 되도록 쌍방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만 현성 주성이 다른 성들을 압도하는 마당에 혈진 내의 성주들이 전부 당하고 나면 더욱 위험한 상황이 되고 말 터였다.

    육화부인은 제자리에 서서 진법을 망가트리려 하지도 다른 성 사람들을 말리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진법 안의 액회만 바라보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진원의 수하인 현지성 장로도 진법을 파훼하고자 했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 보였다.

    그때 누군가 또 괴성을 터트렸다.

    방선이 두 발로 쿵, 바닥을 찍어 바닥에 깔린 석판들이 터져나갔다.

    주먹을 그러쥔 그의 얼굴에 푸른 힘줄이 솟아오르고 고통스러운 포효 속에 몸이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또 강철 심 같은 새까만 털들이 온몸에 자라나고 있었다.

    거의 돼지 마물처럼 변한 방선은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고 검은 기운이 풀풀 솟아올라 이전과는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저 녀석이 진령혈맥을 지녔을 줄이야.”

    소응이 눈을 반짝였다.

    그 말에 육화부인도 자연스레 방선을 바라보았고 석천공도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석천공은 한눈에 방선이 무슨 진령혈맥을 지닌 것이 아니라 마족의 혈맥을 격발해 신체 일부를 마물화 시키는 신통을 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방선은 고공으로 높이 뛰어올라 허공에서 급격히 숨을 들이마셨다.

    배가 거의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을 때 음파 공격이 시작되었다.

    크호오오!

    날카로운 소리가 모두의 귀를 찌르고 방선의 입에서 강대한 음파가 파도처럼 핏빛 장막으로 떨어졌다.

    격렬하게 떨리던 핏빛 장막이 움푹하게 들어가 곧 깨질 것처럼 변했다. 육화부인이 그걸 보고 놀랍다는 듯 눈썹을 끌어올렸다.

    “네 놈이 정녕 죽고 싶구나!”

    소응이 당장 몸을 날려 사라졌다.

    다음 순간 방선 뒤에 나타난 그의 다섯 손가락이 작살처럼 상대의 심장을 노리고 등을 파고들었다.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든 방선은 전혀 뒤쪽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전력을 다해 음파를 뿜어내는 데만 집중했다.

    혈진 안의 액회가 힐끗 위쪽을 보고 조소하며 손목을 돌렸다.

    손도 아래 조각상의 두 날개에서 핏빛이 빠져나와 주변의 핏빛 장막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붕괴하기 직전처럼 보이던 장막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안 돼…….”

    방선이 아득한 표정으로 절규하고 있을 때 등으로 치명적인 일격이 날아들었다.

    소응의 다섯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하얀빛이 날카로운 검처럼 그의 등을 뚫은 것이다.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추락한 방선은 바닥에 엎어져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석천공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안 되겠네. 저 버러지 같은 것들을 정리하게.”

    이때 액회가 혈진 안에서 명을 내렸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유유하게 멀리까지 퍼졌다.

    “존명!”

    소응이 소리 높여 명을 받들고 쓰러져 있는 방선을 힐끗 본 다음 석천공과 현지성의 장로를 향해 눈을 돌렸다.

    현지성 장로는 방선의 강력한 음파 공격마저 진법을 흔들지 못하자 포기하고 3개의 돌다리를 향해 냅다 뛰어갔다.

    “성주 대인께서 물러가도 좋다고 허락을 하셨더냐?”

    소응이 냉소를 흘리며 쇄도하자 현지성 장로는 160개의 현규를 밝히고, 최대한 속도를 높였지만 돌다리에 이르기 전에 따라잡혔다.

    소응의 다섯 손가락이 등으로 날아드는 것을 감지한 장로가 돌연 몸을 돌려 손에 쥐고 있던 삼각뿔 형태의 하얀 단검을 뻗었다.

    몸을 돌려 반격을 가하는 몸놀림은 달아날 때보다 훨씬 빨라 상대를 만만히 보던 소응도 입꼬리를 꿈틀했다.

    “가소로운 것.”

    소응은 피하지 않고 팔뚝에서 성신지력을 흘려보내 하얀 별빛으로 다섯 손가락을 감싸고 단검을 잡아채려 했다.

