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화. 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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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안개 속에서 연신술을 펼친 한립은 주변에 누가 있는지 확인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반 시진이 지나 어디선가 용울음 소리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른 유염혈운을 발견해 삼킨 것이다.
한립은 액회를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의식의 힘이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건만 아직 하나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흠?”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한립이 반 각을 걸어가다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몸을 날린 한립은 깊이를 모를 지하 균열 사이에서 유염혈운 두 덩이가 파리처럼 웅웅 거리며 빠져나오려고 핏빛을 반짝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염혈운, 그것도 두 개나!”
이에 한립은 얼굴을 펴고 즉시 날아들어 유염혈운 한 덩이를 거두려 했다.
그 순간 ,파공음이 들리고 부견과 단통이 나타나 나머지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수정빛이 반짝이고 그들이 노리던 유염혈운 마저 한립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놓거라. 그러면 곱게 보내줄 것이다.”
부견의 얼굴은 서늘했고, 단통의 눈빛도 곱지 않았다.
한립은 뭐라고 떠들든 말든 유염혈운 두 덩이를 거둬서 얼른 균열 틈에서 뛰어올랐다.
“저놈이!”
열 받은 부견이 소매 속에서 검은빛을 방출했다.
챙!
이에 한립도 손에서 하얀빛이 나와 검은빛을 막았다.
냉소를 흘린 부견이 손을 움직이자 검은빛이 구불구불 8개로 갈라져 곳곳에서 한립을 찔러 들어갔다.
한립도 손에 든 곡도를 진동해 8개의 눈부신 검빛을 만들었다.
채채채챙!
검은빛과 흰빛이 교차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쩡!
검은빛들 사이로 진짜 검끝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는데, 한립은 주먹으로 그걸 쳐내고 물러섰다.
주먹 끝에 희미하게 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부견은 자신의 숨겨진 한 수마저 파악 당하자 얼굴을 굳혔다.
“부 성주님, 제 것을 탐내지 마시고 다른 곳에서 유염혈운을 찾아보시지요. 그럼 이만.”
한립은 성월화의 성규에 빛을 밝히고 하얀빛으로 변해 달아났다.
그는 부견과 단통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치고 싶지 않아 그들이 공격을 피하면서 현성 무리가 모이는 곳으로 향했다.
부견의 눈빛이 험악해져서 다시 공격하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주씩이나 되는 분이 청양성 수사를 그리 겁박해서야 되겠습니까?”
안개를 뚫고 나타난 사람은 신양이었다.
그는 유염혈운을 먹고 상당히 많은 현규를 뚫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기운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농담 마십시오. 저는 인근의 유염혈운을 수색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수행에 큰 진전이 있으신 것 같으니 축하드립니다.”
부견은 뻔뻔하게 걸음을 멈추고 단통도 현규의 빛을 거두었다. 신양의 등장에 그들에게 쫓기던 한립도 돌아서 있었다.
“하하, 그랬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신양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볼 일이 없으면 저희는 계속 찾아봐야겠습니다.”
부견은 한립에게 눈길을 주다 단통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괜찮으십니까?”
“신 수사 덕분에 별일 없었습니다.”
“수사의 실력에 제가 나서지 않았어도 되겠지만 부견은 액회의 심복이니 웬만하면 충돌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신양의 충고에 한립이 공수를 했다.
한립은 신양이 떠난 뒤 다른 조용한 장소를 찾아 유염혈운을 꺼냈다.
현성 오성회무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면 대단한 보물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유염혈운이 여기저기 널렸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대허가 현성과 괴성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생각이 많아진 한립이 쓴웃음을 짓고 핏빛 구름 덩어리를 삼키려는데 또 어디선가 용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또!’
다행히 주변에서 누군가 유염혈운을 연화시키는 중이라 그의 기척을 숨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입을 벌려 유염혈운 두 덩이를 같이 삼켰다.
몸을 바르르 떤 그는 피부가 핏빛으로 물들어 열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뱃속에서 불을 때는 것 같은 고통에 인내심이 강한 그도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제길!’
신양이 복용했을 때와 다른 것 같지 않은가?
‘설마 두 개를 한꺼번에 먹어서…….’
몸이 불덩이가 된 한립은 유염혈운의 폭발적인 기운 때문에 전신이 칼처럼 찌르는 고통을 느꼈다.
<천살진옥공>이 저절로 발동해 뜨거운 기류를 몸 곳곳으로 퍼트리고, 한립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직 뚫리지 않은 현규 자리로 기운을 밀어 넣었다.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현규가 뚫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면서 스무 개가 넘는 새로운 현규가 생겨났다.
이제 전신에 260개의 현규가 뚫린 것이다.
현규가 뚫리고 열감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몸이 개운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쾌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유염혈운이 현수들 사이의 신물로 추앙받는 이유를 오늘에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단번에 현규를 스무 개 넘게 뚫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뚫은 현규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한립은 혹시 몰라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기형을 다스렸다.
얼마 뒤, 그는 액회와 육화 부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석천공, 헌원행, 부견 그리고 단통을 제외한 모두가 이미 돌아와 있었다.
액회나 육화부인은 그가 돌아온 것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신양이 대열 끝에 서 있다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려 수사, 어쩌다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수행이 꽤 느신 것 같습니다.”
“그럭저럭 진보가 있었습니다.”
“다행이군요. 현성의 주자원과 주자청 오누이도 유염혈운을 찾아 수행이 크게 늘었답니다. 주자원은 원래도 강했는데 이제 성주들과도 엇비슷하겠어요.”
