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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94화 (1,751/2,000)
  • 1994화. 내분

    *

    혈진 안, 액회가 느긋하게 눈을 뜨고 네 명의 성주를 돌아보았다.

    핏빛 눈동자에는 평소의 온화한 기색 대신 싸늘함만 가득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성주들은 끝 모를 나락에 떨어진 듯 가슴이 철렁했다.

    “액 성주님,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힘껏 저항하던 부견은 부드러워 보이는 핏빛 구름이 실은 단단한 바위보다 더 굳건한 것을 알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해가 등장하기도 전에 다들 자리를 뜨려는 것 같기에 어쩔 수 없이 붙들어 둔 것이네.”

    미소를 머금은 액회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액회, 이제 선량한 성주인 척은 그만하시지요! 모든 게 당신의 음모인 걸 모를 줄 압니까. 지금껏 조심하며 당신을 경계했는데 언제 손을 쓴 겁니까?”

    손도가 냉랭히 소리쳤다.

    “유염혈운!”

    그때 신양이 자신과 다른 성주들을 가둔 핏빛 구름을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고 다른 성주들도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했다.

    “하하, 신 수사가 그나마 민감하군. 그렇네, 유염혈운 같은 귀한 물건을 다들 마다할 리 없지 않은가?”

    “손 성주, 부 성주, 유염혈운을 구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진원이 손도와 부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손도와 부견은 민망한 얼굴이었다.

    그들도 유염혈운을 구해 먹었으나 일부러 아닌 척 다른 사람들을 속인 것이었다.

    “어쩐지 갑자기 그렇게 많은 유염혈운이 나타난 게 미심쩍다 했더니 전부 액 성주님의 함정이었군요. 그래서 이런 짓을 벌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신양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기다려 보면 알게 될 것이네!”

    액회는 핏빛 눈동자로 네 사람을 돌아보면서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와 함께 핏빛 진법의 빛이 주위의 장막으로 흘러 들어가 혈지가 있던 구덩이와 다섯 성주가 있는 제단을 감싼 우리로 변했다.

    신양 등 네 성주 아래 조각상들이 터트린 핏빛이 그들을 휘감고 거머리처럼 들러붙자 성주들은 참혹한 비명을 터트리고 말았다.

    방선 등 다섯 사람은 갑작스러운 변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성주님!”

    방선은 손도가 고통스러워하자 소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 달려들었다.

    단통, 헌원행, 작고 뚱뚱한 장로도 그 뒤를 따라붙었다. 석천공 만이 반대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냉소를 흘린 소응이 즉시 한 손을 펼쳐 하얀빛을 뿜었다.

    쉬쉬쉬쉬쉭!

    매서운 힘이 다섯 자루의 검처럼 공간에 흔적을 남기며 날아가 방선 등 네 사람을 막았고 주자원과 주자청도 싸움에 뛰어들었다.

    * * *

    그때, 뒤쪽 대전의 한립은 바깥으로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쿵! 하고 바닥을 찍으며 내려선 그의 아랫배에서 핏빛이 새어 나와 구름을 이루고 하반신을 구속했다.

    “유염혈운에 손을 써두었구나!”

    의식으로 재빨리 몸 상태를 파악한 한립은 유염혈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단전 안에서 두 핏빛 구름이 떠올라 수많은 미세한 주술문자들을 꿈틀거리면서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했다.

    한립은 당황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금제에서 벗어나려 해보았다.

    그러나 단전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구속력이 강해서 운공을 해서 충돌을 해보아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미간에서 수정빛을 반짝여 수정 사슬을 내뿜었다. 핏빛 안개가 단전을 장악해 체내의 힘은 구속해도 의식의 힘은 어쩌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달아 몇 개의 의식 사슬을 단전으로 보낸 한립은 핏빛 구름 두 덩이가 사슬에 감겨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통했어!’

    그는 의식 사슬이 혈운 금제에 통하는 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미간에서 의식의 실들을 방출해 의식의 검을 응결했다.

    연신술 5성을 대성한 뒤 쓸 수 있게 된 의식의 검은 의식 사슬보다 강렬한 의식 파동을 발산했다.

    * * *

    앞쪽 대전 안.

    방선, 단통, 헌원행, 뚱뚱한 장로 네 사람이 소응, 주 씨 오누이와 치열하게 맞붙어 쾅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선 쪽이 수는 많아도 열세라 벌써 부상을 입기 시작했다. 이에 석천공은 조급해져 한립이 사라진 전각 방향을 쳐다보았다.

