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91화 (1,748/2,000)
  • 1991화. 매장지

    *

    “성주님께서 출발하시기 전 금지 내의 보물은 모두에게 분배하시겠다고 했으니 인원수대로 나누면 될 것이다.”

    눈알을 굴리던 부견이 이렇게 말했다.

    “부견 수사, 오는 내내 별다른 공을 세운 일도 없으면서 성주님과 같은 몫을 받아 챙기겠단 소립니까?”

    소응이 바로 반박하며 나섰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다 같이 힘을 모아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그리고 이보다 좋은 생각이 있으면 소 수사가 제안하세요!”

    부견은 파르르 떨며 화를 냈다.

    “성주님이 여기까지 모두를 안전하게 안내해 주셨고, 열쇠도 2개나 찾으셨으니 금지 안의 보물 중 절반은 당연히 성주님에게 돌아가고 나머지를 따로 분배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나머지는 공적을 따져서 나누자는 말입니까? 합리적이기는 합니다. 그럼 성주님과 똑같이 열쇠 2개를 찾은 려 수사와 하나를 찾은 저는 얼마나 가져가면 되겠습니까?”

    소응의 말에 신양이 물었다.

    “그건…….”

    “콜록콜록. 들어보니까 인원수로 나눠도, 공에 따라 나눠도 누군가는 불공평하다 느끼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다섯 성이 모였으니 일단 현성 3할, 청양성 2할로 보물을 나누고 나머지 5할을 세 성이 나누는 것이 어떨지요? 각 성에서 보물을 어떻게 분배할지는 차후에 알아서 결정하고요.”

    진원이 쭉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다들 생각을 해보는 눈치였다.

    석천공만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현성 쪽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그랬고, 청양성 쪽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석 수사는 당연히 우리 청양성 사람들과 같은 몫을 받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신양이 그에게 귀띔해서 기분을 풀어 주었다. 부견과 손도도 그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 같았다.

    “진 수사의 의견이 일리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세.”

    다들 크게 불만을 제기하지 않자 액회가 결정을 내렸다.

    이제 문을 여는 것은 간단했다.

    5개의 열쇠를 동시에 다섯 구멍에 꽂아 넣기만 하면 되었다. 액회는 남는 열쇠 하나를 소응에게 주었고 한립은 손도에게 넘겼다.

    곧 액회, 소응, 신양, 한립, 손도가 각각의 자리에 서서 열쇠를 들었다.

    “지금이네!”

    액회가 가장 위쪽에 ‘영화’라고 적힌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고, 소응은 좌측 상방 ‘양신’ 구멍에, 신양은 우측 상방 ‘벽린’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한립은 좌하방의 ‘엽살’을 손도는 우하방의 ‘유명’을 맡았다.

    쿠쿠쿵.

    석문 표면의 문양에서 빛이 터져 나와 모든 이들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문 안쪽에서 차칵차칵 기계음이 들리고, 5개의 열쇠가 그대로 구멍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구멍에서 진득한 핏빛이 새어 나와 금제를 없애고 있었다. 금제가 사라진 문이 열리고 어둑한 통로가 나타났다.

    “들어가지.”

    액회가 바로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한립도 문턱을 넘었다. 그들 뒤로 석문이 다시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그들을 이끌고 거침없이 걸어간 액회는 잠시 후 새까만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광장 천장에 거대한 야명주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었다.

    화륵!

    이어서 위쪽에서 시작된 성신지력 파동이 양쪽 벽 끝에서부터 번뜩 불길을 일으켜 한 번에 백석 광장을 밝혔다.

    백석 광장 끝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는데, 그곳으로 다가간 사람들은 그 밑이 끝 모를 검은 심연인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울타리 중간쯤 하얀 돌다리 3개가 그곳을 지나 공간 중앙의 원형 제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제단은 심연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하얀 산처럼 보였다.

    액회는 신기하게 주변을 살피는 무리를 이끌고 돌다리를 건넜다.

    제단에 다다른 사람들은 강대한 기운을 느끼며 표정이 달라졌다.