    챙!

    주먹을 쥐는 소응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허공이 왜곡되며 단검이 빨려 들어가 부러져버렸다.

    그 현지성 장로는 그 틈에 뒤로 물러나 돌다리를 건너는 대신 소응을 훌쩍 뛰어넘어 석천공 옆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돌린 소응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중상을 입고 몸을 가누지 못하던 방선은 석천공 발치에 누워있었고, 석천공이 그의 입을 벌려 새빨간 단약을 삼키게 하는 중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호 장로님.”

    몸을 편 석천공의 말에 호 장로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돼지 녀석을 살리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구나.”

    “액회 성주가 다 죽이라고 한 판에 우리끼리 뭉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소응의 음산한 물음에 석천공이 반문했다.

    “허허, 내가 생각이 짧았다. 여기까지 데려온 자들은 하나같이 성주들의 심복일 텐데 자기만 살겠다고 쉽게 달아날 리 없는데 말이야. 그래서 너희끼리 손을 잡는다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비웃음을 흘리며 소응은 번개처럼 등 뒤로 양손을 보내 섬뜩한 빛을 내는 짐승의 백골 발톱을 손에 끼웠다.

    수십 개의 성규가 반짝이는 발톱은 꽤 품질이 좋은 성보 같았다.

    “283개, 현규를 그렇게나 많이…….”

    석천공은 장포 자락을 펄럭이면서 현규를 밝히는 소응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곁의 호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많은 현규의 수면 이미 진원 등과 동급이라는 뜻이었다.

    “성주님을 구해야 해……. 성주님을 구해야…….”

    그 순간 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여 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방선이 어느새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던 등과 가슴에 핏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상처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동시에 체형도 커져 가슴과 어깨 목 등 주요부위가 검은 비늘로 뒤덮이고 있었다.

    “무얼 먹인 거냐!”

    “혈조단(血潮丹)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네.”

    소응의 질문에 석천공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혈조단도 3황자 석파공이 준 것이라 옥패처럼 무슨 수를 써두었는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방선이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먹였다.

    이제 보니 단약은 멀쩡하고 오히려 그의 예상보다 약효가 뛰어난 듯했다.

    “무슨 묘약이라도 되는 줄 알았구나. 기껏해야 단시간 동안 육신의 힘을 증폭하는 약인 것을…….”

    소응은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진작 그를 경계하던 석천공이 양손으로 흑자색 곤봉을 쥐고 측면을 향해 휘둘렀다.

    챙!

    짐승 발톱이 곤봉과 부딪쳐 불똥이 튀었다.

    제자리로 돌아간 소응은 석천공이 든 곤봉을 이채를 띤 눈으로 살폈다.

    그때 소응의 머리 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방선이 커다란 손바닥을 내리쳤다.

    쿠아앙!

    소응은 재빨리 피했으나 그가 있던 자리부터 바닥이 쩍쩍 갈라져 핏빛 장막 앞에서야 멈추었다.

    그가 몸을 가누자마자 바람 소리와 함께 호 장로가 바짝 쫓아오며 하얀 단검으로 그의 뒤통수를 노렸다.

    이에 소응은 피하지 않고 한 손을 뒤통수로 가져가 방어하며 다른 손을 등 뒤로 보내 손아귀를 쥐었다.

    또 손바닥에서 기이한 힘이 나타나 허공을 왜곡하고 달려들던 호 장로를 끌어들였다.

    모골이 송연해진 호 장로가 연신 바닥을 박차고 겨우 멈춰 섰는데 기다렸다는 듯 소응이 몸을 돌려 기습해왔다.

    다행히 석천공과 방선도 달라붙어 세 사람이 협공해 그와 맞설 수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헌원행이 주차청과 겨루고 있었는데, 수행은 그가 더 높았지만 주자청이 강력한 성보인 뼈 갑옷과 장창으로 무장하고 있어 비등비등하게 겨룰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주자원과 단통의 싸움은 극도로 치열해서 순간순간이 고비였다.

    지금 단통의 상반신에는 흑자색 문양들이 눈부신 빛을 발해 자신을 부적 삼아 태우는 것처럼 작열하는 열기가 느껴졌고, 현규의 빛을 가릴 정도로 강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장창을 휘둘러 거리를 벌린 주자원도 그걸 보고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오성회무 때보다 실력이 많이도 느셨습니다.”

