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화. 읍혈진도(泣血陣圖)
*
뒤쪽 돌다리 3개도 재질이나 양식은 앞쪽 돌다리들과 같았다.
중간 다리를 따라 건너편으로 건너간 한립은 평평한 광장과 양문형으로 된 거대한 석문을 마주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둑했지만 뛰어난 안력으로 석면에 새겨진 뿔이 나고 비늘이 돋은 사자를 닮은 짐승 머리 조각상을 볼 수 있었다.
짐승의 머리가 뿔에서부터 인중을 타고 입까지 반으로 쪼개져 양쪽 문을 갈랐다.
인상을 굳힌 한립은 해 도인이 주었던 옥간의 내용을 떠올렸다.
“인수가 문을 지키고 있다는 곳이 여긴가…….”
한립은 문을 미는 대신 손바닥으로 사자의 두 송곳니를 바깥쪽으로 두 번 밀어 달칵달칵, 소리를 냈다.
안쪽에서 기계음이 들리고 사자 조각의 나머지 이빨들이 뒤로 밀려나며 쩍 벌어진 입속으로 동굴이 드러났다.
그는 누가 보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다시 짐승의 이빨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 통로를 막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립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전방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묵묵히 대력금강결을 운용해 두 팔의 현규를 밝힌 한립은 자신이 어느 계단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규의 빛으로는 대여섯 번째 계단 밑까지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망설이던 그는 계단을 따라 밑으로 내려갔고 물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졌다.
발밑이 평평해진 뒤에도 물소리를 쫓아가니 무릎 높이의 돌기둥에 검은 액체가 가득 차 있는 돌로 만든 대야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액체는 은은하게 비린내를 풍기는 짐승의 기름 같아 보였다.
똑!
위쪽에서 물방울이 돌 대야로 떨어져 파문이 일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손가락 끝에서 성신지력을 뿜어 하얀빛을 돌 대야에 떨구어 보았다.
웅.
작은 울림과 함께 돌 대야에서 불길이 일어 돌기둥을 따라 양쪽의 고랑을 타고 매우 먼 곳까지 퍼지고 있었다.
내심 준비를 하고 있던 한립은 즉시 불길의 선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지켜보았다.
훅! 훅!
양쪽에서 붉은 화염이 일어 그가 위치한 곳을 밝게 비추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탄성을 내뱉었다.
꽤 넓은 공간에는 사방에 높은 산과 유유히 흐르는 강들이 위풍당당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석조벽화의 수풀에는 수많은 희귀한 짐승들이 노닐어서 적린공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경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벽화가 남아 있는 거지? 유배되어 온 자들이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며 조각해 둔 것인가?”
한립은 네 벽을 거닐면서 자세하게 벽화들을 관찰했다.
오래지 않아 공간 깊은 곳에 이르니 바닥에 검은 석관(石棺)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인형극에 쓰이는 꼭두각시 같은 괴뢰 사내가 새겨져 있었다.
멍한 표정의 사내는 관절마다 실이 연결되어 허공에 묶여 있었고 그 실들이석관 표면을 휘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선 한립은 괴뢰 사내의 머리 위로 실들이 교차해 두 물고기가 맞닿아 있는 듯한 팔괘(八卦)의 원형 도안을 이룬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뭇거리다 음양쌍어도(陰陽雙魚圖)를 만져보자 실들이 굳어 있지 않고 튕겨 나갔다.
희색을 드러낸 한립은 ‘건 3번, 곤 6번, 진…….’ 등의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여덟 방위의 실들을 팅팅, 튕기기 시작했다.
실들을 규칙적으로 튕겨 연주하니 중앙의 음양쌍어도의 물고기 눈 위치가 푹 꺼지면서 석관 뚜껑이 쿠쿵! 하고 아래로 미끄러지듯 열렸다.
관 안에 든 것은 시체나 유골이 아니라 네모반듯한 수정 서한이었다.
서한 안에는 구멍이 뚫린 은색 구슬이 담겨 기이한 의식 파동을 방출했다.
“이건가 본데…….”
구슬을 살피던 한립이 손을 뻗다 미간을 좁혔다.
