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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92화 (1,749/2,000)
  • 1992화. 핏빛 안개

    *

    “다들 살펴보았으면 이제 이리로 와서 어떻게 하면 진법을 발동해 유골을 건져 올릴 수 있을지 논의하세. 고생해서 여기까지 온 것도 그 때문 아니겠는가.”

    액회의 표정은 여전했지만, 말투를 들어보니 인내심이 슬슬 바닥나고 있는 듯했다.

    그 말에 신양, 손도 및 진원 등도 더는 미룰 수 없어 시선을 교환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한립은 석천공과 제단 반대쪽으로 가서 그곳에 3개의 하얀 바리가 심연을 지나 공간 안쪽으로 이어진 것을 보았다.

    안쪽은 어두워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는데, 액회가 부르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상한 점을 못 찾은 것 같은데, 내가 이전에 찾았던 비석에 적힌 방식대로 시도해 봄이 어떻겠는가?”

    사람들이 모이자 액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콜록콜록……. 어떤 방식으로 발동하실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진원이 기침하며 물었다.

    “혈제대진은 5개의 진법 중추가 있어 다섯 사람이 동시에 발동해야 하네. 진법의 막대한 압력을 감당하기 위해 수행이 얕고 깊은가 보다는 의식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가가 중요하지. 그렇기에 나와 다른 성주들이 함께 시도를 해보고 다른 이들은 호법을 서면 되겠지. 각 성의 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 유골을 건지는 데 성공하면 그 보상 또한 더 공평하게 나눌 수 있을 것이야.”

    액회의 설명에 몇몇이 미간을 좁혔다.

    다들 대답이 없자 분위기가 묘해졌는데 액회는 말없이 천천히 손도와 신양 등 네 명 성주들을 훑어볼 뿐이었다.

    “……액 성주님, 진법을 발동하는데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미리 말씀을 해주시면 저희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손도가 망설이다 입을 뗐다.

    “어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기연이 있던가? 위험한 만큼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입꼬리를 끌어올린 액회는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무슨 뜻인지요?”

    부견도 조금 어두운 얼굴로 물었고, 다른 이들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내 짐작대로라면, 혈제대진을 운용할 때 대량의 혈육(血肉) 기운이 짙은 안개의 형태로 혈지에서 샘솟아 진법 중추의 다섯 사람에게 밀려들 것일세. 어떻게 보면 고비지만 그 천군만마와 같이 흘러드는 기운을 몸속에 주입할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은가?”

    “중추에서 혈지의 힘을 받아들여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액회의 말에 부견이 눈을 반짝였다.

    다들 기뻐하는 가운데 신양과 한립은 눈빛에 걱정이 어렸고, 손도도 인상을 찡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눈치였다.

    ‘이건 아니야…….’

    한립이 볼 때 이 혈제대진이라는 진법 자체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고, 어떤 기운을 몸에 주입하는 술법은 항상 적잖은 위험이 따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그의 직감이 그들이 찾아야 할 것은 여기가 아니라 제단 뒤쪽으로 난 3개의 다리 너머 어둠 속에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부 수사의 말대로 일세. 고통스럽고 힘들긴 하겠지만 다들 혈제대진의 힘으로 유골이 떠오를 때까지 잘 버텨야 할 것이야.”

    액회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육의 기운을 몸에 주입하면 강해질 수 있겠으나 제때 멈추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입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침음하던 손도가 차분히 우려를 표하니 진원 등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 다시 액회를 쳐다보았다.

    “걱정할 것 없네. 다섯 중추에 선 사람들은 한 나무의 가지와 같아서 한 사람이 기운을 버티지 못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 부담을 나누게 될 것이야. 몸이 터져 죽더라도 다섯 명이 전부 버티지 못하게 됐을 때나 그리될 거란 소리지.”

    “위험할 수도 있단 말씀이시군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액회를 보며 손도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손 성주, 기연은 얻고 싶고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다면 제게 기회를 넘기시고 그냥 빠지시지요?”

    돌연 소응이 피식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이곳에서 성주 대신 진법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 하나였다.