    “골천심, 그 계집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준비한 것인데 어쩌다 보니 네 놈과 이러고 있구나.”

    주자원이 칭찬을 하자 검은 연기 속에서 단통이 어두운 목소리로 답했다.

    “오, 어디 그럼 실력을 제대로 확인해 볼까요?”

    주자원은 대충 대답을 하며 곁눈질로 누이인 주자청 쪽을 확인했다.

    “나와 겨루면서 한눈을 팔다니!”

    버럭 화를 낸 단통이 달려들어 오른쪽 주먹으로 주자원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안 그래도 큼지막하던 주먹이 검은 연기를 두르자 웬만한 맹수의 주먹과 맞먹었다.

    누이에게서 눈길을 거둔 주자원은 창끝에 하얀 성신지력을 응결해 뻗었다.

    치지직.

    하얀빛과 검은 연기가 만나 타들어 갔다.

    검은 연기가 쾌속으로 녹아들고 단통의 맨손이 드러났는데 주먹을 쥔 것이 아니라 손을 뻗어 새하얀 창끝을 죽어라 붙들고 있었다.

    주자원도 두 손으로 장창을 쥐고 창끝에서 하얀빛을 뿜어 단통의 손 마디마디를 공격했지만 단통은 결코 손을 풀지 않았다.

    단통은 주자원이 창을 높이 쳐들어 고공으로 들어 올려졌음에도 끈질기게 창끝을 쥐고 놓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단통의 양손에서 주술문양들이 대량의 주홍색 빛을 뿜어 검은 안개가 구불구불 장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주자원은 맹렬히 장창을 털어 대량의 성신지력을 발산해 검은 안개를 흩어버리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탱! 하는 소리가 창끝에서 들려왔다.

    성보의 창끝이 검게 부식되어 갈라지고 창대를 따라 균열이 가고 있었다.

    “제길, 사강독(死彊毒)…….”

    뒤로 물러서던 주자원은 몸이 일순 마비된 것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두 다리에 철을 부어 놓은 듯 움직이기가 어려워졌다.

    “현통비에 진작 사강독을 주입해 두었지! 죽어라!”

    단통이 주자원을 향해 오른 주먹을 날리자 거대한 압력이 떨어졌다.

    “오라버니!”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주자청이 다급히 외쳤다.

    그녀의 외침으로 시선이 분산된 틈에 헌원행은 뼈 갑옷 어깨를 터트렸고 그 파편들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린 주자원은 전신의 현규를 밝혀 꼼짝하지 못할 것 같던 몸을 빙그르르 돌려 단통의 일격을 피했다.

    * * *

    대전 바깥 하늘에 노란 구름이 한 곳으로 몰려들었으나 다들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 이를 알아차리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한낮에도 해를 가리던 노란 구름은 대전을 중심으로 새까맣게 몰려들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그 한 가운데에 뻥 뚫린 검은 구멍이 눈처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콰릉.

    만장에 이르는 소용돌이 속에서 수시로 굵직한 벼락이 떨어져 그 안에 오랜 세월 축적된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 *

    읍혈대진 안.

    액회를 포함한 네 명의 성주들은 녹초가 되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각상 위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저항할 생각도 버리고 절망에 빠져 있었다.

    신양도 머리를 굴리고는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초초함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 시각, 뒤쪽 전각으로 이어지는 돌다리를 누군가 기운을 숨기고 건너고 있었다.

    당연히 한립이었다.

    제단 위 읍혈대진을 살피니 역시 떠날 때와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단전의 유염혈운이 발작을 일으킨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이것도 전부 액회의 음모란 말인가?’

    그러나 오래 고민할 틈도 없이 참혹한 장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진원 수하인 현지성 호 장로가 소응의 기습을 받아 양손에 낀 짐승 발톱에 의해 몸이 좌우로 찢어지는 모습이었다.

    몸속에서 원영이 탈출하기도 전에 소응이 원영을 잡아다 일격에 가루로 만들었다.

    반요화된 방선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음파로 소응을 공격했으나 소응은 가볍게 음파를 피해 석천공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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