뭔가 이상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그는 벽에 새겨진 산수도를 살피다 손을 거두고 석관 뚜껑을 밀어 다시 닫아 버렸다.
관을 빙빙 돌며 옥간에 적혀 있던 내용을 다시 되새기던 그는 사방의 벽화를 다시 새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석관 뒤로 간 그는 벽화를 더듬더듬 만져 하늘에 뜬 해를 꾹 눌렀다.
슥.
그러자 그림의 해가 자연스럽게 밀려 들어갔다.
“역시 그랬어!”
다음 벽화로 간 한립은 바람이 일고 폭우가 내리기 시작하는 그림에서 구름 부분을 눌렀다.
다음으로는 산맥 사이에서 큰 강줄기가 흐르는 그림의 어느 산봉우리였다.
해, 바람, 물, 산…….
팔괘의 방위가 뜻하는 곳들이 벽화 조각에 숨겨져 있었다.
쿠쿠쿵!
한립이 숨겨진 기관을 다 누르자 석관이 서서히 지하로 가라앉았고 그 자리에는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통로 안에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그 아래로 내려간 한립은 하얀빛이 들어오는 동굴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들어갔지만 별다른 기관이나 결계는 없었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의 사방에 새하얀 뼈들이 박혀 하얀빛을 발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한립과 마주 보는 곳에 검은 돌로 만든 길쭉한 탁자와 그 위에 놓인 하얀 옥함 2개가 보였다.
달칵.
주의 깊게 내부를 살핀 그는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자 탁자로 다가가 옥함 중 하나를 열어 보았다.
보물이 나타날 때 보이는 보광이나 신비한 기운도 없이 주먹 크기의 구슬 하나가 덩그러니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구슬은 석관 안에서 보았던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기괴한 주술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어떤 기운도 풍기지 않아 오히려 이전에 보았던 구슬이 더 진짜 같았다.
‘이건…….’
구슬을 집어 들고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머리카락처럼 가는 금색 뇌전 한 줄기가 소리 없이 그 안에서 떠돌고 있었다.
뭔가 귀한 물건일 거라는 생각이 든 한립은 구슬을 품에 넣어두고 다른 옥함으로 시선을 옮겼다.
겉에 원반이 박힌 옥함은 2개의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아래에 쌀알 크기의 금색 주술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옥함을 들어 살피려 했지만 옥함이 탁자와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현규를 밝혀 힘껏 들어 올려도 탁자까지 부들부들 떨릴 뿐 뽑혀 올라오지는 않았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주먹을 높이 들어 올리고 옥함을 내리쳐보았다.
파앗!
별빛이 옥함 안에서 피어올라 방대한 힘을 튕겨냈다. 얼른 뒤로 물러서 빛을 피한 한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해 도인이 주고 간 옥간에 구슬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다른 옥함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강제로 옥함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제단 쪽으로 돌아가 그곳 상황을 확인하려는데 우연히 눈길이 바닥으로 향했다.
전에 천장에 그려져 있던 성신도안과 비교해 면적이 작고 군데군데 빠진 부분도 있었지만 분명 성신도안이었다.
그는 손뼉을 짝! 치며 소매 속에서 성란필을 꺼내 성신도안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갔다.
한참 후, 붓질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자 성신도안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옥함 위의 원반이 스르륵 돌아갔다.
옥함이 스스로 열린 것이다.
표정이 밝아진 한립은 얼른 탁자로 돌아가 옥함 안에 접혀있는 옅은 회색 인수 가죽을 내려다보았다.
가죽을 들어 살펴본 그는 미간을 좁혔다.
오각형 제단과 그 5개의 모서리에 세워진 짐승 조각 그림은 지금 현성 성주 다섯 명이 발동 중인 혈제대진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가죽 위에는 <읍혈진도(泣血陣圖)>라는 네 글자가 고대문자로 적혀 있어 액회가 모두에게 말한 <혈제대진>이라는 이름과는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진법도에 따르면 제단 주변 혈지 내 거대 공간에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복잡한 진법문양들이 숨겨져 있었다.
이제야 한립은 액회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진법도를 살피던 그는 오른쪽 귀퉁이에 적힌 주석을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
그 시각, 혈지 안의 제단.