    혈진 안의 손도 등은 몸의 핏빛 문양이 늘어 벌써 몸 절반의 피부가 갈라져 있었고 핏빛 안개가 전신을 뒤덮은 뒤였다.

    “저는 그간 액 성주님께 충심을 다했습니다! 제발 자비를…….”

    부견은 비명을 지르는 틈틈이 액회에게 자신은 살려 달라 빌었다.

    “자네의 충심은 잘 알고 있네. 그러니 현성의 대업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기회를 주는 것이고.”

    액회는 미소를 유지하며 수결을 맺는 데만 집중했다. 핏빛이 네 사람의 몸에 파고들어 문양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액회, 이놈! 네 놈이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그냥 죽지는 않겠다!”

    열이 뻗친 부견이 괴성을 지르며 입에서 하얀빛을 뿜었다.

    하얀빛은 톱니 날이 달린 작은 검이 그려진 부적으로 변해 맑은 빛을 반짝였다.

    서걱서걱.

    부적의 빛이 응결해 진짜 검으로 변하여 그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이상한 소리와 함께 부견의 상반신을 감싸고 있던 핏빛 구름이 흩어졌다.

    하반신의 핏빛 구름은 그대로였지만 두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호오, 혼도부(魂刀符)!”

    액회는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걱정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부견의 두 소매가 펄럭인 후 네 줄기의 검은 빛이 뻗어 나갔다.

    그중 두 가닥은 액회를 향해, 나머지 두 가닥은 아래쪽 조각상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그는 손도 등 다른 성주들을 향해서도 입에서 3개의 흰빛을 뿜었다.

    서걱서걱,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세 사람도 상반신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부 성주님! 생사존망이 걸린 순간이니 다들 전력을 다해봅시다!”

    신양은 이렇게 외치며 두 손을 연달아 휘둘렀다.

    왼손에서 노란 단창 3자루가 액회를 향해 쏘아져 나가고, 오른손에서 백골 검이 패도적인 검 그림자로 변해 아래쪽 조각상을 갈랐다.

    손도와 진원도 바로 반격에 나섰다.

    굵직한 검은 검 그림자와 요란한 핏빛이 액회를 향해 날아들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자신을 고문하는 조각상을 향해서도 손을 썼다.

    복잡한 공격들이 전광석화처럼 교차하는데도 액회는 그들을 비웃다 수결을 살짝 바꾸었다.

    이에 조각상들이 내뿜는 핏빛이 장막으로 변하고, 액회 아래 조각상에서도 핏빛이 흘러나와 그와 조각상을 감쌌다.

    구덩이 주변 방선, 소응 등은 엄청난 굉음에 깜짝 놀라 싸움도 멈추고 물러나 혈진 쪽을 살폈다.

    쿠콰콰쾅!

    그 안에서 가지각색의 빛이 번뜩이는데 액회와 다섯 개의 조각상은 멀쩡해서 네 명의 성주가 방출하는 공격이 환영처럼 보였다.

    “이, 이럴 수가…….”

    부견이 놀라 입을 벌렸다.

    “읍혈대진이 그리 쉽게 부서질 줄 알았더냐. 쯧쯧, 힘을 아껴야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을 것인데…….”

    액회는 차갑게 웃으며 수결을 맺은 두 손을 뻗었다.

    쉬쉬쉬쉭.

    네 사람 아래 조각상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핏빛 실을 퍼트려 성주들에게 딱 달라붙었다.

    부견 등은 발버둥 쳤지만 핏빛 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붙어 그들을 옭아맸다.

    그제야 액회는 흡족한 기색으로 다시 주문을 외며 수결을 맺었다.

    조각상의 빛이 강해질수록 성주들은 더 많은 핏빛 실에 감겨 대형 고치처럼 변해갔다.

    방선 등이 완전히 갇혀버린 성주들을 보고 희망을 잃었는지 기세가 약해지자 소응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 성주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너희도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이거라.”

    “헛소리!”

    방선이 차갑게 눈을 번득이고 다시 달려들자 나머지 세 사람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구덩이 바깥에서 양측이 맞붙었을 때 액회가 맨손으로 허공에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핏빛이 흘러나와 주술문자를 이루고 주위로 퍼져 핏빛 진법과 융합되었다.

    혈진의 문양들이 늘어나 몇 배는 더 복잡하고 난해한 진법이 나타났다.

    액회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으로 보아 거대 혈진을 펼치는 것이 그에게도 힘든 일인 듯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에 환희가 어렸다.

    후웅!

    혈진이 느닷없이 거대한 핏빛 빛기둥을 발사해 혈지 아래 빛의 문을 향해 흡입력을 발휘했다.