    제단 가운데에는 거대한 오각형 구멍이 뚫려 있어 그 안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각형 구덩이의 다섯 개의 모서리에는 기괴한 모양의 검은 인수 조각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두꺼비를 닮은 몸에 날개를 펼치고, 목은 도마뱀처럼 길어서 구멍 쪽으로 쑥 얼굴을 내밀고 있는 조각상들이었다.

    한립은 언제 돌발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검은 조각상들을 경계했다.

    머뭇거리던 이들은 액회가 먼저 오각형 구덩이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다.

    역시 울타리가 쳐진 구멍 아래쪽에는 혈제(血祭)라도 지냈는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핏물 연못이 찰랑거렸다.

    그러나 한립을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안에 옥처럼 반짝이는 백골들이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모양은 다양했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강렬한 기혈의 기운이 느껴졌다.

    “다들 보았겠지. 이 제단이 우리가 찾던 곳일세.”

    액회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콜록콜록, 액 성주님 여기가 전설 속의 그곳이란 말입니까?”

    진원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이곳에서 발산되는 기운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 같은 현수들에게는 엄청난 보물이라 할 수 있지. 게다가 내가 말했던 그 유골이 바로 이 혈지(血池) 안에 있네.”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혈지를 내려다보는데, 신양은 시종일관 긴장한 기색이었다.

    한립도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말 그대로 출렁이는 핏물에 굵은 백골들이 수북하게 있어 무엇이 액회가 말한 성해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액 성주님, 그럼 이 안에 들어가 꺼내와야 합니까?”

    부견이 망설이다 물었다.

    “상상 이상의 기운이 함유된 곳이라 그냥 뛰어들면 우리도 저 백골 중 하나가 될 걸세.”

    “그러면 어쩌면 좋을까요?”

    미간을 좁힌 손도가 의견을 구했다.

    “혈지는 혈제대진(血祭大陣) 위에 세워진 것이고, 여기 5개의 석상이 바로 그 중추라네. 성주들이 나와 함께 진법을 발동해 유골만 혈지에서 꺼내면 될 듯싶군.”

    “예? 액 성주님, 콜록콜록……. 저도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혈제대진을 발동하자는 말에 진원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말해보게.”

    “그게 저……. 콜록콜록, 대허에는 아무도 들어온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액 성주님은 어떻게 이곳을 그리 잘 아십니까?”

    진원의 질문에 대부분이 액회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홀로 적린공경을 살피다 오래된 비석을 찾아냈네. 그곳에는 어느 비경의 상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지. 그러나 ‘대허’라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연관 짓지 못했는데 막상 대허에 들어와 보니 그 내용이 모두 맞더구만. 다들 나를 믿는다면 여기까지 왔으니 함께 진법을 발동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액회가 느긋하게 답하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한립은 그 말에 허점이 많고 누구라도 급조해 낼 수 있는 뻔한 구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도 대허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그의 마지막 말은 맞았다.

    여기까지 천신만고 끝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허허……. 액 성주님 말씀을 믿지 못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믿습니다. 그저 비경에 아무도 와본 적이 없으니, 다들 찬찬히 다른 기관이나 위험한 요소는 없는지 확인한 다음 진법을 발동해 보는 것이 어떨지요?”

    사람들의 침묵 속에 손도가 먼저 나서서 말하자 나머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도 되네. 손 성주가 그리 말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하려던 참이었고.”

    액회도 미소를 지었다.

    그 말에 다들 흩어져 오각형 혈지 외에 제단 전체를 꼼꼼하게 뒤졌다.

    한립은 신양을 따라가지 않고 석천공과 같이 제단 둘레를 따라 외곽의 울타리를 살폈다.

    신양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 검은 석상 중 하나로 향했는데, 헌원행이 묵묵히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다른 성주들도 수하들을 데리고 진법의 중추라는 석상을 가장 유심히 살폈다.