액회와 신양을 포함한 다섯 명의 성주들은 진법을 발동하며 이전보다 더 많은 현규를 밝히고 있었다.
신양 성주는 벌써 2백 9십여 개의 현규에서 별빛을 반짝여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른 개 가까운 현규를 더 뚫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손도 등도 급격히 늘어난 수행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켜보던 소응 등은 부러웠지만 실력이나 신분에서 성주들과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액회와 성주들의 머리 위에서 5개의 별빛 진법이 몇 배로 커져 더 굵직한 핏빛 빛기둥을 방출했다.
제단 주변의 핏빛 장막도 색깔이 짙어져서 수많은 주술문자가 떠올라 휘휘 바람 소리를 따라 떠돌았다.
다섯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조각상도 검은색 피부가 핏빛으로 물들었는데, 특히 두 눈은 괴이하게도 짙은 선홍색 빛을 길게 뿜고 있었다.
손도 등 네 사람은 조각상과 주변 결계의 변화에 마음이 불편해졌고 신양과 손도는 서로의 눈빛에서 불안함을 읽어내고 있었지만, 아직 결계가 그들을 구속하지는 않아 애써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혈지의 핏물 호수는 수위가 낮아지다 못해 이제 바닥이 드러나려 했다.
촤롸롸!
혈지의 핏물이 돌연 출렁이면서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사람만 한 핏빛 구슬이 떠올라 강대한 파동을 발산했다.
순수한 성신지력이나 기혈의 힘도 아니고 두 가지가 합쳐져 류염혈운과 비슷했다.
“성해?”
핏빛 구슬을 본 손도 등은 그제야 불안감을 떨쳐내고 기뻐할 수 있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방선 등은 혈지 구덩이 속의 핏빛 구슬을 직접 보지는 못해도 역시 강대한 파동이 나타난 것을 느꼈다.
“성해가 나타났네! 더 힘을 내세!”
액회도 기뻐하면서 양손의 수결을 맺는 속도를 높였다.
그걸 본 다른 성주들도 더 열과 성을 다해 진법을 발동했다.
우우웅!
다섯 개의 조각상이 맹렬하게 핏빛 안개를 빨아들여 핏물이 대량의 핏빛 기둥으로 변해 흡수되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혈지 수면이 낮아지고, 조각상들의 검붉던 몸이 완전히 선명한 핏빛으로 변하였다.
그런데 강렬한 빛을 퍼트리며 핏빛 구슬 안에서 빛의 문이 나타났다.
빛의 문 너머로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 것처럼 핏빛이 쏟아져 들어왔으나 성해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액 성주님, 성해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손도가 얼굴을 굳히고 액회를 돌아보았다. 다른 성주들도 매한가지였다.
핏빛 조각상에 앉아 눈을 꼭 감은 액회는 수결에만 신경 쓰고 그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콰릉!
그가 앉은 조각상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와 혈진의 일고여덟 곳과 연쇄작용을 일으켜 촉수와 같은 핏빛을 액회의 몸으로 쏘아 보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액회의 몸이 부풀며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피부에 핏빛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성주들은 액회가 변하는 것을 보고 안색이 싹 달라졌다.
진원이 가장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켜 진법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그의 뱃속에서 핏빛 수정빛이 번쩍 나타나 뿌연 구름처럼 하반신을 집어삼켰고 수많은 주술문자가 아래 조각상과 호응해 그의 몸을 얼려버렸다.
거의 동시에 신양 등 나머지 3명의 체내에서도 핏빛 구름이 응결해 하반신을 가두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헉!”
“성주님!”
혈지 구덩이 인근에서 그들을 주시하던 방선, 단통, 헌원행, 석천공 그리고 현지성의 키 작고 뚱뚱한 장로 등이 그걸 보고 무심코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데 소응, 주자원, 주자청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성주들께서는 아직 진법을 발동하는 중이시네.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소응은 담담히 경고하며 강대한 압력을 발산했다.
방선 등은 태산과 같은 압력에 호흡이 거칠어졌고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과 달리 육화부인은 시종일관 태연한 얼굴로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 마냥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