    바르르 떨린 빛의 문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진득한 핏빛이 새어 나왔다.

    액체처럼 끈적한 핏빛에는 검은 반점이 가득해 이전의 혈지보다 더욱 강한 기혈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진득한 핏빛은 마지못해 끌려가는 듯 서서히 혈진으로 빨려와 녹아들었다.

    웅!

    혈진에서 구렁이 같은 진득한 빛이 솟아올라 부견이 변한 핏빛 고치로 스며들고 있었다.

    고치 안에서 느껴지는 부견의 기운이 급속도로 강해지고 고치를 빠져나오는 핏빛이 정화된 듯 검은 반점이 줄어들어 있었다.

    액회가 기뻐하며 더 빠르게 진법을 운용했다.

    진득한 핏빛이 유유히 손도의 핏빛 고치를 지나 더 깨끗하게 변했다.

    다음은 신양, 진원이었다.

    네 번의 정화를 거친 진득한 핏빛은 검은 반점이 제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액회는 반색하며 손짓해 정제된 핏빛을 혈진을 따라 흡입하려 했다.

    진득한 핏빛이 몸으로 흘러든 액회는 몸을 파르르 떨면서 고통스러워했으나 눈을 감고 핏빛의 힘을 소화했다.

    흐릿하던 사지의 현규들이 미친 듯이 반짝거리면서 뚫리고 있었고, 그 속도는 혈지에서 기혈의 기운을 받아들일 때보다 몇 배는 빨랐다

    “읍혈진법이 원래 이런 용도였군.”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석천공이 혼자 중얼거렸다.

    진법의 힘으로 무궁무진한 핏빛이 부견 등 네 명의 고치를 통과해 액회에게 흘러들었다.

    그 짧은 시간 동은 스무 곳이 넘는 현규를 타통한 액회는 기운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주변 사람들은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운 것처럼 암담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반대로 부견 등의 기운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방선이 손도 아래 조각상 뒤로 다가가 눈을 부릅 뜨고 툭 튀어나온 입을 이렇게 벌려도 되나 싶을 만큼 벌렸다.

    크오오오!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린 방선이 실로 어마어마한 음파를 내뿜어 조각상을 공격했으나 손도와 조각상을 둘러싼 핏빛 장막이 막아섰다.

    쿠쿠쿠쿵!

    핏빛 장막이 끊임없이 흔들려서 그 파동이 주변의 다른 핏빛 장막까지 영향을 미쳤다.

    액회도 이건 의외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진법 바깥에 남은 사람 중에 육화부인을 제외하고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몇 초가 지나고 핏빛 장막의 흔들림은 점차 줄어들다 사라졌다.

    한편 단통은 전신을 칭칭 감고 있던 붕대를 풀고 상반신과 흑자색 문신이 새겨진 굵직한 팔뚝을 드러냈다.

    기합을 넣으며 뛰어오른 그는 주먹을 번쩍 들어 핏빛 장막을 내리쳤다.

    검은 문신이 밝은 빛을 발하고 굵직한 오른 주먹의 근육들이 불끈불끈 일어났는데, 반짝이는 별빛의 수가 놀랍게도 백 개에 가까웠다.

    쾅! 쾅! 쾅…….

    통현비 신통을 극성으로 발휘한 그는 주먹으로 열심히 핏빛의 장막을 내리쳤다.

    “어서 깨져!”

    눈을 부릅뜬 단통은 어떻게든 빛의 장막을 깨고 조각상을 파괴할 생각뿐이었다.

    “소란 피우지 마시지요!”

    이때 주자원이 번득 단통 정면으로 이동해 백골 창을 내질렀다.

    쩡-

    주자원의 창끝이 단통의 주먹과 맞닿아 날카로운 충돌음을 냈다.

    기류가 혼란스러워진 가운데 돌풍이 몰아치고 주자원의 창이 괴력에 휘어져 거의 튕겨 나가기 직전이었다.

    코웃음을 친 주자원은 양손으로 창을 쥐고 팔뚝의 현규 수십 개와 창의 성규들을 연달아 밝혔다.

    팔을 타고 성신지력이 폭발적으로 창으로 흘러 들어가 구부러졌던 창이 펑! 펴지며 반대로 단통을 튕겨냈다.

    바닥으로 떨어진 단통은 포기하지 않고 바로 발끝으로 땅을 박차고 주자원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자원도 창을 휘두르며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육박전이 펼쳐졌다.

    주자청은 도우러 가고 싶었지만 헌원행이 혈진의 핏빛 장막을 공격하는 것을 발견하고 장창을 들고 그쪽으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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