    소매를 걷고 조각상의 목을 관찰하던 손도는 손바닥을 살짝 대고 몰래 성신지력 한 줄기를 주입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조각상의 문양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 혈지를 빙 둘러보던 손도의 소매 속에서 핏빛 안개 한 줄기가 소용돌이치다 사라졌다.

    잠시 후, 인상을 편 손도는 방선을 찾았다.

    돼지 얼굴 소년은 울타리에 쪼그리고 앉아 산해진미를 본 굶주린 사람처럼 침을 흘리고 있었다.

    “선아, 혈지는 함부로 장난을 쳐서는 안 되는 곳이다.”

    엄히 꾸짖는 손도의 말에 돼지 얼굴 소년이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알겠다. 일을 마치면 내가 호법을 서줄 테니 저 중에 뭐라도 건져가 보자꾸나.”

    실망한 방선의 얼굴을 보자 손도는 마음이 약해져 얼굴을 풀었다. 방선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헤벌쭉 웃기 시작했다.

    한편 부견이 검은 석상 하나를 통통 두드려 보고 있는데, 단통이 따라붙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거라.”

    “성주님,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느낌이 안 좋습니다. 이따가 진법을 발동할 때 제가 대신 나서고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구해주시지요. 제가 성주님을 구하는 것보다 그게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다 하다니…….”

    부견은 뭐라고 말하려다 말고 전음으로 말을 이었다.

    “성주들에게 진법을 발동하자고 권한 것은 액회 성주의 의도가 담긴 것이다. 네가 대신 나서겠다고 해도 그가 들어주겠느냐? 그리고 범상치 않은 진법이라 네 수행으로는 발동할 수도 없을 것이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나도 아무 준비 없이 온 것은 아니니까.”

    부견은 고개를 숙인 단통의 어깨를 토닥였다.

    진원은 다른 이들의 행동을 살피다 부견과 시선을 마주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이 제단을 돌면서 문양이란 문양들은 다 손끝으로 만져보고 있는데 왜인지 주자청이 다가와 얼쩡거렸다.

    “려비우죠? 오라버니가 당신은 인족이지만 만만히 볼 수 없다고 했는데 그냥 이렇게 봐서는 모르겠어요.”

    주자청은 한립을 따라가는 석천공을 지나 불쑥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께서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겨우 인족인 저를 두 분이 눈여겨볼 이유는 없을 텐데요.”

    한립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오라버니가 무어라 했든 상관없이 나도 당신이 흥미롭다고 생각하거든요. 인족이 이렇게 강해지기는 어려우니까. 그것만 해도……. 좀 많이 특별하긴 하죠.”

    주자청은 자신의 턱을 문지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가서 뭐 하는 것이야?”

    혈지에 관심을 쏟고 있던 주자원은 누이가 한립 옆에 와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다가왔다.

    호통을 치고 있지만 누이를 아끼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주자청은 배시시 웃으며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는 휙 하고 돌아서 오라버니인 주자원에게 걸어갔다.

    그걸 본 한립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어렸다.

    산촌에서 살 때 형제자매 다섯 명이 오순도순 모여 살았고, 그중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던 누이는 무정한 수도의 길을 걸으면서도 완전히 잊을 수가 없었다.

    주자원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이고 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신양은 태연한 척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눈에 시름이 가득했다.

    “성주님…….”

    보다 못한 헌원행이 작게 그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조용히 돌로 만든 우리 옆으로 다가가 혈지를 향해 소매를 늘어뜨렸다.

    보일 듯 말 듯 튀어나온 황토색 단창에서 하얀빛이 번뜩였다.

    펑-!

    새하얀 뇌전이 혈지에 퍼졌지만 연기만 날 뿐,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들려온 큰 소리에 다들 놀라 돌아보았다.

    “신양 성주, 뭐 하는 겁니까!”

    “혈지에 이상한 것은 없나 시험해 본 것이지요.”

    진원이 소리쳤지만 신양은 덤덤하게 답했다. 액회는 그쪽을 잠시보다 눈길을 돌리고 석상만을 바라보았다.

    얼마 뒤, 출렁임이 가라앉은 혈지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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