신양은 전음으로 바꾸어 말을 이었다. 이에 고개를 돌려 액회 뒤에 서 있는 주자원을 잠시 바라보다 주변을 살폈다.
“석 수사와 헌원 수사가 보이지 않는데 사고가 난 것은 아니겠지요? 부견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운 나쁘게 마주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먼저 출발했으니 어디 멀리까지 가서 뒤지고 있겠지요.”
한립은 석천공이 걱정되었지만 곧 파공음이 들리고 석천공과 헌원행이 돌아왔다.
의기소침해 보이는 게 둘 다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나중에 돌아온 부견과 단통도 마찬가지인지 신양과 나란히 걷는 한립을 보는 눈빛에 노기가 잔뜩 섞여 있었다.
모두 돌아오고 액회가 걸음을 재촉해 핏빛 안개를 빠져나갔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맥이 시야 끝까지 이어져 풀이 무성한 밀림과 달리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흉흉한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한 건 산맥이 흙색이 아닌 온통 핏빛이었고, 산과 산 사이에 시뻘건 강이 흐르며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이었다.
액회는 주저 없이 무리를 이끌고 산에 올라 어느 거대한 산에 있는 분지 안으로 들어갔다.
핏빛 강물이 교차하는 가운데 어마어마한 크기의 핏빛 대전이 산과 엇비슷한 높이로 세워져 있었다.
“와, 장관입니다!”
석천공이 찬사를 보냈으나 한립은 이상하다는 눈빛을 하다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굳게 닫힌 핏빛 성문에는 복잡한 문양이 어우러져 진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성신진법과 비슷하지만 다른 종류의 진법과 결합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석문 진법은 다섯 개의 교차점에 검은 구멍이 뚫려 매화 모양을 이루고, 구멍마다 두 개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엽살, 유명, 벽린, 양신, 영화’
한립은 품에 넣어둔 두 개의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성주님, 이곳이 말씀하시던 금지입니까?”
손도가 앞으로 나섰다.
“그렇네.”
핏빛 대전에 이르러 뜨거운 눈빛을 보내던 액회가 가볍게 숨을 고르고 답했다. 그 말에 다들 웅성웅성 들뜬 감정을 내뿜었다.
침음하던 손도가 앞으로 나서서 문에 손을 대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팟.
핏빛이 스며들자 하얀 별빛이 빠져나와 무언가를 감지했다.
“이곳에서 유골이 기운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손 성주, 액 성주님 말씀을 의심하기라도 한 겁니까!”
손을 거둔 손도의 말에 부견이 성을 냈다.
“이곳은 처음이니 미리 살펴보는 것도 당연하네. 비술로 성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면 이제 안심하고 들어가지.”
액회는 그런 부견을 말리고 차분히 말했다.
“성주님 말씀이시니 저희 통여성과 현지성은 무조건 믿습니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리 말이지요!”
부견이 손도와 신양을 향해 비웃음을 보내고 진원도 동조했다.
눈을 가늘게 뜬 신양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제 금제를 풀고 석문을 열지.”
액회가 명을 내리자 부견 등이 분분히 고개를 조아렸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때 손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례하게 뭐 하는 겁니까! 자신의 신분을 잊지 마세요!”
곧바로 부견이 나서 그를 질책했다.
“하하, 부 성주 그리 화내지 마십시오. 다만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 있어 성주님께 여쭈려 합니다.”
“말해보게, 손 성주.”
액회도 역정을 내지 않고 손도를 향해 웃는 낯으로 물었다.
“금지로 들어가려면 열쇠 5개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려 수사에게 있는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는 성주님께서 가지고 계시는지요?”
“나라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4개를 모았겠나. 내게도 2개밖에는 없네.”
액회는 핏빛 열쇠 2개를 꺼내 보였다.
“그럼 총 3개인데 어떻게 석문을 여실 생각이신지요?”
손도가 슬쩍 한립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제는 부견과 진원도 액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하, 열쇠는 이미 다 모였으니 걱정하지 말게. 신 수사, 려 수사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열쇠를 꺼내 두어야겠지?”
액회의 말에 모두가 놀라 한립과 신양을 돌아보았다.
“액 성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한립은 태연하게 답했다.
솔직히 액회가 갑자기 나타나 그에게 함께 가자고 했을 때부터 이럴 거라 예상했었다.
그가 다른 열쇠에 접근했을 때 느꼈던 이상을 생각하면 액회가 무언가를 알아챈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한립이 핏빛 열쇠 2개를 꺼내고 신양도 담담히 열쇠를 내놓았다.
“아, 액 성주님을 따라갈 수가 없군요. 신 수사와 려 수사에게 열쇠 3개가 더 있었어요.”
손도가 고개를 저으며 빙긋 웃어 보였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저와 려 수사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신양은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손도를 한 번 보고 액회를 향해 공수했다.
“그렇지. 괴성 사람들의 행방을 아직 모르는데 당연히 주의해야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주님.”
“열쇠도 모두 모였겠다 어서 문을 열지요. 액 성주님의 귀한 시간을 뺏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때다 싶었는지 부견이 코웃음을 치며 신양과 한립에게 멸시의 눈빛을 보냈다.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한립이 입을 열고 끼어들었다.
“려비우, 청양성 노예인 주제에 어디라고 나서는 것이냐!”
“허허, 려 수사 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해보게.”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부견과 달리 액회는 손을 들어 그를 막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성주님. 괜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지만 금지 안으로 들어가면 안의 보물은 어떻게 분배하실 생각이신지요?”
한립은 코끝을 긁적이면서 민망한 듯 웃었다.
그 말에 모두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신경 안 쓰는 척해도 모두가 알고 싶은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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