    “하하……. 아닙니다, 소 장로. 이런저런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제 할 일은 해야지요.”

    그 말에 손도가 인상을 펴고 웃음을 터트렸다.

    “다섯 명이 모두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진법을 빠져나오면 그만이니 다들 걱정할 것 없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모두 무사할 거라 약속하지. 이렇게 말했는데도 걱정이 되는 건가?”

    액회가 웃는 얼굴로 물었고 수군거리던 성주들도 알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렇다면 진법을 발동하는 주문을 외우고 익숙해지는 대로 시작하세.”

    액회는 다들 듣는 앞에서 진법을 발동하는 주문을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지!”

    잠시 후, 액회의 말이 떨어지자 성주들이 훌쩍 몸을 날려 다섯 개의 석상의 머리 위에 섰다.

    한립 등 다른 사람들은 액회의 지시를 받아 중앙의 혈지에서 벗어나 멀리서 상황을 관찰했다.

    성주들이 전부 석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주문을 외기 시작하니 처음에는 반응이 없던 혈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핏빛 안개가 중앙의 다섯 모서리로 물러나며 대량의 핏물이 드러난 것이다.

    외부로 노출된 핏물 표면에서 부글부글 주먹 크기의 거품이 일었다.

    그때, 다섯 사람이 앉은 조각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줄곧 석상들을 경계하던 한립이 가장 먼저 이상을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신양 아래의 조각상에 자잘한 문양들이 핏빛을 내면서 아주 작은 성신문자로 변해 눈부신 빛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5개의 조각상들이 핏빛으로 물든 후, 쿠릉 하는 소리와 함께 제단 전체가 흔들렸다.

    혈지 안의 핏물이 출렁거리면서 다섯 개의 모서리로 몰려든 농염한 안개가 회오리치며 위로 솟구쳤고, 제단 위의 석상들이 입을 쩍 벌려 그걸 흡수했다.

    찰나의 순간 석상들의 머리 위로 다섯 개의 별빛 진법이 번득여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온 빛기둥으로 액회 및 성주들을 가둬버렸다.

    “크아아아!”

    “으아아악!”

    그들은 거의 동시에 포효하며 눈, 코, 입, 귀를 통해 대량의 핏빛 안개를 미친 듯이 빨아들여 피부가 선홍색으로 변해갔다.

    웅!

    놀라서 눈을 크게 뜬 현성 무리 앞에 성신문자의 빛이 더 강해진 조각상들이 각자의 날개에서 핏빛을 발산해 거대한 장막을 이루고 혈지 전체를 감쌌다.

    “저건…….”

    그걸 본 단통이 놀라 입을 뻐끔거렸다.

    “진법을 보호하는 결계다. 성주들께서 진법 운용을 마치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고.”

    힐끗 그를 본 소응은 이렇게 말했다.

    돼지 얼굴 소년 방선은 오랜만에 산만하지 않은 태도로 손도가 위치한 석상 뒤쪽에 서서 장막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핏빛 안개를 흡수하는 성주들은 곧 핏빛 비늘이라도 돋을 것처럼 대량의 수정결정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에서도 지켜보는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놀람과 흥분, 그리고 경계심이 느껴졌다.

    신양은 주변 결계가 외부와 혈지를 차단하기는 했지만 내부 인물들을 구속하는 용도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불안하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같은 생각인지 손도가 멀리서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부견과 진원도 그 점을 파악하고 전력을 다해 진법을 운용하면서 대량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하아아아!”

    얼마 지나지 않아 진원이 새빨간 얼굴로 시원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다 죽어 가는 병자 같던 그가 전에 없이 팔팔한 기세로 전신에서 2백 개가 넘는 현규를 반짝이며 진짜 현규가 아닌 곳에서도 하얀빛을 반짝였다.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신양도 전신에서 빼곡하게 2백여 개의 현규를 밝혔는데 진짜 현규의 빛과 가짜가 함께 섞여 있었다.

    부견, 손도도 차례로 가짜와 진짜 별빛을 반짝인 뒤 마지막에 액회 성주가 8 백여 곳에서 진짜 현규를 밝혔다.

    “와…….”

    눈을 크게 뜬 헌원행이 감탄했다.

    그러나 한립은 뭔가 이상했다.

    “려 형, 다들 현규 자리에서 빛을 반짝이기는 하는데 전부 타통한 현규는 아니겠지요?”

    갑자기 석천공의 전음이 들렸다.

    “저렇게 많은데 다 진짜일 리 없습니다. 강한 빛은 뚫은 현규이고 약한 빛은 아직 뚫지 못한 현규 자리겠지요. 그런데…….”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신양이 액회를 언급하며 이미 현규가 천 개는 넘었을 거라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 8백여 개뿐이라니 마음에 걸려서요.”

    “괜히 우리를 겁주려고 과장했던 것 아닐까요?”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신양 수사에게 물어봐야겠어요.”

    두 사람이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진법의 다섯 사람은 모두 소리를 지르면서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걸 본 사람들이 안색이 달라져 각자의 성주를 주시했고, 한립도 신양과 액회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면서 의심스러워했다.

    두 사람의 몸에서 약하게 빛나던 현규 자리에 핏빛이 흘러들어 점점 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현규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당연히 기운도 강해졌고 헌원행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부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솨아아…….

    혈지의 선혈이 더욱 격렬하게 부글부글 요동치면서 핏물이 대량의 핏빛 안개로 변해 다섯 개의 석상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제 핏물에 가려졌던 수많은 백골 유해들이 보였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인가…….’

    진법을 발동하고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한립도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석 형, 저 뒤쪽을 살펴보고 올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되도록 끼어들지 말고 계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생각 끝에 한립은 석천공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니, 려 형. 여기에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저도 같이 데려가면 되지 않습니까?”

    “제단 뒤쪽도 무엇이 있을지 몰라 그곳으로 간다고 반드시 안전하리란 법은 없습니다. 게다가 이곳도 누군가는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지켜봐야지요. 꼭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게 아니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겁니다. 다들 우리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아는데 함께 자리를 떠나게 두지 않을 겁니다.”

    석천공은 한립의 말에 완전히 승복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이 바로 핏빛 장막을 빙 돌아 뒤쪽의 돌다리로 향하는데 채 열 걸음을 떼기 전에 소응이 날아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려 수사, 어딜 가는 것인가?”

    당장 석천공이 달려오려 했으나 한립이 미리 전음을 보내 그를 말렸다.

    “성주들께서 혈제대진을 발동하시는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주변을 좀 둘러보려 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이런 중대한 순간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이곳에서 신 성주나 지켜보고 있는 것이 좋겠네만.”

    음산한 얼굴의 소응이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보이자 더 꼴 보기가 싫었다.

    “저희 성주는 헌원 수사와 석 수사가 함께 호법을 서고 있을 테니, 소 장로께서는 크게 신경 쓸 것 없으십니다.”

    한립은 일부러 짜증스레 답했다.

    “아무 데나 돌아다니다 무슨 기관이라도 건드려 진법에 영향을 미치면 어쩌려고 그러나!”

    “소응 장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당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어디 여기서 둘이 시원하게 겨뤄 진법을 지키는 결계가 충분히 단단한지 시험이라도 해보시겠습니까?”

    한립의 도발에 소응도 두려울 것 없었으나 그들이 싸우기 시작하면 헌원행과 석천공이 달려와 도울 테고, 주자원 오누이도 수수방관할 수 없을 테니 여기서 혼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괜히 사고 치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야 할 것이야, 안 그랬다가는.”

    소응이 어쩔 수 없이 협박조로 이야기하는데 한립이 표표히 바닥을 박차고 ‘알겠습니다’라는 짧은 대답을 남긴 채 그를 스쳐 지나갔다.

    작은 소란에 현성 사람들이 이곳을 쳐다보다 금방 혈진 속의 성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자원 옆에 선 주자청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면서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고 육화부인도 침음하다 입을 달싹였다.

    “저 녀석이 무엇을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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